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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달나무숲 자유게시판


단군교인 대종교와 백포 서일에 주목하자
 tlstkdrn  | 2017·10·23 03:51 | 조회 : 43
2017년  10월 3일 개천절을 계기로  단군교인 대종교와 백포 서일 장군에 주목하자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문학평론가, 칼럼니스트)  대산(大山) 신상구(辛相龜)

   지난 2012년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에서 <백포 서일 연구>로 국학박사학위를 받은 정길영 국학연구소 연구원은 2013년 4월 26일 국회 헌정회관에서  고조선학회(회장 복기대)가 개최한  '대일항쟁기의 역사적 교훈과 통일안보 - 백포 서일의 역사관 및 대일항쟁을 중심으로'를 주제로 한 학술회의의에서 이제 한국항일독립운동사에서 백포 서일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백포(白圃) 서일(徐一)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조국의 국권을 회복하는 길이라는 신념이 있었다. 그는 1911년 중광단을 조직하여 1920년 청산리전투까지 10여 년 동안 갖은 어려움을 겪으며 대한군정서라는 강력한 군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청산리전투는 미리 계획한 전투가 아니었다. 소규모 대일항쟁군들이 국내진공작전을 수시로 펼쳐 일본 관공서를 파괴했다. 결국엔 일본 정규군의 추격전인 삼둔자전투와 봉오동전투가 발생한 것이다. 그 전투에서 또다시 일본이 대패하고 만다. 이때부터 일본은 간도지방 항일무장단체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전이 벌이게 된 것이다. 서일은 10년 동안에 걸쳐 무력부대를 만들고 대비해왔기 때문에 원치 않았던 일본과의 전쟁이었지만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1920년 간도지역에 있었던 수많은 전투 중에 유독 청산리전투 성과만을 높게 평가받았다. 그 전투현장의 지휘관이었던 김좌진, 홍범도 등만 영웅이 되고 서일과 다른 전투는 빛이 희미해진 것이다. 그러나 1920년 한일전인 ‘간도회전’은 청산리전투지역인 서부전선과 혼춘과 왕청 일대의 동부전선으로 나누어 전투가 진행되었다. 대한군정서의 주력부대는 김좌진이, 연합부대는 홍범도의 인솔로 서부전선에 참여하였다. 서일은 잔여 부대를 이끌고 군무도독부, 독군부, 광복단, 의군단, 나자구의사부 등 8백여 명과 일본군 1만 명을 상대로 기습작전을 펼치며 적들을 소탕하였다. 일본군이 서부전선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발을 묶어놓고, 또 청산리전투 후의 서부전선 부대들이 무사히 밀산지역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퇴로를 열어주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서부전선은 항일무력부대 1~2천 명이 일본군 5천 명과 싸운 전투엿다. 반면에 동부전선은 전체병력 8백여 명이 일본군 1만 명과 싸웠다. 그 전투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고 부담이 컸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주변국 책동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관부터 바로 세워야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단군민족정신이 살아있을 때는 그 나라는 흥하였고 단군민족정신이 쇠퇴하면 그 나라도 망하고 말았다.
   단군민족주의는 홍익인간 정신이므로 국수주의로 비판받을 이유도 없다. 서일은 바로 이 정신으로 대한군정서 총재로서 청산리전투로 알려진 대일전쟁의 첫 전투를 위대한 승리를 이끌었다. 그뿐만 아니라, 대일항쟁의 정신적 기반을 만들었다.
   이제 우리는 전통사관을 확립하고, 홍익인간 정신으로 세계평화를 이끄는 정신지도국으로 일어서야 할 것이다.
   서일은 어떠한 세력이든 조국의 국권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모두 끌어안았다. 서일은 중광단을 조직할 때 대종교도와 의병을 중심으로 했다. 그러다가 1919년 3‧1항쟁 이후 본격적인 무력투쟁을 위해 중광단을 대한정의단으로 중창했다. 이때 대종교 일색에서 탈피하여 누구든 대일항쟁의 뜻이 있으면 모두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간도회전 후에는 10여 개의 유력한 항일무력부대들이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을 때도 3,500명의 독립군이 서일 장군을 총재로 추대했다. 이것은 서일이 단군민족주의를 내세워 결속을 다지고 항일투쟁의 의지를 극대화 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서일은 무기 구입과 운반 등 위험한 일을 솔선수범하는 등 사심 없이 항상 낮은 자세로 임했다. 그래서 독립군이 그의 인품에 감복하였고 수장의 자리도 조직원들의 추대로 이루어졌다.
   1919년 4월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졌으나 재정도, 군대도 없었다. 서일은 10년 동안 끈질기게 노력해 다른 어떤 항일단체보다 막강한 ‘대한군정서’ 무력부대를 만들어 냈다. 이후에 대한군정서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식 군대가 되었다. 따라서 청산리 전투는 의병전이 아니다. 마땅히 국가 대 국가 간의 전쟁으로 보아야 한다.
   1919년 임시정부 의정원 29명 중 21명이 대종교인이었다. 주시경, 최현배 등의 한글학자․ 정인보, 신채호, 박은식 등 민족사학자․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등 독립군 지도자․이시영, 신규식, 조성환 등 임정 민족지도자들이 모두 대종교인이었다. 서일은 대종교 3대종사(나철, 김교헌, 윤세복)에 들어갈 정도의 위치에 있었으니 그의 영향력은 컸다. 또한 임시정부에서 신규식을 대한군정서에 보내 주요사안을 연락했다. 임시정부는 대한군정서를 정식 군대로 삼았다. 서일은 임시정부의 군무총재로서 간도지역의 항일무장부대를 통솔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면 서일과 임시정부의 관계는 밀접하다고 봐야 한다.
   서굉일 한신대 명예교수는 “서일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은 애국자”라며 “자신의 전 생애를 우리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바쳤다”라고 평가했다.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원은 “한국사회에서 건국의 지표로 안중근을 본다. 그러나 당시 상해임시정부가 공식 인정한 군대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이다”라며 “그 군대를 이끈 사람이 백포 서일이다. 마땅히 건국의 총사령관으로서 지표”라고 말했다.
   지난 2009년 12월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의 국학연구원(원장 조남호)에서 서일을 주제로 학술좌담회를 마련했다. 이어 2011년 12월 서일기념사업회(회장 서훈)가 <백포 평전> 출판기념회와 한·중국제학술포럼을 개최했다. 이듬해 10월 국학연구소(소장 서굉일)는 정기학술회의 주제로 서일을 택했다.
    복기대 회장(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은 “백포 서일은 한민족주의 이론적 틀을 확립하고 그 이론을 행동으로 옮겼다.”라며 “당시 암울했던 대일항쟁에 그 길을 열었던 지도자”라고 말했다.
   서일은 고종 18년인 1881년 2월 1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이천(利川), 본명은 기학(夔學), 호는 백포(白圃), 당호는 삼혜당(三兮堂)이다.
   경성군 함일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10년간 계몽운동과 교육을 통한 구국활동에 헌신하였다. 백포는 1911년 나라를 건질 일념으로 두만강을 건너 왕청현(汪淸縣) 덕원리에 자리잡았다. 백포는 그 곳에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설립하여 청년동지들에게 민족정신을 교육시키기에 진력하였다.
   백포는 1911년 3월 두만강을 넘어오는 의병의 잔류병력을 대종교인인 현천묵(玄天默) 계화(桂和) 백순(白純) 등 애국청년들을 중심으로 규합하여 독립단체 중광단(重匡團)을 조직하고 31세에 단장에 취임하였다. 백포 서일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시작했다.
  서일은 대일항전을 위해 사관양성소를 만들어 간부양성에 주력했다. 그 임무를 김좌진에게 맡겨 이범석 등이 담당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배출된 사관생들은 대한군정서 군대조직의 근간이 된다. 이들은 청산리전투 등 대일전쟁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서일은 대종교를 중광한 나철의 제자다. 1913년 10월 시교사로 임명된다. 3년 만에 1916년 상교로 승진한다. 1919년 당시 2대 도사교(都司敎)이자 독립운동가인 김교헌(金敎獻)은 서일에게 교통(敎統)을 전수하고자 한다. 서일은 일제와의 전쟁을 준비한다는 이유로 5년을 유보한다.
   신운용 한국외국어대학교 외래교수는 이에 관해 “이는 서일이 국권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대종교와 민족의 미래가 없다는 확고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라며 “이러한 서일의 생각은 국권보다 종교의 이익을 우선하던 일부 세력과는 본질에서 달랐다”라고 분석했다.
   또한 서일은 삼일철학(三一哲學)을 체계화한 사상가였다. 그는 《회삼경》,《삼일신고강의》,《구변도설》,《진리도설》,《오대종지강연》,《삼문일답》등을 집필했다.
   김동환 연구원은 “회삼경은 서일의 삼일사상이 가장 종합적으로 체계화된 글”이라며 “유불선 삼교의 원리인 불교의 묘법, 유교의 역학, 도교의 현리(玄理)를 종합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독립군은 청산리 전투 후 일제의 추격을 피해 러시아령(領) 밀산(密山)으로 이동한다. 여기에서 서일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홍범도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등 10개 부대 3,500여 명은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으로 결성된다. 서일은 초대 총재로 추대된다.
   그러나 1921년 6월 28일 노령 자유시에서 러시아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는 자유시참변으로 치명적 타격을 받는다. 이에 좌절을 느낀 백포는 같은 해 8월 26일 밀산현(密山縣) 당벽진(當壁鎭)에서 재기를 도모하던 중 다시 토비들의 급습을 받아 그가 머물고 있던 마을 주민들까지 참화를 당하는 위기를 겪었다. 치명적 타격을 입은 백포는 독립군 총수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고 마침내 다음날인 1921년 8월 27일 "날 저물고 길은 궁한데, 인간 가는 길이 어디메뇨"라는 홍암 대종사의 유서 글귀를 읊조리고, 뒷산 숲속에서 대종교 최고 수양법의 하나인 조식법(調息法)으로 자결하였다. 
   그의 유해는 밀산현 대흥동에 안장되었다가, 1922년 8월 15일 서이도본사 주최로 1주기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1923년 1월에 대종교총부는 그의 묘소에 원방각(圓方角) 나무배자를 건립하였고, 제전(祭田)을 구입하여 향사비(享祀費)로 쓰도록 결정했다. 이후 1924년 3월 16일 백포에게 종사철형(宗師哲兄)의 교질을 추숭(追崇)하였다. 1927년 봄에 그의 유해를 밀산현 당벽진에서 화장하여 화룡현 청호에 이장하였다. 이로써 청호는 홍암, 무원, 백포의 유해를 봉장한 대종교의 성지가 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계시를 받고 지었다고 전하는『회삼경(會三經)』,『삼일신고도해강의(三一神誥圖解講義)』,『신리주해(神理註解)』,『오대종지강연(五大宗旨講演)』,『구변도설(九變圖說)』,『진리도설(眞理圖說)』,『삼일문답(三一問答)』 등이 있다.
   백포 서일은 무장독립운동의 위대한 영도자로서 탁월한 조직능력을 갖춘 군사가이며, 대종교의 교리를 철학적으로 체계화시킨 이론가였다. 특히 한학과 역리(易理)에 능통하고 불서(佛書)와 신학(神學)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열악한 상황에도 독립군을 이끌고 일제와 맞서 무장투쟁에 앞장 선 용기와 종교적 수행과 연구를 꾸준히 하여 지혜를 고루 갖춘 문무겸비의 실천적 지도자였다.
    한국정부는 백포 서일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1. 정길영, <백포 서일 연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박사학위논문, 2012.
   2. 윤관동, "대일항쟁의 정신적 지주, 백포 서일을 아십니까?", 코리안스피리트, 2013.4.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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