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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촉문명_서남이
 알자고    | 2017·09·18 10:08 | 조회 : 35

<사진>하늘과 통하는 나무, 우주수인 통천신수(通天神樹)이다. 고촉문명의 대표적인 정신세계


5호 16국 이전에 춘추전국시대의 진(秦)나리와 사천 지역의 중간 지역을 두고 초(楚)나라의 위왕(威王)은 다소 황당한 명을 장군 장교(莊蹻)에게 내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은 검중(黔中) 이서(以西)의 지역을 경략하도록 하기 위해 그를 지리적으로 전혀 모르는 곳으로 파견하는 것이었다.*

* 『후한서(後漢書)』, 卷 八十七,「서강전(西羌傳)」, 第 七十七. [본문] 及武乙暴虐,犬戎寇邊,周古公逾梁山而避於岐下。及子季曆,遂伐西落鬼戎。太丁之時,季曆複伐燕京之戎,戎人大敗周師。後二年,周人克餘無之戎,於是太丁命季曆為牧師。自是之後,更伐始呼、翳徒之戎,皆克之。乃文王為西伯,西有昆夷之患,北有獫狁之難,遂攘戎狄而戍之,莫不賓服。乃率西戎,征殷之叛國以事紂。

소위 한족이 표현했던 미개한 서남이(西南夷) 지역이 역사 기록에 출현하게 되었던 첫 번째 사례였다. 초나라 장수 장교는 협로를 뚫고 들어가 서남이를 정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시 초나라의 경양왕(頃襄王) 22년(서기 전 277년)에 진(秦)나라가 초나라의 검중군(黔中郡)을 차지하여 길이 끊기게 되면서 돌아가지 못하고 스스로 현지의 왕이 되었다.

위왕 시기와 경양왕 22년 전후 50년의 간격이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장교가 실존 인물이었다면 아마도 그 후손이 왕이 되었다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관련된 사료『사기(史記)』「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중에서 큰 나라로 기록된 것이 야랑(夜郎), 전(滇), 공도(邛都), 사(徙), 작도(筰都), 애방(厓駹), 백마(白馬) 등이다.* 남월(南越)의 경우 조타(趙佗) 시대에 재물을 동원해 동서 만 여리에 이르는 지역을 역속(役屬)시켰다고 하는 기사가 있는데 야랑 역시 그렇게 역속 되었던 나라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후 한 무제가 월(越)을 평정하고 9군을 설치할 때는 역으로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이 파촉(巴蜀)의 죄수병과 야랑(夜郎)의 군사를 동원하였다고 한다.*

* 『사기(史記)』, 卷 百十六,「西南夷列傳」, 第 十六. [본문] 西南夷君長以什數,夜郎最大;其西靡莫之屬以什數,滇最大;自滇以北君長以什數,邛都最大:此皆魋結,耕田,有邑聚。其外西自同師印,北至楪榆,名為巂、昆明,皆編發,隨畜遷徙,毋常處,毋君長,地方可數千里.

* 『사기(史記)』, 卷 百十六,「西南夷列傳」, 第 十六. [본문] 建元六年,大行王恢擊東越,東越殺王郢以報。恢因兵威使番陽令唐蒙風指曉南越。南越食蒙蜀枸醬,蒙問所從來,曰「道西北牂柯,牂柯江廣數裏,出番禺城下」。蒙歸至長安,問蜀賈人,賈人曰:「獨蜀出枸醬,多持竊出市夜郎。夜郎者,臨牂柯江,江廣百餘步,足以行船。南越以財物役屬夜郎,西至同師,然亦不能臣使也」蒙乃上書說上曰:「南越王黃屋左纛,地東西萬餘裏,名為外臣,實一州主也。今以長沙、豫章往,水道多絕,難行。竊聞夜郎所有精兵,可得十餘萬,浮船牂柯江,出其不意,此制越一奇也。誠以漢之彊,巴蜀之饒,通夜郎道,為置吏,易甚」上許之。乃拜蒙為郎中將,將千人,食重萬餘人,從巴蜀筰關入,遂見夜郎侯多同。蒙厚賜,喻以威德,約為置吏,使其子為令。夜郎旁小邑皆貪漢繒帛,以為漢道險,終不能有也,乃且聽蒙約。還報,乃以為犍為郡。發巴蜀卒治道,自僰道指牂柯江。蜀人司馬相如亦言西夷邛、筰可置郡。使相如以郎中將往喻,皆如南夷,為置一都尉,十餘縣,屬蜀。

이 때의 여파로 서남이 지역에도 공도(邛都)를 월휴군(越巂郡),작도(筰都)를 침리군(沈犁郡),애방(厓駹)을 문산군(汶山郡), 백마(白馬)를 무도군(武都郡)으로 각각 설치했다고 한다.* 그 이전에 주로 한 무제(漢武帝)는 서남이로 가는 길을 뚫을 때 파촉 지방의 재력을 이용하다 그 지역의 민생이 피폐해 지자*, 흉노를 방비하는데 전력하고자 야랑(夜郎)의 2개 현(縣)과 1개의 도위(都尉)를 제하고는 그 지역에서 물러난 실패했던 전력이 있었다.* 이러한 서남이인들은 그 후로는 스스로 나라를 이루어 당대(唐代)에는 남조(南詔), 송대(宋代)에는 대리(大理) 등을 세웠고 현재도 그 후예들이 자신들의 혈통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 서남이의 여러 종족들은 일찍부터 중원 왕조에 종속되었다. 한 무제 건원(建元) 6년(서기 전 135년)에 한왕실에서는 야랑에 건위군(犍爲郡)을 설치하여 행정을 관할하였으며, 그 후에 계속하여 공(邛) · 작(笮) 등에도 하나의 도위(都尉)와 10여개의 현(縣)을 설치하여 촉군(蜀郡)에 예속시켰다. 한대 원정(元鼎) 6년(기원전 111년)에는 지금의 운남성 동부와 귀주성 서부 지역에 장가군(장가郡, 장=조각장+羊, 가=조각장+可)을 설치하고 야랑후(夜郞侯)를 야랑왕(夜郞王)에 봉하였다. 서남이의 다른 부락들도 이것을 보고 모두 귀순을 청하였다. 한 무제는 마침내 공도(邛都)를 월수군(越수郡)으로, 작도(笮都)를 침려군(沈黎郡)으로, 염방을 급산군(汲山郡)으로, 백마(白馬)를 무도군(武都郡)으로 각각 고쳤다.

* 서남이는 부족 간에 균형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그 격차가 심하였다. 그 중에서 야랑 · 전 · 공 등의 부족이 비교적 발달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머리를 감아올리고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촌락을 형성하여 모여 살았다. 수 · 곤명 등은 모두 변발을 땋고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니는 유목생활을 하였으며, 도 · 작도 · 염방 등은 농업을 경영하면서 유목생활도 하였다. 서남이는 상업에도 활발하게 움직여 인접한 촉(蜀)나라와 무역을 하였는데, 그들의 주요 생산품인 작마(笮馬) · 야크털 · 금 · 은 · 동 · 상아 등을 가지고 그들에게 필요한 비단 · 철 · 소금 · 대 · 레몬잼 및 일용품과 교환했다.

* 원봉(元封) 2년(서기 전 109년)에 한 왕조는 군대를 동원하여 전족(滇族)을 토벌하였다. 이에 전왕(滇王)이 항복하자 전(滇)에 익주군(益州郡)을 설치하고, 전왕에게 옥새를 하사하여 그로 하여금 그 지역에서 전족에 관한 업무를 계속 관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야랑왕 흥(興)과 구정(鉤町)의 전우(田禹), 누와후(漏臥侯) 유(兪)가 여러 해 동안 교전을 벌이자 한 왕실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화해를 주선하였으나 그들은 거기에 대응하지 않았다. 한 성제(成帝) 하평(河平) 2년(서기 전 27년) 장가태수 진립(陳立)이 야랑왕 흥을 죽임으로써 야랑국은 멸망하였다.

이들 나라 중 전왕국(滇王國)은 고고학적으로 그 실체가 드러나면서 이 역시 촉국(蜀國) 만큼이나 독자적인 문화를 나타내 중국학계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이 역시 삼성퇴 문명과 마찬가지로 황하문명보다는 앞서 있으며 그 동안 서남이 지역을 오랑캐로 규정하고 그 문명이 15세기 이후에 발달했다고 추정했던 중국학계는 그들의 연구목록을 대폭 수정 할 수밖에 없었다.*

* 행정중심인 곤명(昆明)일대가 전국(戰國)시대 당시 전국(滇國) 지역에 속했기 때문에 전(滇)으로 간칭 한다고 하였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경내에 전지(滇池)가 있기 때문에 전(滇)으로 간칭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나라는 호상(湖上) 주거 생활을 했는데 무선호(抚仙湖) 일대에서 그러한 유적과 유물이 약간 발견된 것 같다.* 또한 묘지와 해당 무덤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발굴이 있었다. 이러한 발굴지의 위치는 호반에서 떨어진 언덕에 자리 잡았었다고 운남성 고고학연구소에서 주장하고 있다. 전왕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에서는 사마천이 말하는 것과 같이 야랑과 함께 “왕인(王印)”이 주어진 서남이의 두 나라 중 하나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는 한 무제가 하사한 “전왕지인(滇王之印)”의 명문이 새겨진 도장이 발견이 되었기 때문인데 이 명문의 도장은 학술적으로 한나라와 서남이 국가들과의 관계를 고찰하는데 있어 연구 가치가 크다.*

* 서기 전 109년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사천(四川) · 운남 방면을 정벌했을 때 한나라 편을 들었기 때문에 전왕(滇王)에게 왕인(王印)을 주었다. 그러나 서기 전 80년대 서남이의 반란이 일어나 멸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 석채산유적(石寨山遺蹟)은 중국 운남성(雲南省) 진녕현(晋寧縣) 석채산에 있는 무덤군으로 전한 초~후한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동물의장이 우수하면서 환조(丸彫) 내지 선각(線刻) 무늬 모양으로 사회생활의 정경을 묘사한 것이 많다. 그 중에는 이 지역의 지배자인 전족에게 조공하고 사역된 피지배민족으로 식별되는 것도 있으며, 기년제사(祈年祭祀) · 공희(共犧) · 농업 · 가내작업 등이 세부적으로 표현된 것도 있어 이 지역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1955∼1960년 4회에 걸쳐 운남성 박물관이 50기(基)의 무덤을 발굴하였다. 유물로는 석기 · 토기 · 동고(銅鼓) · 편종(編鍾) · 동기 · 철기 · 거울 · 금은기 · 칠기 · 도기 · 화폐 등이 출토되었다. 석기로는 한쪽 날의 돌도끼 · 유견(有肩)돌도끼 · 간돌화살 · 돌송곳 등이 있고, 토기로는 접시 · 항아리 · 바리 · 완(硯) 등이 있다. 무덤은 지방적 색채가 짙은 청동제 무기 · 장신구를 풍부하게 부장한 것이 많으며, 중국 문화의 중심지에서 수입된 유물도 다수 발견되었다. 특히 6호분에서 출토한 <전왕지인(滇王之印)>의 인문(印文)이 있는 금인(金印)은 서기 전 109년 한(漢)나라 무제가 전족(滇族)의 왕에게 사여(賜與)한 것으로 보이는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자료이다.

물론 이 도장은 정복자인 한나라에게서 하사받게 된 것으로 이 시기는 전왕국이 독립국의 지위를 잃고 무덤이나 유물이 점점 한나라 양식을 따라가게 되던 때이다. 하지만 한나라에 복속되기 이전의 유물들은 중원의 유물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전국인들은 대체로 전문적인 야장들로 구성되어 있고 귀족들의 무덤들은 인상적인 청동 예술작품들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뜻밖에 부분에 있어 이들 지역에 스키타이 인의 영향을 받았는지 북방계 문화도 나타나고 있다. 유물이 출토되는 무덤유지에는 석채산(石寨山), 이가산(李家山), 양포두(羊甫頭) 등이 있는데 이곳 유지들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전혀 한족과 관계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북방 유목적 영향 뿐 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영향까지 받았기 때문에 북방과 남방이 교차하면서 혼합되는 양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부분 때문에 서남이는 완벽한 남방계가 아닌 북방과 남방 혼용의 문화로 주장할 수 있다.


출처 : 장길선박사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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