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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철학과 김형석 명예교수 이야기
 tlstkdrn  | 2017·08·21 16:25 | 조회 : 80
연세대 철학과 김형석 명예교수 이야기

   1947년 8월 20일 오전 1시. 황해도 해주의 바닷가에 무성하게 자란 갈대가 27세의 김형석과 아내, 돌도 안 된 아들의 몸을 숨겨주었다. 월남을 막는 감시원들이 100m 간격을 두고 갈대밭을 왔다 갔다 했다. 감시원의 시야에서 벗어난 틈을 타 김형석이 아내와 함께 조각배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이런 얘기를 나도 별로 안 하는데…. 솔직히 일제강점기 같으면 내가 북한의 고향에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회활동을 안 하면 됩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치하에서는 살지를 못해요. ‘대학까지 나온 저놈이 산속에서 조용히 사는데 수상하다’, 그러면 다 잡아다 (사상) 교육을 시키든지 해요. (공산주의를) 겪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최근 서울 서대문구의 한 교회에서 만난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97)는 1시간 반 동안 70년 전의 기억을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말했다. 시간이 흐르며 일제강점기와 광복, 혼란스러운 해방정국을 몸으로 겪은 이들이 점점 줄어드는 요즘이다. 동아일보는 20, 30대 청년으로 당대를 겪은 그로부터 ‘시대의 증언’을 들었다.
   ‘평안남도 대동군 인민위원회 위원’. 광복 뒤 북한에서 그가 잠시 맡았던 직함이다. “내가 대학 나왔으니 나가보라고 해서 면 위원이 됐다가 군 위원으로 뽑힌 게지요.” 그는 ‘공산당 정책을 반대하고 쫓겨나느냐, 먼저 그만두느냐’를 두고 고민하다가 사직하고 고향 송산리에 중학교를 설립해 농촌 교육에 나섰다. 사업가로 부친의 친구인 김모 장로가 재정을 뒷받침하고 이사장을 맡았다.
   “한 1년 반 정도 운영을 했지요. 그런데 내가 기독교(개신교) 신자이고 반공 성향이라 자꾸 감시가 들어와요. 공산당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방법이 중심인물을 빼버리는 겁니다. 반공 장로를 어디로 납치해서 없애버려요. 이사장인 장로님이 하루는 저를 찾아와 ‘조만식 선생도 오래전 연금됐고, 나도 얼마 안 남은 것 같아. 나도 떠날 것이니, 김 선생님도 학교를 포기하고 38선을 넘어. 늦으면 안 돼’라고 하더군요.”
   ‘민청’ 조직에서 일하던 김 교수의 제자도 ‘선생님을 오래 그냥 두지 않을 것 같습니다’라고 귀띔했다. “김 장로님이 마지막으로 고향의 팔순 넘은 어머니에게 큰절을 드리고 나오다가 잠복하던 보안서(경찰서)원들에게 잡혔지요. 그 집에서 쭉 올라오면 산에 우리 집이 있었거든요. 내려다보니 장로님을 태운 트럭이 우물쭈물해요. 막냇동생이 헐떡거리며 뛰어오더니 ‘형님, 도망가세요’ 했어요. 얼마 뒤 저는 38선을 넘었습니다.”
   월남하는 길, 사리원을 거쳐 해주로 가는 기차에서는 맞은편 승객이 기차가 멎기만 하면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와 ‘두 놈 잡았어’ ‘한 놈은 끌어내렸어’ 같은 말을 주고받았다. 월남하는 이들을 잡는 사복 형사였다. 급기야 김 교수는 해주에서 붙잡혔다. 파출소는 38선을 넘다가 붙잡힌 사람들로 가득 찼다. “계장이 전화를 받는데 ‘잡힌 사람 많죠? 평양서 지시가 왔는데, 지금부터 잡히는 사람들은 전부 평양으로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하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어요. 우리는 친척집에 가는 길이라고 둘러댔더니, 다행히 형사가 버스 타는 데까지만 따라오고 보내주더군요. 그 전화가 조금만 일렀으면 아마 조사받고 평양으로 끌려갔을 겁니다.”
   그는 북한에서 김일성 계열의 공산주의자가 세를 확대하는 걸 지켜봤다. “조만식 선생이 조선민주당을 만들었잖아요. 정당사회단체 연합회 차원에서 회의를 열고 결정을 하는데, 정당은 노동당과 조선민주당 둘이고, 사회단체는 공산당이 만들어 놓은 조직이 10개가 넘어요. 이쪽은 정직하게 가니 고작 두셋이고, 저쪽은 많으니 조만식 선생이 발언권도 못 가지고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스티코프 장군이 남쪽에서 올라간 남로당원, 연안에서 온 김두봉 계열까지 다 견제하더군요. 김일성을 위한 거지요. 김두봉 계열인 제 대학 친구가 노동당 평양선전부장까지 올랐지만 나중에 끝내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가 자살했습니다.”
   우스운 일도 있었다. “소련군이 자꾸 소를 먹겠다고 내놓으라고 그래요. 소가 없으면 농사를 못 짓잖아요. 못 준다고 그랬더니, 강제로 빼앗아가겠다고 합니다. 조만식 선생 쪽을 통해 소하고 아기를 위한 가루우유는 못 준다고 했더니 소 한 마리당 닭 몇 마리씩 계산해 이번에는 닭을 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찾아온 소련군 대위가 소가 몇 마리면 닭을 모두 몇 마리 받아가야 하는지 곱하기를 못 해요.”
   사실 김 교수의 고향인 대동군 고평면은 김일성의 고향이기도 하다. 광복 뒤 한두 달쯤 지났을까. 김 교수의 초등학교 선배인 김성주(김일성의 본명)가 운전수가 모는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나타났다. “교회 장로님들이 ‘만경대 성주가 오랜만에 왔다고 환영 잔치를 하니 가자’고 했어요. 원래 김일성 집안이 독실한 크리스천이지요.”
   얼마 뒤 김성주는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의 주인공으로 다시 얼굴을 드러냈다. “당시 ‘앞으로 우리나라를 맡아서 이끌 사람’ 등의 문구가 있는 벽보가 많이 붙었습니다. 서재필 이승만 김구 안재홍 김일성 같은 이름이 나왔지만 대부분 서울로 돌아올 분들이었죠. 평양으로 올 사람은 김일성밖에 없기에 모두 그를 기다렸죠. 나이는 쉰쯤 됐을 것이고,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라는 소문이 돌았어요. 그런데 김성주더군요.”
   김 교수는 월남해 1947년 8월 22일 서울에 도착한 뒤 10월부터 중앙중학교 교사로 일했다. 그리고 그가 도산 안창호 선생과 함께 스승으로 꼽는 인촌 김성수 선생을 만났다. 김 교수는 “독립은 저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라며 “만약 국내에 인촌 선생 같은 분이 없었으면 우리 민족의 독립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어느 날 인촌으로부터 존 하지 미 군정청장을 찾아가 직언했던 얘기를 들었다. 인촌은 하지에게 “내 얘기가 거슬리더라도 고깝게 듣지 말라”며 말을 꺼냈다고 한다. “우리 둘은 친분은 없었지만 한국의 장래를 위해 한두 가지 얘기하고 살자. 당신을 만나고 온 이들이 말이 달라 혼란과 분쟁이 생긴다. 말을 달리하는 실수는 없었으면 좋겠다.”(인촌)
   설산 장덕수가 통역을 했다. 하지 장군은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 인촌이 다시 추궁했다. “며칠 전에도 모 씨에게는 이렇게 약속하고 또 다른 이에게는 달리 말하지 않았나. 이렇다면 당신의 인격과 지도력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겠는가.” 그제야 하지 장군은 알겠다며 고치겠다고 했다고 한다.
   김 교수는 “당시 정치인들이 하지 장군의 비위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걱정을 하면서도 침묵하던 차였다”며 “아마 인촌 말고 이처럼 조용하면서도 지혜롭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가 이 같은 후일담을 들을 정도로 인촌을 가까이 접한 건 6·25전쟁이 계기가 됐다. 중앙중 교사로 일하던 김 교수는 1950년 6월 25일 직감했다. ‘이건 전쟁이다.’ 그는 학교장을 찾아갔다. “전쟁입니다. 교사들 봉급을 석 달 치만 선불해 주시지요.” 교장이 인촌 선생을 찾아가 바로 허락을 받았다.  
   김 교수는 피란지에서 교사 대표로 인촌을 찾아갔다. “어려운 교사들 사정을 말씀드리니 옆 사람에게 ‘은행에 돈이 얼마나 있느냐, 얼마만 남겨놓고 다 찾아오라’고 하시더군요. 돈을 신문지에 둘둘 말아서 주시며 ‘김 선생님이 맡아서 교사들과 나누라’고 해요. 영수증을 써 드리겠다고 하니 ‘됐다’고만 하셨습니다.”
   조만식 선생의 부인이 월남 뒤 인촌을 만났던 얘기도 김 교수는 전했다. “사모님이 제게 그러셔요. ‘인촌을 만났더니, 38선 넘어 오면 제일 힘든 게 머물 곳인데 만약 거처를 장만 못했으면 도와드리겠다고 했다’고요. 헌데 조만식 선생이 폐 끼치지 말라고 했던 게 기억나서 그냥 나오셨답니다.”
   김 교수는 일제강점기 기독교 계열인 평양 숭실중학교를 다녔다. “교장이 원래 미국 선교사인데, 신사참배를 거부하니 총독부가 학교 문을 닫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500명이나 되는 학생을 차마 황국신민 교육하는 학교에 보낼 수 없으니, 정모 선생님이 대신 나섰습니다. 신사참배가 90도 경례하는 겁니다. 제가 키가 작아서 앞줄에 섰거든요. 교장이 되신 정 선생님이 경례를 하고 돌아서는데, 그 주름잡힌 얼굴에 눈물이 죽 흘러요. 그걸 보고 저도 눈물이 났지요.”
   80여 년 전 일을 떠올리는 김 교수의 눈가가 붉어졌다. “저 어른이 우리를 위해서 신사참배를 하시는구나. 그 모습을 보고 가슴에서 민족의식이 커졌습니다. 만약 그런 행동을 두고 친일이라고 비난한다면 친일파 아닌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오늘날 정치가 사람의 명예를 함부로 취급하는 건 그 시대를 산 사람은 상상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김 교수는 태평양전쟁 말기 간신히 학병 징집을 피하고 시골인 고향에서 광복을 맞았다. “평양 거리에 있는데 가게 라디오에서 일왕의 항복 선언이 나옵니다. 아주 짤막해요. 꿈만 같았지요. 동네로 돌아가니 어데 숨겨놨던 태극기도 나오고, 대한독립 만세도 나오고…. 가까운 사람들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이제 나라를 찾았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였습니다.”
   김형석 교수는 1920년 평안남도 대동군 출생/ 1943년 일본 조치(上智)대 철학과 졸업/
1947년 중앙중 교사/연세대 철학과 교수(1954∼1985년)/김태길(2009년 별세) 안병욱(2013년 별세)과 함께 3대 철학자로 꼽힘/주요 저서 ‘고독이라는 병’ ‘현대인의 철학’.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백년을 살아보니’ ‘우리는 무엇으로 행복해지나’ 
                                                                                      <참고문헌>
   1. 조종엽, “도산과 인촌은 내 인생의 스승...정치로 사람 평가해선 안돼”, 동아일보, 2017.8.21일자. A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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