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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이방원과 허균 이야기
 tlstkdrn  | 2017·12·07 16:41 | 조회 : 11
조선시대  이방원과 허균 이야기

   어무적(魚無迹)은 조선 연산군 때 사람이다. 무적(無迹)은 흔적이 없다는 뜻이니 본명은 아니다. 그가 이런 시를 쓴다. 제목은 '유민탄(流民歎)'이다. '떠도는 백성을 탄식함'.
   백성이여 어렵고 어렵구나/ 갈수록 가난해 먹지조차 못하네/ 나는 너희를 구제할 마음은 있으나/ 구제할 힘이 없구나(중략) 저들은 구제할 힘은 있으나/ 구제할 마음이 없네/ 저 소인배들 마음을 돌이켜/ 군자로 생각하게 하고/ 군자의 귀를 빌려/ 귀 기울이게 하고 싶노라.
   세상이 어지럽던 연산군 시대다. 정치 똑바로 하라고 충고하는 내시 김처선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혀를 잘라내고 창자를 끄집어내 죽이는(이긍익, '연려실기술')
   왕이었다. 그럼에도 두려움이 없었으니 어무적은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광해군 때 사람 허균은 '유민탄'을 조선 최고의 시라 평하고 자기 시집인 '국조시산'에 끼워놓았다. 허균이 죽고 79년 뒤인 1697년 '국조시산'을 편찬한 전라관찰사 박태순은 2년 뒤 파직됐다.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문제는 시인 그 자체였다. 어무적이 덧붙인다.
   '나는 하류(下流)에 처해 있기에 누구보다 잘못된 현실을 잘 관찰할 수 있다'고.
    어무적은 얼자(孼子)다. 아비는 양반이되 어미는 노비였다. 어미 신분을 따라, 어무적 또한 노비였으니 '유민탄'은 조선왕조 신분 질서 뿌리를 뽑겠다는 반란가(叛亂歌)가 아닌가.
어무적은 나라를 바로잡자고 상소도 올렸으나, 실록은 '(왕으로부터) 회보(回報)가 없었다'고 기록한다(1501년 연산군일기 7년 7월 28일). 이제, 조선 왕국 만악(萬惡)의 근원, 서얼 차별을 살펴본다. 서얼, 첩(妾)의 자식이다.
    1415년 태종 15년 6월 25일 육조에서 정부시책 33조를 올렸다. 이 가운데 우부대언 서선(徐選)이 올린 진언은 이러하다. '종친과 각품의 서얼 자손은 현관직사(顯官職事)에 임명하지 말아서 적첩(嫡妾)을 분별하소서.' 진언은 그대로 시행됐다. 서자는 양민인 첩의 자식이고 얼자는 천민인 첩의 자식이다. 서선이 이를 진언하고 태종이 허가한 이유가 있다.
    아버지 이성계가 배다른 동생 방석을 세자로 지명했다. 열한 살짜리 이복동생에게 이방원은 분기탱천했다. 방석은 이성계 둘째 부인 신덕왕후의 아들이다.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이 벌어졌다. 방원은 방석과 방석을 지지한 정도전을 죽이고 권력을 차지했다. 이어 허수아비였던 형 정종이 물러나고 왕이 됐으니, 이제 왕위 정통성을 확보해야 했다. 그때 서선이 등장한다.
    대충 이렇다. '적통(嫡統)이 왕실을 이어야 하고, 서얼 출신인 정도전 같은 패악한 무리가 나오지 않도록 아예 서얼의 벼슬을 막아야 한다.' 난을 합리화할 핑계를 찾고 있던 태종에게 호재였다. 그런데 실상은 어처구니가 없다. 모든 일은 우부대언 서선에게서 비롯됐다. '서선이 정도전이 총애하던 종에게 욕을 본 일이 있어 그 원수를 갚을 길만 생각하고 있었다. 정도전이 패망하자 견강부회하여 죽은 뒤에 감정풀이를 한 것이다. 그 법이 반드시 행해지리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정도전이 죄를 지어 막 처형당한 때이다 보니 그 법이 성립하기 쉬웠던 것이다.'(박지원, 연암집 '서얼 소통(疏通)을 청하는 소')
    이 법은 곧바로 조선 법전인 경국대전에 성문화됐다. '죄를 범하여 영구히 임용할 수 없게 된 자, 탐관오리의 아들, 재가하거나 행실을 잘못한 부녀의 아들 및 손자, 서얼자손(庶孼子孫)은 문과, 생원, 진사시에 응시하지 못한다.'
    이상주의자 허균이 태어난 강원도 강릉 사천면에는 교산이 있다. 이무기의 산이다. 사천진리 해변에는 이무기가 뚫고 갔다는 교문암이 있다. 교산은 허균의 호다. 스스로 지은 호처럼, 허균은 거침없는 삶을 살았다. /박종인 기자
   1555년 법률 주석서인 경국대전주해를 제작하면서 이 조항에 이런 해석이 붙었다.
'이상의 조문에서 자손은 바로 '자자손손'을 뜻한다(乃謂子子孫孫也).' 서얼은 영구히 관직이 금지됐다.
   권력자의 피해 의식과 한 사내의 원한이 자그마치 500년 동안 한 국가에 족쇄를 채우게 된 경위다. 시대에 따라 완급은 있었으나 이후 조선이 망할 때까지 첩의 자식들은 고위직에 오를 수가 없었다. '명색은 사람이지만 사실은 사람이 아닙니다(名爲人而實非人也).'(1874년 승정원일기 고종 11년 2월 15일, 서얼 차별을 풀어달라는 홍찬섭의 상소)
    1608년 광해군 시대가 도래했다. 광해군은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 사이에 태어난 서자다. 조선 팔도 서자들이 만세를 불렀다.
바로 그해 서얼인 박응서, 심우영, 서양갑, 박치의, 이경준과 박치인, 허옹인이 상소를 올렸다. 차별을 없애달라고 했다. 무시당했다. 좌절한 이들은 스스로를 죽림칠현이라 부르며 경기도 여주 여강 변에 토굴을 짓고 음풍농월하며 살았다.
    1613년 이들은 나무꾼, 소금장수 따위를 가장해 전국에서 강도 행각을 벌였다.
그해 3월 문경새재에서 은을 싣고 가던 상인을 죽이고 수백냥어치 은을 탈취했다. 신출귀몰하는 화적떼를 잡아 문초를 해보니 고관대작의 서자들이 아닌가. 이들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실 적자인 영창대군을 옹립할 군자금 마련을 위해 강도짓을 했다고 자백했다. 영창대군 외할아버지 김제남이 배후 인물로 드러났다. 피비린내가 장안을 진동했다. 계축옥사 혹은 칠서지옥이라 한다. 그런데 5년 뒤인 1618년 또다시 역모가 발각됐다. 역시 영창대군을 내세운 반란이었다. 수괴는, 허균이었다.
    허균은 조선 최고의 문장가요 과격한 인문주의자였다. 5년 전 역모를 꾀했던 칠서의 정신적 지주였다. 아버지 허엽, 큰형 성, 둘째 형 봉, 우리가 난설헌이라 부르는 누나 초희와 함께 허씨 5문장이라 불린다.
    허균은 손곡 이달로부터 글을 배웠다. 스승 이달로부터 세상을 보았다. 뛰어난 문장과 열린 눈을 가진 사내였지만, 이달은 서자였다. 제자가 입신양명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글 노예였다. 그 스승 모습에서 허균은 세상을 보았다. 조선 사회에 팽배한 숱한 모순 가운데 서얼 차별은응당 폐지해야 할 악이었다. 그리하여 1610년(추정) 그가 쓴 한글 소설이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전이다.
    허균에 대한 평가는 이렇다. '이 자는 사람이 아니다. 그 모습 또한 우리와 다르니 필시 여우, 너구리, 뱀, 쥐 같은 따위의 정령일 것이다.'(유몽인, '어우야담')
    허균이 태어난 곳은 강원도 강릉이다. 강릉에서도 외가인 교산(蛟山)이다. 너른 들판에 가늘게 달리는 산줄기 능선에서 태어났다. 허균은 그 교산을 자기 호로 삼았다. 교산은 이무기의 산이다. 능선은 바다로 사라지고 백사장에 커다란 바위들이 앉아 있다.
바위 이름은 교문암(蛟門岩)이다. 구렁이가 튀어나와 바다로 사라졌다는 바위다. 용이 되지 못한 구렁이 산, 교산(蛟山). 무식한 게 아니라면 만천하에 자기 운명을 공포한 것과 마찬가지다.
    실로 그러하였다. 여우의 정령 같은 글재주로 광해군의 외교를 처리하고 승승장구한 관료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역모를 꾀한 사실이 발각된 것이다.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이 온다.'
    그 전해 남대문에 나붙은 벽서가 빌미였다. 하필이면 벽서를 붙인 이는 허균의 측근 현응민이었다.
    허균의 정적 기자헌과 이이첨의 폭로로 역신 무리들이 줄줄이 체포됐다. 정작 허균은 결백을 주장하고 모함이라 주장했다.
실록을 본다. '허균이 잡히던 날에 옥문을 깨뜨리고 역적 균을 탈취해 가겠다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큰 소리를 쳐서 듣는 자들이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1618년 8월 22일) '죄인을 잡았으니 온 나라 경사다. 허균에게는 다시 물을 만한 일이 없다.'(8월 23일)
    허균이 결백하다는 자들은 농성을 했고, 유죄를 주장하는 자들은 이상하리만치 허둥댔다. 그래서 다음 날 광해군이 직접 허균을 심문했다. 실록에 따르면, '이이첨 무리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왕으로 하여금 다시 캐묻지 못하게 했다. 허균은 비로소 깨닫고 크게 소리치기를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했으나 상하가 못 들은 척했다.' 허균은 심문 조서에 끝까지 도장을 찍지 않았다. 허균은 그날 저잣거리에서 처형됐다. 시체는 팔도에 뿌려졌다. 허균을 밀고한 기자헌은 '죄인 도장도 없이 사형으로 나간 적은 없으니 훗날 이론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허균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문득 보니 칠서의 난에서도, 허균의 난에서도 그 누구 하나 자기가 역모를 했다고 자백한 이는 없었다. 서얼 그리고 그들을 무한 신뢰한 허균, 그들의 진실은 무엇일까.
    허균 묘 오른쪽 숲에 있는 허난설헌 시비. ‘나이 일곱에 시를 쓴 여자 신동. 서당 김성립에게 시집감’이라 적혀 있다.
    이제, 새 세상을 희구한 그대 서얼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의 어머니와 딸은 안중에 있었는가. 그 어떤 사료를 들여다봐도 대답은 '없다'다. 경국대전에는 과거시험 응시 자격이 '양민(良民)'이라 돼 있다. 양민, 곧 '남자'다. 일곱 서자들이 꿈꾼 이상세계도 적자
남자들과 동등한 입신양명이었다. 허균에게는 첩이 둘 있었다. '남녀의 본성은 하늘이 준 것이며 도덕은 그 아래다.'
    허균이 만든 인물 홍길동은 조선 국왕으로부터 병조판서를 제수받고 율도국 왕에 오른다.
    '길동에게 부인이 셋인데 둘은 정통 양인이었다.'(홍길동전 완판본) 허균의 분신(分身), 홍길동과 그 이상향이다. 그 사이 하늘이 내린 시선(詩仙), 허균의 누나 허초희는 나이 스물일곱에 죽었다. 선계를 그리는 시를 남기고 죽었다.
    시 내용은 이랬다. '스물이라 일곱 송이 부용꽃은 붉은 빛 다 가시고, 달빛은 서리에 찼답니다(芙蓉三九朶 紅墮月霜寒)'(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 부분)
    1969년 양천 허씨 허엽 문중 묘역 맨 오른편에 허초희 시비가 섰다. 뒤편에는 시 한 수, 앞면에는 난설헌 이력이다.
    동북아 3국을 울린 시인의 일생이 열네 자로 적혀 있다. '七歲能詩女神童 西堂金誠立出嫁(일곱 살에 시를 쓴 여자 신동이었고 서당 김성립에게 출가했다)' 1894년 서얼제, 아니 서얼제의 뿌리인 처첩제가 폐지됐다.
    조선왕조 500년 내내 남자들이 무시했던 문제의 근본, 그 처첩제가 폐지됐다.
                                                                               <참고문헌>
    1. 박종은, “권력은 너희 것이 아니니, 함께 누리리라", 조선일보, 2017.12.6일자. A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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