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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성미경  | 2006·10·31 23:54 | 조회 : 2,455
이글은 '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1997년, 박현 지음을 중심으로 편집, 요약한 것이다.


1. 단군조선(檀君朝鮮)

상고시대의 동아시아에서는 여러 기마종족들은 공존과 갈등 관계에 따라 크고 작은 연맹체들로 세워지거나 분열되었으며 교통과 농업기술에서 뒤떨어진 토착종족들은 이들 기마종족들에 의하여 정복되고 동화되었다. 우리의 조상들이 여러 갈래의 유사한 기마종족들과 연맹을 통하여 오랫동안 어우러져 살다가 세운 고대 국가가 바로 단군조선이다. 단군조선의 붕괴과정에서는 일부 종족들은 그들만의 새로운 생활무대를 찾아나섰고, 그 과정에서 선택된 주요한 개척지의 하나가 만주벌판과 한반도였다.

시조 단군(壬儉)은 요(堯)와 같은 시대에 즉위하였고, 국호(國號)는 박달(檀) 또는 백달(白達)이라 하였다. 단군은 단국(檀國)의 군(君) 즉 '박달나라의 임금'이란 뜻이다.

단군조선은 평양성(平壤城), 백악산 아사달(白岳山 阿斯達), 장당경(藏唐京), 아사달(阿斯達) 등에 도읍하였다. 마지막 도읍지였던 아사달은 그전에도 도읍을 했던 곳이므로 단군조선의 도읍지는 세곳이었다.첫번째와 마지막 도읍지였던 평양성과 아사달은 심양(沈陽)의 동남에 있었던 곳으로 평양(平壤) 또는 '펴라'라고 불렀으니 수도라는 뜻이다.

이곳을 임검성(壬儉城)이라도 불렀다. '임검님이 계신 성' 즉 수도(首都)라는 말이며 평양(平壤)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두번째 도읍지,백악산 아사달(白岳山 阿斯達)은 하북성(河北省)에 위치했으며 세 번째 도읍지였던 장당경(藏唐京)은 대능하(大凌河) 중류 동부연안에 위치한 북진(北鎭)이다.

단군조선의 정부 조직으로는 오늘날 행정 각부에 해당되는 七加(馬可,牛可, 熊可, 鷹可, 鷺可, 鶴可, 狗可)와 이들 제가(諸加)를 통활하는 국무총리 격의 호가(虎加; 후에 龍加로 改稱)등 소위 단군팔가(檀君八可)가 있었다. 제 2 세 단군 때는 봉가(鳳可)를 추가하여 9가로 늘었다. 그리고 영토가 점점 넓어짐에 따라 제 4 세 오사구(烏斯丘) 단군 때부터 천하를 9개 대국(大國)과 12개 소국(小國)등 모두 21주(州)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2. 단군조선의 제후국, 기자조선

단군조선은 바이칼 호 일대와 요동, 요서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기마종족의 구세력 곧 치우계의 정통세력이었으며 기자계는 황하로부터 밀려난 중국계 기마종족의 잔존세력 즉 은나라 유민집단이다. 기자조선은 단군조선의 하나의 제후국으로 단군조선의 서부 변경에 위치하였다. 지금의 하남성 연산, 난하의 하류 동부지역에 해당된다. 이들의 후예들은 훗 날 육로와 해로로 한반도 남부로 이동했다. 이처럼 기자는 그 조상과 후예를 모두 다민족 연맹이었던 우리의 상고사에 연결되어 우리 역사의 일부를 이룬다. 은나라의 멸망은 기원전 1200년 경이며 단군조선은 기원전 2333부터 기원전238까지이니 기자조선은 단군조선의 중반기의 역사다. 기자가 나라를 세운 것은 25대 단군 솔나의 재위기간(기원전 1,100-1035)에 해당한다.


3. 중국계 기마민족의 후예, 위만조선(기원전 195-108)

단군조선이 분열될 때 각 종족들은 나름대로 독립의 기치를 내걸었다. 그 가운데 단군의 후계자를 자칭하던 해모수는 기원전 239년 4월 8일, 당시 가장 큰 독립국가인 북부여를 열었다. 남쪽 중국지역에서는 기원전 770년 부터의 춘추전국시대를 거친후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통일국가 진(秦)을 세우고 한(漢)나라가 일어나니 그곳에서 연(燕)나라를 세우고 살던 중국계 기마민족의 유민들의 다수가 과거 단군조선의 영역의 일부인 기자조선으로 들어와 기자조선을 멸망시키고 기원전 195년 위만조선을 세웠다. 그리하여 폐관된 단군조선의 자리에 위만조선과 북부여가 나누어 통치하게 되었다.


4. 한사군(漢四郡)의 위치

후한서에 의하면 한무제는 위만조선을 3대 80여년 만에 멸망시키고 위만조선의 고토에 낙랑(樂浪), 진번(眞番), 임둔(臨屯), 현도(玄도) 4군(郡)을 두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한무제 때의 사가(史家) 사마천은 낙랑(樂浪), 진번(眞番), 임둔(臨屯), 현도(玄도)를 한사군이라 한 기록은 없다. 북부여세가에 의하면 예맥조선(북부여)이 위만조선의 옛강토로 침입해 오니 견딜 수 없어 위만조선의 땅을 예맥조선에 떼어주었다. 동사강목에 의하면 예맥을 낙랑에 소속시켰다고 하는데 오히려 낙랑군의 땅을 떼어서 예맥조선에 준 것이다. 또한 한사군이라 한 진번과 임둔은 한사군이 아니라 단군조선의 진한과 변한 그리고 기자조선이다. 소위 한사군의 위치는 물론 한반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해동역사와 18사략에 의하면 한무제의 영향은 발해지방은 물론 북경 일대에조차 미치지 못하였다. 그 지역은 이미 북부여의 동명제의 세력하에 있었다. 한사군은 지금의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에서 요하에 이르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5. 너무 길었던 삼국시대

단군조선의 해체는 열국시대(列國時代)라 불리어지는 분열의 시대를 맞는다. 이 시대에 나타났던 나라들은 위만조선(衛滿朝鮮), 북부여(北夫餘), 동부여(東夫餘) 또는 졸본부여(卒本夫餘), 진한(辰韓), 후에 백제(百濟)가 되는 십제(十濟), 말갈(靺鞨), 발해(渤海, 고구려멸망 이후의 발해가 아님), 옥저(沃沮), 동예(東濊), 낙랑(樂浪), 몽골(蒙骨), 선비(鮮卑), 돌궐(突厥), 흉노(匈奴) 등이다. 삼국시대는 이러한 분열에서 다시 통합을 이루는 반환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열을 극복하는데 무려 700여 년이 넘는 세월동안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단군조선시대에는 연맹의 형태로 함께 살던 부족들이 각기 완전한 분열의 길로 들어 섰으며 단군의 직계 후예들도 삼국으로 갈라져 갈등상태에 안정적으로 정착되어버렸다. 결과적으로 삼국은 각기 경쟁적으로 오랜 분열 끝에 통일을 이룬 한족(漢族)이라는 새로운 강
자와 결탁을 해야 했으며 결국 문화적 주체성은 상실, 변질되었으며 사대주의가 생겨났다.


6. 신라의 배신적 삼국통일

신라는 선택하지 말아야 할 상대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상대를 자신의 영역에서 제대로 추방도 하지 못했다. 단군조선의 영역을 회복하는데 주력하면서 만주대륙을 통치하였던 고구려와 거대한 해양제국이었던 백제의 멸망은 기마종족의 오랜 염원이었던 단군조선의 부활을
머나먼 꿈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는 뛰어난 단군조선의 정신문화를 고구려나 백제보다 신라가 더욱 높게 이어 받은 덕이기는 하나, 결국 우리 역사에 비극을 불러 왔으며 고구려의 계승자인 대진(발해)이 고구려의 영역을 회복하고 맞섬으로서 다시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7. 신라의 청해진 폐쇄

우리의 조상들은 그 때까지 육로와 해로를 통하여 대륙과 일본, 서역, 동남아로 진출하였었다. 그러나 신라는 청해진을 폐쇄하고 그 역할의 중요함을 망각하고 스스로를 한반도에 가두어 두어 우리 겨레의 진취성를 거세하여 버렸다.


8. 대진(大震)의 멸망과 왕건의 선택

발해(渤海)는 당나라와 신라가 대진을 부르던 이름이다. 대진은 주역의 괘 가운데 새로운 출발을 뜻함과 아울러 동방을 뜻하는 진(震)에서 따온 이름으로, 시작은 동쪽에서 했으나 커져서 결국 대륙을 차지하겠다는 야심이 담긴 나라 이름이다. 대진은 기마종족 염맹국가였던 고구려의 국가체제를 그대로 물려받은 나라였다. 대진이 기마종족 내부의 반란으로 멸망한 뒤, 우리 계레에게는 두가지 선택이 있었다. 하나는 기마종족의 거대한 연맹을 재구축하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단일종족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역사를 반들어 가는 길이었다. 궁예가 첫 번째 선택의 길을 위하여 독재정권을 강화하였지만 조화와 연맹과 화합의 전통을 이어받은 왕건의 고려는 단일민족으로 축소지향의 역사를 펼치게 된다.


9. 두개의 천리장성과 만리장성의 의미

우리역사에는 두개의 천리장성이 등장한다. 하나는 고구려 말기에 당나라의 침입을 예상하고 AD631년부터 연개소문이 지휘하여 16년에 걸쳐 쌓은 것이며, 다른 하나는 AD1014년(고려 현종 5년)부터 30년에 걸쳐 압록강 어귀에서 동해안 도련포까지 고려가 거란족과 여진족을 방어하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고려장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반면에 만리장성은 BC200년대에 기마종족의 대륙진출이 두려워했던 진시황이 엄청난 국력의 낭비와 정치적 파탄을 무릅쓰고 완공시킨 것이다.

만리장성이 세워질 때까지 기마종족은 공세를 펼치는 세력이었으며 중국 한족은 방어하는 세력이었기에, 방어하는 한족이 장성을 쌓아야 했다. 그러나 공세와 수세의 세력관계가 뒤바뀌면서 한족은 만리장성을 넘어 그들의 영토를 확장하니 고구려는 고구려 천리장성을 쌓아 방어선을 구축하였고 고려시대에는 한반도내로 방어선을 후퇴시켜야 했다.


10. 묘청의 실패와 김부식의 삼국사기

묘청은 승려라기보다 도선의 정통을 이어받은 전통선교의 사상가였다. 묘청은 고구려의 수도이기도 했으며 단군 왕검의 안식처라고 알려진 서경으로 천도하여 정치, 사회적 상징성을 분명히하고, 나아가 자신의 세력기반을 튼튼히 하며, 이를 기반으로 고려를 고구려나 대진같은 나라로 재건축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기득권자들인 개경 관료들을 대표하는 김부식은 묘청 일파의 주장과 그들의 신앙적 행사가 민심을 현혹시키는 수단이라 비방하고 인종을 설득, 협박하였다. 1135년 정월묘청 일파는 마침내 군사력을 동원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여 개경의 보수파에 반기를 들었다. 김부식의 노련한 지휘는 서경 군대의 핵심 지휘자인 조광으로 하여금 칼을 거꾸러 들어 묘청의 목을 베고 투항하게 하였다. 그러나 투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그들은 투쟁을 계속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었다. 묘청 일파의 재건국운동을 파괴한 김부식은 중국적 관점에서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대륙에 있었던 백제의 영토를 고의적으로 서술하지 않았으며 대진을 우리 역사에서 아예 빼버렸다.


11, 몽고의 침입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실패 이후 이 시대의 고려는 왕도 마음대로 갈아 치우던 최씨의 무신정권 시대였다. 몽고제국을 세우고 세계정복을 나선 징기스칸에게는 초원이 없는 고려는 별로 관심의 대상이 아니였는지 그의 생전에는 단지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여러가지 공물만 요구하여 그때마다 적당히 떼워 충돌을 피해왔다. 그러나 1229년 오코타이칸이 2대 대칸위에 오른 후 고려 고종 18년인 1231년 몽고군은 살리타이를 대장으로 하여 기어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침입하여 의주를 짓밟고 삽시간에 충주, 청주까지 쳐들어왔다.

고려 조정에서는 할 수 없이 화친을 청하니 몽고군은 72명의 관리 즉 다로가치를 남기고 물러갔다. 이 시대의 고려는 거란을 물리쳤던 최충헌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 최우가 절대권자이던 때다. 최우는 다로가치들이 점차 고려의 정치에 간섭하기 시작하자 몽고군의 재침입을 예견하고 도읍을 강화도로 옮겼다. 1차 침략에 이어 몽고군은 1232년 12월 2차 침입, 개경을 함락하고 남부 지방 일부를 황폐화 시켰다. 그러다 명궁 김윤후 스님이 쏜 화살에 살리타이가 목숨을 잃게되고 1235년 몽고군은 3차 침입을 해왔다. 1253년 4대 대칸위 뭉케칸시대의 4차 침입때는 포로가 20만 6천여명에 달했다. 1259년 고려는 끝내 몽고의 중국왕조인 원과 화의하여 충렬왕 이후 공민왕 때까지 80여년 간을 원의 내정 간섭을 받고 자주성을 잃었다.

1270년 삼별초를 거느리고 난을 일으킨 장수 배종손과 노영희은 진도에 성을 쌓고 거제, 제주, 남해등 30여개의 섬을 점령하여 해상왕국을 이루어 몽고군에 저항하였으나 지금의 제주도인 탐라까지 밀려갔다가 결국 몽고 토벌군에 전멸하고 남은 70명은 한라산 깊숙히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2.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14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매우 복잡하였다.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는 내부분열과 한족의 저항으로 차츰 힘을 잃어가고 있었고 몽고족의 위세에 눌려 신음하던 여러 종족들도 원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시기를 틈타 최영이 세운 요동정벌 계획은 요동을 원래의 주인인 기마종족의 무대로 확정하고 고려가 그 주도권을 잡음으로서 동아시아의 전체의 역사를 바꾸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기 1388년(우왕 14년) 명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요동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한 4만여 명의의 군대는 이성계의 명령을 받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폐위하고 최영 장군을 제거하고 이씨조선을 세웠다. 결과적으로 성리학을 비롯한 중국문화가 물밀듯이 들어 왔으며, 전통사상과 전통문화는 우리 역사의 변두리로 밀려나 탄압까지 받게 되었고 기마종족 고유의 진취성은 거세되었다.


13.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요동정벌이라는 하늘이 준 기회를 무시한 조선 조정은 그 후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 같은 배신과 당쟁으로 허송세월을 보내고 관리들은 백성들을 착취하였다. 하늘의 사명을 잃어버린 기마종족, 동이족의 후손들을 일 깨우치기 위해 하늘은 우리의 형제 종족들의 힘을 빌어 차례 차례 이땅을 치기 시작했으니 첫번째가 임진왜란(1592)이요 다음은 병자호란(1636년)이었다. 임진왜란의 참상의 하나의 예는 그들이 베어소금에 절여간 조선 사람의 코가21만 4752개였다. 병자호란은 삼전도의 치욕으로 간신히 끝냈으나 수많은 인명이 살해되고 굶어죽었으며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만 17만명이 넘었다. 조선의 자존심은 뭉개질대로 뭉게졌다.


14. 암흑시대 일제 36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혹독하게 겪으면서 한민족은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러나 조선 말엽 세계는 급격히 변하고 발전하고 있는데 개혁도 못하고 부패하여 쇄국을 고집하다가 결국 일본에 의하여 아주 망하게 되었다.우리 민족의 저력을 잘 알고 있는 일본은 우리를 극악무도하게 탄압하였으며 우리 민족의 정신을 말살시키기 위하여 모든 방법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와 윤봉길 의사와 같은 많은 애족투사들에 의하여 우리의 참정신은 지켜져 이어왔다.


15. 우리 역사 바로 알기

역사교육은 인간의 자기인식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자신을 아는 것이다. 자기자신을 안다함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를 아는 것이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이를 시도해 보지 않고서는 알수 없는 것이지만, 그 가능성을 아는 유일한 길잡이는 과거에 있어서 인간이 무엇을 해왔는가라는 점에 있다. 따라서 어느 민족, 어느 국가에서이건 역사와 전통에 대한 관심은 매우 일찍부터 비롯되었다.

이와같이 역사교육의 목적은 첫째 민족 전통의 인식과 민족적 긍지를 육성하고, 둘째 국사교육과 아울러 세계사교육을 통하여 국제이해력을 증진, 배양하며, 세째 역사적인 사고력과 판단력을 육성하고 끝으로는 바람직한 인간상을 형성하는 것을 의도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근본, 조상님들의 참된 얼과 전통을 되찾음으로 서 우리 민족의 가치관과 긍지를 회복하여 홍익인간과 이화세계의 이념으로 인류복지와 세계 평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참역사 교육의 중요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참으로 우리 역사를 다시 써야 할 시기에 이르렀다.

신화화 되어 뿌리를 잃어버린 단군조선의 역사를 복원하면 우리의 역사는 2000년이라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고 한웅의 배달국 시대를 지나 9000년 전에 시작된 한인의 한국시대에 이르게 된다. 지도, '조선족의 이동 경로 및 분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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