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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선생 일가의 항일독립운동 이야기
 tlstkdrn  | 2017·09·02 11:41 | 조회 :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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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회영_선생_일가의_항일독립운동_이야기(조선일보,_2017.8.31일자).hwp (240.0 KB), Down : 0
  • 이회영 선생 일가의 항일독립운동 이야기

      1908년 10월 20일 서울 명동 상동교회에서 열아홉 살 규수 이은숙이 마흔한 살 먹은 사내 이회영(1867~1932)과 서양식으로 혼례를 치렀다. 첫 아내와 사별한 이회영은 두 번째 결혼이다. 평안도 암행어사와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넷째 아들이다. 2년 전 별세한 고관대작 가문에 출가했으니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비단옷 입고 살겠지, 라고 남들은 생각했다.
       2년 뒤 이회영 집안은 물론 시아주버니 건영과 석영과 철영, 시동생 시영과 호영까지 여섯 형제 집안이 문중 땅 수백만 평을 일시에 다 팔고서 한꺼번에 만주로 떠났다. 식솔이 예순 명에 달했고 마차가 열 대가 넘었다. 1910년 경술년 12월 30일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고 넉 달이 지난 엄동설한 동지섣달이었다. 단순한 이사 혹은 이민이 아니었다. 독립운동을 위한 집단 망명이었다.                                  
       1910년 8월 29일 이름만 남아 있던 나라, 대한제국이 이름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많은 고관대작과 지식인은 일본에 빌붙어 권세를 얻었고, 또 많은 사람들은 투쟁을 택했다. 민영환처럼 1905년 을사늑약 때 자결한 사람도 있었고 매천 황현처럼 경술년 국치 때 자결한 사람도 있었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 한편에는 우당 이회영의 묘가 있다. 아내 이은숙과 합장이라고 새겨져 있지만, 이회영의 유해는 없다. 허묘다. 이회영은 전재산을 털어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벌인 여섯형제의 넷째다.
       '스스로 죽어서 일본을 이롭게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지식인들은 망명을 택했다. 을사늑약 때 거리에서 바위에 머리를 찧어 자살 미수에 그쳤던 이상설이 그랬고(백범일지), 경상도 안동의 지사 석주 이상룡이 그랬다. 이상룡은 궁궐 같은 99칸짜리 임청각을 버리고 온 가족이 만주로 떠났다. 이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 총독부 요시찰 인물, 불령선인(不逞鮮人) 목록에 올랐다. '푸테이(不逞)'는 '고집 세고 반항하는 놈'이라는 뜻이다.
       대신 '착한' 조선인에게는 상을 주었다. 합방에 공헌한 고관대작들에게는 귀족 작위와 돈을 내려주었다. 지역 양반들에게도 효자, 효부상을 듬뿍 내렸다. 온 나라 양반들이 많이 뛸 듯이 좋아하며 따랐다.(김창숙, 〈벽옹 73년 회상기〉·이덕일, 〈이회영과 젊은 그들〉 재인용). 고관대작 가문에 갑부였던 이회영 형제는, 망명을 택했다.
       '사람들은 우리를 공신의 후예라 한다. 괴변으로 한반도 산하가 왜적의 것이 되고 말았다. 명문 호족으로서 대의가 있는 곳에서 죽지 않고 구차히 생명을 도모한다면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 왜적과 혈투하시던 조상의 후손된 도리라고 생각하니, 여러 형님과 아우님들은 따라주시기를 바라노라.' 형제들을 모아놓고 이회영이 이리 말했다.(이관직, 〈우당 이회영 실기〉) 이회영 형제는 조선 초 정승 백사 이항복의 후손이다. 모두가 그를 따랐다.
       먼 친척 백부인 이유원에게 양자로 간 둘째 이석영은 갑부였다. '양주 가오실에 별장이 있는데, 서울에서 거리가 80리였다. 80리 왕래하는 길이 모두 그의 밭두렁이라 다른 사람 땅은 단 한 평도 밟지 않고 다녔다.'(황현, 〈매천야록〉)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왕현종에 따르면 남양주 화도읍 가곡리에 있던 땅은 640정보, 192만 평에 달했다. 서울 명동에도 형제들 땅이 산재했다. 1960년대 한 조사에서 600억원에 이른다는 추정이 나온 적이 있다.
       그 땅을 팔고, 못 판 땅은 버리고서 이 갑부 집안 6형제가 만주벌 북풍 속으로 떠난 것이다. 월남 이상재가 이렇게 말했다. "6형제 전 가족이 한마음으로 결의했으니, 동포의 모범이 되리라."(우당 이회영 실기)
       처분하지 못한 명동 땅은 총독부 토지조사를 거쳐 남의 땅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주소로 경기도 경성부 황금정 2목 164번지 591평도 이 형제들 땅이었다. 현재 을지로 2가 164번지 부근이다. 서울 YWCA회관 북쪽이다. 회관 소공원에는 이회영의 흉상이 서 있다.
       독립운동에 조직과 자금은 필수다. 이회영 형제가 바로 그 일을 했다. 형제는 이듬해 4월 안동 선비 석주 이상룡과 함께 유하현 삼원보에 경학사를 설립했다. 밭을 갈아 생산을 하고(耕) 교육을 하며(學) 군사력을 키우는(武) 결사체였다. 사장은 이상룡, 내무부장은 이회영, 재무부장은 오랜 동지인 이동녕이 맡았다. 이상룡이 쓴 취지문은 이렇다. '한 삼태기 흙이 쌓여 태산을 이룬다. 힘을 축적해서 끝장에 대비할 것이다.'(우당 이회영 실기)
       그리고 이듬해 여름, 이석영의 자금을 털어 구입한 인근 합니하 산속에 본격적인 독립운동 교육기관이 설립되니, 8년에 걸쳐 3500명에 이르는 항일투쟁 지도자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요람 신흥무관학교다.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같은 만주 항일투쟁의 불꽃을 지핀 운동 기지였다. 교장은 셋째형 이철영이 맡았다. 3·1 운동 이후에는 해마다 입교를 원하는 조선 청년이 600명에 이르렀다. 3년 만에 자금이 바닥났다.
       신흥학교 설립 후 자금난에 빠진 이회영은 1913년 서울에서 돈을 구하고 있었다. 그러다 1918년 이회영은 왕실 시종 이교영을 통해 고종 망명을 기도한다. 일본의 귀족 작위를 거부했던 전 내부대신 민영달이 5만원을 댔다. 동생 이시영이 이 돈으로 북경에 고종 거처를 마련했다. 그런데 이듬해 1월 20일 고종이 급서했다. 식혜를 들이켜고 죽었다고 했다. 독살당했다는 말이 돌았다. 그날 왕실 당직자는 이완용이었다. 훗날 사학자 이증복은 조선 남작 작위를 받은 한창수와 시종관 한상학을 독살범으로 지목했다. 또 다른 친일파 윤덕영이라는 설도 있다.
       3·1운동 직전 이회영은 중국으로 돌아가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이회영은 "자리다툼에 분규가 끝이 없을 것이니" 행정조직이 아닌 투쟁본부를 만들자고 했다. 동생 이시영은 재무총장으로 임정에 참여했고 이회영은 무장투쟁노선을 걸었다.
       이후 북경 자금성 북쪽 이회영의 집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로 북적거리는 사랑방이 됐다. '그 당시 국내에서 마음을 품은 인물 즉 청년들은 북경에 오면 반드시 나의 부친을 뵙게 되고 대개 우리 집에 거주하게 됐다.'(이회영의 아들, 독립지사 이규창, 〈운명의 여신(餘燼, '남은 재'〉) 이규창이 기억하는 사람들을 적으면 그대로 한국 독립운동 인물사가 된다. 그리고 한국 독립운동 노선사가 된다. 민족주의,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모든 노선이 이회영의 북경 거처를 거쳐 나뉘었다.(이덕일, 〈이회영과 젊은 그들〉)
       백여 명의 대가족을 이끄는 모습은 만주 원주민들에게는 장관이었다. 중국 육필 마차가 거의 백 차가 되니 대부호의 이동이다. 부호의 호화로운 행렬쯤으로 짐작했으리라.(이규창, 〈운명의 여신〉)
       대의를 좇는 남정네를 따라가니, 여자들 간난과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회영이 서울로 간 사이 이은숙은 마적 떼에게 총을 맞고 6개월 된 아들 규창은 얼굴을 화롯불에 크게 데였다. 그 몸으로 이은숙은 큰딸 규숙과 젖먹이를 안고 업고서 신흥학교 학생들 밥을 지었다. '죽을 쑤는 때면 상을 가지고 나갈 수가 없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이은숙, 〈서간도시종기〉)
       가난을 피해, 대의를 좇아 대륙 곳곳으로 흩어진 형제들은 고단하게 살고 고단하게 죽었다. 자금을 책임졌던 이석영은 굶어 죽었다. 맏형 건영도 병사했다. 신흥학교장 셋째 철영도 병사했다. 여섯째 호영은 아들과 함께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그 아들 대도 대부분 해방 전 중국에서 죽었다.
       이회영의 두 딸 규숙과 현숙은 고아원에서 산 적도 있었다. 아들 규창은 함께 살던 단재 신채호가 준 옷을 뜯어 만든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녔다. 1925년 아내 이은숙이 돈을 벌기 위해 혼자 조선으로 돌아갔다. 고무신 공장 급료와 옷 수선으로 번 돈을 보내면, 그 돈으로 가족들이 연명했다. 삶은 매우, 아주 매우 신산하였다. '귀한 집 부인들이 이 같은 고생은 듣지도 못했을 것이어늘, 그러나 여필종부의 본의를 지키는 것이다.'(서간도시종기) 그러나 그해 작별한 남편을 이은숙은 영영 보지 못한다.
       이회영은 백정기, 정화암 등과 의기투합해 남화연맹을 창설했다. 요인 암살이 주된 임무였다. 1932년 11월, 윤봉길 의사 의거 후 투쟁의 중심지로 다시 만주를 택한 이회영은 상해에서 대련 행 여객선에 올랐다. 그런데 대련 항구에서 이회영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11월 17일 일본 경찰은 심문 도중 이회영이 목을 매고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시신 인수를 위해 찾아간 딸 규숙은 혈흔이 낭자한 얼굴과 역시 혈흔이 묻은 옷을 보았다. 동지들은 이회영이 고문사했다고 확신했고, 이회영을 밀고한 사람이 있다고 확신했고, 찾아냈고, 처단했다.
       이회영의 손자인 우당장학회 회장 이종찬(전 국정원장)이 말했다. "밀고자는, 우리 할아버지의 조카 이규서다." 이회영의 아들 규창은 이석영의 둘째 아들인 사촌형 규서를 동지들에게 고발했고, 동지들은 이규서와 공범 연충렬로부터 자백을 받고 처단했다. 이종찬이 말했다. "집안 어른들은 창피하니 함구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역사는 떳떳해야 한다. 그때 우리 우국지사들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 속에 투쟁을 했는지 알 수 있는 증거니까."
      광복 후 상해 비행장에서 귀국을 기다리는 임정요원들. 가운데 키 큰 사람이 김구, 오른쪽 중절모를 쓴 노인이 이시영이다. 울고 있다. 이회영의 손자인 이종찬은“이시영과 김구, 조완구(김구 왼쪽 중절모 쓴 사람)가 입고 있는 양복은 우리 아버지가 마련한 옷”이라고 기억했다. /우당기념관 제공
       형제 가운데 다섯째인 이시영만 살아남아 해방을 맞았다. 이시영은 1945년 11월 9일 다른 임정 요원들과 상해 비행장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눈물을 닦았다. 노혁명가, 노투쟁가가 울었다. 1948년 이시영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됐다가 6·25전쟁 와중인 1951년 사퇴했다. 이시영은 서울 수유동 애국순국선열묘역에 묻혀 있다. 서울 신교동에 우당기념관이 있다.
       1946년 귀국한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은 1966년〈서간도시종기·西間島始終記〉를 탈고했다. 첫 문장은 이러했다. '이영구의 과거나 현재는 모두가 몽환(夢幻)이라.' 이영구는 남편 이회영이 지어준 이름이다.
                                                                                          <학습목표>
       1. 박종인, “만주로 갔느니라… 목숨을 바쳤기에 떳떳했느니라”, 조선일보, 2017.8.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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