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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구님의 밝달나무숲


양명학을 배척하고 성리학을 꽃 피웠던 퇴계 이황 선생
 tlstkdrn  | 2020·01·07 14:40 | 조회 : 14

양명학을 배척하고  성리학을 꽃 피웠던 퇴계 이황 선생

    경상북도 안동 도산서원 옆 도로변 산기슭에 무덤이 하나 있다. 무덤가에는 문인석 2기와 망주석과 비석 하나 서 있다. 무덤은 작다. 비석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퇴도 만은 진성이공 지묘). '도산에 물러나 말년을 은둔한 진성 이공 무덤'이라는 뜻이다. 웬만한 조선 양반 무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초라하기까지 한 이 무덤 주인은 퇴계 이황이다. 이황은 검약과 절제를 몸으로 실천했던 선비였다.
   그가 태어난 안동 노송정 종택 대문 현판은 '성림문(聖臨門)'이다. 이황이 태어나기 전 어머니 춘천 박씨가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과연 이황은 조선 성리학을 정립하는 거대한 인물이 되었다. 2020년 현재 대한민국 시대까지 그가 드리운 발자국은 거대하고 깊다.
   세상 만물에는 언제나 빛과 함께 어둠이 있는 법이다. 그가 꽃피운 성리학 시대는 역으로 성리학을 제외한 모든 학문이 침묵했던 시대이기도 했다. 그가 활동했던 16세기, 지식과 권력이 융합한 지식권력의 국가 조선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었나.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였다. 선비[士·사]가 과거에 붙으면 대부[大夫·대부]가 된다. 선비들은 서원에 모여 공부를 했다. 자기 수양을 위한 공부도 있었고 대부가 되기 위한 과거 공부도 있었다. 과거에 떨어지거나 이러저러하게 정부에서 쫓겨난 선비와 대부는 서원으로 돌아와 다시 공부를 했다.
    정조 때인 1792년 음력 3월 25일 경북 안동 도산서원 앞 백사장에서 특별 과거시험이 열렸다. 거유(巨儒) 퇴계 이황을 기리는 도산별과(陶山別科)였다. 그 시험을 기념하는 자리가 사진에 보이는 '시사단(試士壇)'이다. 당시 영의정 채제공은 이를 기념하는 비석을 쓰며 "영남만이 사학(邪學·천주교)에 물들지 않았다"고 이황의 공을 기렸다. 강변에 있던 시사단은 1975년 안동댐 건설로 지금 위치로 이전했다. 성리학을 집대성하고 완성한 퇴계 이황은 신흥 학문인 양명학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조선에 처음 생긴 서원은 '백운동서원'이다. 1543년 당시 경상도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세웠다. 풍기는 고려 때 원나라에서 성리학 서적을 수입한 안향이 태어난 곳이다. 2년 뒤 후임 군수 이황은 "서원의 이름이 역사에서 사라질까 두렵다"며 국가 공인을 청원했다. 1546년 당시 국왕 명종은 '소수서원'이라는 이름과 책을 하사하며 거유(巨儒)인 군수의 청을 들어주었다. 이황에 의해, 마침내 조선 건국 이념인 성리학이 관학(官學)으로 공인된 것이다.
   서원은 성리학 교육기관인 동시에 성리학 성현을 모시는 종교기관이다. 사대부 나라에서 오로지 사대부를 위한 조직이 전국에 생겼으니 경사도 그런 경사가 없었다. 그런데 성리학자 이황의 의도와 무관하게 나라는 이상하게 흘러갔다.
   양명학은 명나라 학자 왕수인(1472~ 1528)이 만든 학문이다. '지식이 있어야 실천이 뒤따른다'는 송나라 주희의 유학 해석을 반대하고 '실천이 곧 지식'이라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하면서 만든 학문이다. 현실에 부딪쳐가며 현실을 극복하라는 그 메시지에 명나라 학계는 신속하게 성리학에서 양명학으로 옮겨갔다. 그 양명학이 조선에 들어왔을 때, 가장 심각하게 이를 반대한 사람이 이황이었다.
   1566년쯤 되는 어느 날 이황이 논문을 썼다. 논문 제목은 '전습록 논변'이다. '전습록'은 왕수인의 어록을 모은 책이다. 복잡한 여러 가지 논의를 하기에 앞서 이황이 미리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감히 방자하게 선유(先儒: 주자)의 정론을 배척하고 함부로 방불한 여러 학설을 인용하여 억지로 끌어 붙이면서 조금도 기탄이 없다.'(퇴계선생문집41 '전습록논변') 이황은 양명학을 '앞뒤 말뜻이 부합하지 않는(與前後語意不相諧應·여전후어의불상해응)' 학문으로 규정했다.
   도산서원 현판과 정료대(庭燎臺). 정료대는 제사 때 불을 지핀 솔가지를 얹어놓는 기구다.
   서원을 국가로부터 공인받은 성리학자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해석이었다. 문제는 성리학과 권력이 결합해 성리학이 순수 학문의 영역을 탈출한 이후라는 사실이었다. 이황 아래에 숱한 선비가 모여들었고, 후학 선비들은 관계에 진출해 권력가가 되었다. 권력을 향한 가장 강력한 수단이 학문이었으니, 이황이 배척한 양명학은 그 후학들에게도 금기가 되었다. 이제 양명학을 둘러싸고 조-명 양국 간에 벌어진 일들을 본다.
   선조는 국가 경영에 대해 무책임하고 이기적이었지만, 영민하고 현실 파악 능력은 뛰어난 왕이었다. 1573년 3월 17일 오전 강의에서 선조가 양명학에 대해 언급했다. "왕수인은 재기(才氣)가 있고 공도 세운 바가 있다." 그러자 특진관 첨지 유희춘이 반박했다. "주자의 말을 헐뜯어 홍수나 사나운 짐승의 재앙보다 참혹하니 사특하기가 막심한 자입니다."(1573년 3월 17일 '선조실록') 유희춘은 이황과 함께 대표적인 성리학자였다. 그 또한 양명학이 주자 학설에 반하자 이를 사악하다고 비난한 것이다.
   이듬해 명나라로 간 사신 허봉과 조헌이 요동에서 정학서원을 찾았다. 이곳에서 두 사람은 양명학을 주장하는 국자감(國子監) 학생과 논쟁을 벌였다.(허봉, '조천기') '조천기' 서문에는 양명학이 옳다고 주장하는 학생에게 두 사람은 '홀로 정대(正大)한 주장을 부르짖었다'고 기록돼 있다. 서문을 쓴 사람은 이황의 직계 제자 류성룡이다. 류성룡은 '스스로 돌이켜서 옳다면 천만 명 앞이라도 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라고 이들을 격려했다. '천만' 양명학의 본산에서 조선 성리학자들이 '홀로' 정대한 주장을 했다는 말이다.
   경북 안동 도산서원 옆 퇴계 이황의 묘에 있는 묘비. '도산으로 물러나 말년을 은둔한 진성 이공의 무덤'이라고 적혀 있다.
   임진왜란이 터졌다. 조선 지도층이 위기를 대비하지 않은 탓에 나라는 전쟁 초기에 불구덩이에 빠졌다. 사대 제후국인 조선을 돕기 위해 명나라 군사가 파병됐다. 총사령관은 송응창(宋應昌)이다. 1593년 압록강을 건넌 송응창이 의주에서 조선 관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중용이나 대학 한 권만으로도 충분하니 주자의 주석에 너무 빠질 필요가 없다."(1593년 4월 1일 '선조실록')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진·한 이후 문장은 마음을 어지럽힐 뿐이니 마음을 둘 것이 못 된다."
    사흘 뒤 송응창은 세자(광해군)의 선생들을 막사로 불러 토론을 청했다. 유몽인, 황신, 이정귀가 막사로 가서 함께 토론했다.('선조실록') 이때 그가 강론한 내용은 양명학이었다. 송응창이 양명학 관점에서 강론하자 이정귀는 주희 학설에 근거하여 논박했다.(이정귀, 월사집별집1권 '임진피병록') 훗날 병자호란 때 전쟁 불사를 주장했던 김상헌은 '송응창은 양명학을 추종해 주희를 따르지 못하게 했지만, 이정귀는 차이점을 힘껏 분석해 큰 칭찬을 받았다'고 기록했다.(청음선생집 25 '월사이문충공신도비명')
   이듬해 7월 선조가 영의정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수인에게 오늘날을 맡긴다면 적을 소탕할 수 있을 것이다. 왕수인은 재주가 높아서 재질이 낮은 조선 사람은 배울 수가 없다."
   그러자 영의정이 정색을 하고 반박했다. "처음에는 광명하더라도 결국에는 어지러워져 스스로 방자해지는 폐단이 있습니다." 선조가 재차 물었다. "왕수인은 도덕과 지식은 타고난다(致良知·치양지)고 했다. 무슨 뜻인가." 영의정이 단호하게 말했다. "거짓입니다(僞矣)." 선조는 "그래도 양명학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 말하고 논쟁을 끝냈다.(1594년 7월 17일 '선조실록') 전쟁이 한창인 그 여름날 선조에게 양명학을 사악하다고 거듭 주장한 이 영의정은 류성룡이다.
   전쟁 후 조선에 잔류한 명나라 사령관들은 (명나라 문묘에는 왕수인이 있는데) 왜 조선 문묘에는 없냐고 궁금해했다.(1601년 1월 2일 등 '선조실록') 계속해서 이를 거부하던 조선 정부는 마침내 1604년 왕양명의 문묘 배향을 거부했다. '명나라에서도 한두 사람의 강력한 고집에 의해 문묘에 들었을 뿐 천하의 공론이 아니었고 그는 이단의 학문으로 죄를 얻은 자라 그 해가 홍수나 맹수보다 심하다'는 것이다.(1604년 10월 17일 '선조실록')
   1623년 성리학 원리주의자인 서인의 인조반정이 성공했다. 이후 이황 후학이 이끌던 남인은 물론 여당인 서인 또한 성리학 이외의 모든 학문을 배척하고 오로지 성리학만으로 국가를 경영하게 되었다.
   '논어' '자로' 편에는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말이 나온다. 타인과 화합하되 편을 가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스스로 군자라 칭했던 조선 성리학자들은 모두 서로 편을 갈라 짝을 지었고, 자기와 사상이 다른 자는 모두 배척하는 '동이불화(同而不和)'의 행태를 보이며 정치를 했다. 공자는 이를 '소인(小人)'이라 불렀다. 퇴계가 꿈꿨던 선비, 사대부가 만드는 세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1. 박종인, "퇴계 이후 성리학은 꽃을 피웠고 다른 학문은 사라졌다", 조선일보, 2019.1.7일자. A3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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