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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 버텨낸 생명의 존엄성 기록한 박경리의 <토지>
 tlstkdrn  | 2018·07·02 14:42 | 조회 : 66
억압 버텨낸 생명의 존엄성 기록한 박경리의 <토지>

    “189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 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어른들은 해가 중천에서 좀 기울어질 무렵이라야, 차례를 치러야 했고 성묘를 해야 했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누다 보면 한나절은 넘는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독일 유학 시절 ‘토지’를 읽었을 때 만난 작품의 첫 구절은 내게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의 ‘장기지속’을 떠올리게 했다.
   장기지속은 시간의 심층에 흐르는 역사다. 한가위, 까치, 감나무, 송편, 차례, 성묘, 그리고 이웃과의 음식 나누기 등으로 이뤄진 자연과 일상과 물질문명은 내가 살아온 세계였다. 시간에 의해 마모됐더라도 내겐 정겨운 ‘토지’의 풍경은 독일의 낯선 풍경과 대비되면서 나로 하여금 민족의 이야기와 조우하게 했다.
   지난 100년 동안 나온 소설 가운데 ‘토지’는 으뜸가는 문제작이다. 25년의 집필 기간, 400명의 등장인물, 전5부 20권(마로니에북스 판)의 분량은 경이로울 뿐이다. 또, ‘토지’는 영어ㆍ프랑스어ㆍ독일어ㆍ러시아어ㆍ일어 등으로 번역됐고, 영화ㆍ드라마ㆍ음악극ㆍ만화 등 다른 양식으로 재현됐다.
   ‘토지’는 대하소설(大河小說)로 불린다. 많은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 흐르는 크고 넓은 강과 같은 소설이 ‘토지’다. 모든 것을 아우르며 도도하게 흐르는 장기지속의 문학이 바로 ‘토지’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
   ‘토지’는 열린 텍스트다. ‘토지’에는 여러 코드가 존재한다. 문학으로서의 ‘토지’, 역사로서의 ‘토지’, 철학으로서의 ‘토지’ 읽기가 가능하다. 이 짧은 글에서 ‘토지’의 모든 것을 다루기는 어렵다. 문학과 역사와 철학의 측면에서 ‘토지’에 담긴 의미를 독해하려고 한다.
   박경리는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1956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고, 단편 ‘불신시대’, 장편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등을 발표해 전후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의 한 사람으로 부상했다. 1969년부터 ‘토지’를 연재하기 시작해 1994년 완간했다. 1980년에는 강원 원주로 이사해 창작 활동에 전념하다가 2008년 세상을 떠났다.
   ‘토지’를 읽을 수 있는 첫 번째 코드는 문학의 측면이다. “1897년 한가위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 이 작품은 1945년 8월 15일 한국이 광복되는 날까지 꽉 찬 48년 동안 한국 사람들이 어리석은 왜정 부라퀴들이 설치던 어둠을 견디는 아픔과 설움, 그리고 참음의 길을 보여준 이야기 뭉치다.” 국문학자 정현기의 평가다.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의 최참판집 3대가 살아온 이야기가 ‘토지’의 뼈대를 이룬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무대는 만주, 서울, 일본으로 확장되고, 개인과 가족의 역사에 식민지배와 민족 독립이라는 사회의 역사가 중첩된다. ‘토지’는 지난 20세기 전반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발견하게 하고 상상하게 한다.
   국문학자 최유찬은 ‘토지’가 성취한 창조성을 내용과 형식으로 나누어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토지’는 내용적 측면에서 인간에 대한 탐구, 생명의 연민과 사랑, 한민족 세계관의 표현을 담고 있고, 형식적 측면에선 전통과 현대의 조화, 입체감과 생동감의 형상화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나아가 ‘토지’는 한국적 미의 창조를 보여준다고 최유찬은 고평(高評)한다.
    1994년 완간된 1년 뒤 서울 대신동의 한 식당에서 열린 '토지' 완간 1주년 기념 축하연. 왼쪽부터 작가 오정희, 장명수 한국일보 편집위원, 박경리, 김성우 주필, 박완서 작가, 김형국 서울대 교수, 작가 김원일, 최일남.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경리의 ‘토지’는 1994년 완간 이후 2012년 최종판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왼쪽부터 이상만 마로니에북스 대표, 최유찬 교수, 최유희 교수,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 이승윤 교수, 이상진 교수, 박상민 교수.한국일보 자료사진
    ‘토지’에 대해 상찬(賞讚)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국문학자 김윤식과 정호웅은 작가가 역사 전개가 강제하는 객관적 규정성을 가볍게 생각하여 ‘토지’에는 윤리적ㆍ심리적ㆍ운명론적 세계관이 강하게 드리워져 있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토지’의 특징을 ‘운명론적 세계관과 강렬한 개성의 세계’로 요약한다.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토지’를 어떻게 볼 것인지도 주목할 만하다. 이에 대해선 ‘토지’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전형적 특성을 드러낸다는 평가와 대지의 모성적 이미지를 담고 있다는 평가가 공존한다. 국문학자 이상진은 ‘토지’가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추적한다는 점에 주목해 ‘토지’에는 다양한 어머니들의 모습이 형상화돼 있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이처럼 ‘토지’를 읽는 데는 여러 길들이 존재한다. 언어학의 측면에서 ‘토지’는 경상도 사투리에 더하여 전라도ㆍ함경도ㆍ서울 사투리가 두루 쓰인 우리말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같은 의미를 가진 다른 발음들은 소설 속 인물들에 구체적인 생명력을 부여한다.
   역사의 측면과 철학의 측면에서 ‘토지’에 담긴 코드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박경리는 ‘토지’가 역사소설이 아니라고 주장한 바 있다. ‘토지’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탐구한 작품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토지’는 조선 왕조의 몰락, 일본의 식민 지배, 민족의 독립 투쟁 역사를 후경(後景)으로 놓아둔다. 역사소설이 아니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토지’는 작지 않게 기여한다.
   사회학자 박명규는 ‘토지’와 우리 근대사의 관계를 사회사적 맥락에서 조명한다. 그에 따르면, ‘토지’의 역사성은 제도사ㆍ구조사ㆍ사건사가 아니라 개인의 삶과 행동 속에 녹아 있는 역사의식을 포함한 개인사 및 생활사의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박명규는 ‘토지’가 한국 근대를 살아온 일상인들의 생활사를 사실적으로 구현하고 있다고 높이 평가한다.
    ‘토지’에 담긴 철학적 의미는 삶과 민족에 대한 사유에 있다. 1993년에 쓴 ‘서문’에서 박경리는 말한다. “산다는 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애잔하다. (...) 억조 창생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과 애잔함이 충만된 이 엄청난 공간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일사불란한 법칙 앞에서 나는 비로소 털고 일어섰다.”
    이렇듯 박경리에게 삶이란 아름다움과 애잔함, 희망과 절망, 의지와 허무가 공존하는 생명의 지속이다. ‘토지’는 무수한 실존적 생명들이 갖는 존엄성을 부각시킨다. 이 생명 존엄성의 옹호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민족정신의 구현으로 나아간다. 정현기는 ‘토지’가 일제의 잔혹한 식민지배 속에서 한민족 구성원들이 지닌 삶의 기품을 자발적이고 비타협적인 목소리로 재생시킨 민족정신의 크고 든든한 창고라고 해석한다.
   ‘토지’에 담긴 이런 사상을 주목할 때, 박경리가 1945년 광복으로 ‘토지’를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만세! 우리나라 만세! 아아 독립 만세! 사람들아! 만세다!” 외치고 외치며, 춤을 추고,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 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박경리는 문학의 의미에 대해서도 글을 남긴 바 있다. “나는 겁장이다 / 성문을 결코 열지 않는다 (...) 문학은 / 삶의 방패 / 생명의 / 모조품이라도 만들지 않고서는 / 숨을 쉴 수 없었다 // 나는 허무주의자는 아니다 / 운명론자도 아니다.” 그의 시 ‘문학’의 구절이다. 박경리에게 문학은 허무주의와 운명론을 넘어설 수 있는, 실존적 자아를 지켜내는 상상력의 힘이다.
    또, 박경리는 작가의 운명에 대해서도 말을 남긴 바 있다. “모든 생명은 총체로서의 개체이며 총체는 개체로서 이루어지고 고리사슬에 엮어진 존재일 것입니다. 소설을 쓰는 작가는 고리사슬을 물어 끊으려는 모반자인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고리사슬이 풀릴 것을 두려워하여 합일을 치열하게 소망하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의 책 ‘문학을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에 나오는 구절이다. 개체이자 총체인 인간을 탐구하는, 해체와 화해를 동시에 꿈꾸는, 그리하여 삶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은 작가의 사명이다.
    문학의 존재 이유는 인간의 다층성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에 있다. 문학은 삶에 대한 폭넓고 깊이 있는 생각을 안겨준다. 그리고 그 생각을 통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한다.
    기호학자이자 소설가인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 작가 노트’에서 작가가 누리는 으뜸가는 위안이 독자들의 이해를 통해 전혀 다른 독법을 발견하게 되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문학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텍스트다.
    박경리가 강조하듯, 문학은 생명의 모조품, 즉 창조된 허구다. 이 허구는 우리 인간 각자에게 삶의 진실을 깨닫게 하고,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 상상력과 진실에의 추구가 인간의 본래적 속성인 한, 문학은 언제나 인류와 함께 할 것이다.
                                                             <참고문헌>
    1. 김호기, "억압 버텨낸 생명의 존엄성 기록… 민족정신 ‘든든한 창고’ 짓다", 한국일보, 2018.7.2일자.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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