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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구님의 밝달나무숲


인조반정공신 김자점의 파란만장한 인생
 tlstkdrn  | 2020·06·02 20:38 | 조회 : 38
인조반정공신 김자점의 파란만장한 인생

   서울 종로구에 있는 자하문은 창의문이라고도 한다. 창의문 문루에는 계해거의(癸亥擧義) 정사공신(靖社功臣)이라는 제목으로 공신 47명의 명단이 붙어 있다. 1623년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반정 공신들 명단이다. '썩은 세상 뒤집고 정의를 세우겠다고 나선' 자들이다. 원래는 53명인데 6명은 이런저런 이유로 이름이 사라지고 없다. 6명의 이름은 김자점, 심기원, 이흥립, 이괄, 김경징과 심기성이다. 왜 사라졌나? 알아본다. 특히 김자점, 일개 유생에서 영의정까지 올랐다가 '도끼로 목과 허리가 토막 나 죽은' 사내 이야기.
   서기 1743년 음력 5월 7일 가뭄이 한창인 그 여름날 영조가 창의문 문루에 올랐다. 인근 평창에 있는 북교단(北郊壇) 기우제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마침 광해군을 내쫓고 능양군 이종이 왕위를 차지한 인조반정 120주년 되는 해이기도 했다. 영조는 반정 공신 이름을 현판으로 걸라고 명한 뒤 소현세자 묘에 참배를 지시하고 궁궐로 돌아갔다. 창덕궁 돈화문을 들어가 인정문이 보일 무렵 억수같이 비가 내렸다.(1743년 5월 7일 '영조실록')
   창의문은 1623년 3월 13일 새벽 능양군이 '義(의)' 자를 등에 붙인 반정 군사들을 지휘해 창덕궁으로 쳐들어가며 지나간 문이다. 이보다 3년 전 이들이 광해군 폐위 계획을 세운 곳은 창의문 바깥에 있는 세검정 계곡이었다. 김류, 이귀, 심기원, 신경진, 최명길, 구굉 등 전직 관리와 유생 김자점, 심명세가 그들이다.('계해정사록')
   서울 종로구 신영동에 있는 세검정(洗劍亭)은 인조반정 주동자들이 “검을 씻으며 정의를 세운다(洗劍立義·세검입의)”며 반정을 결의했다는 곳이다. 지금은 주택가로 변했지만 구한말까지 세검정 주변은 산자락 골짜기였다. 반정 공신 53명 가운데 6명은 역모와 부실한 국정 운영으로 공적이 박탈됐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김자점이다. 기가 막힌 처세술로 영의정까지 수직상승하며 권력과 금력을 누렸다가 더 빠른 속도로 추락해버린 인물이다. /박종인 기자
   그런데 1622년 이 모의가 들통났다. 광해군이 후원에서 애지중지하던 김 상궁과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첫 보고가 올라왔다. 그러자 김 상궁이 놀란 광해군 손을 잡고 이리 말하는 것이다. "가소롭나이다. 김생원이 어찌 이러한 뜻이 있겠습니까. 충성스럽고 한미한 선비일 뿐."('연려실기술'23 '계해정사') 이후 여러 차례 보고가 올라갔지만 광해군은 이들을 파직했을 뿐 역모죄로 처벌하지 않았다. 뒤에는 김자점이 있었다. 김자점은 김 상궁을 뇌물로 매수해놓은 터였다.(1623년 3월 13일 '인조실록') 상궁들은 김자점을 '성지(成之)'라고 부르며 허물없이 대했다. 성지는 친한 사람들끼리 부르는 자(字)다. 무산될 뻔한 쿠데타를 사전 공작(工作)을 통해 성공시킨 공로로 김자점은 일등공신으로 책록됐다. 별 벼슬 없던 유생(儒生), 인생 반전 시작이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터졌다. 김자점은 인조를 경호해 강화도로 도주했다. 김자점은 순검사 및 임진수어사에 임명됐다. 3년 뒤 한성부 판윤을 거쳐 1633년 조선군 도원수에 임명됐다. 총사령관이다.
   1636년 병자호란이 터졌다. 초기 대응 실패로 조선이 청에 굴복하게 만든 장본인이 김자점이었다. 도원수 김자점은 "겨울에는 침략 없다"고 장담하다가 국경을 방치해버렸다. 한양까지 들어가는 봉화(烽火)를 막는가 하면, 침략 임박을 보고하는 부하를 '군기 문란'이라며 처형하려 했다. 휘하 병력이 궤멸한 황해도 토산 전투는 '좋은 장수가 없어서 패한' 대표적 전투였다.('효종실록' 효종대왕행장)
   그를 처형하라는 대신들 요구가 빗발쳤다. 인조는 꿈쩍하지 않았다.(1636년 12월 15일 '인조실록') 김자점은 전쟁 후 유배형을 받았다가 왕명으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1640년 1월 27일 인조는 그를 강화유수에 임명했다. 한 달 뒤 인조는 김자점과 또 다른 공신 심기원을 호위대장으로 임명하고 옛 병졸들을 돌려줬다.(1640년 2월 2일 '인조실록') 오랑캐에게 고개 숙였다고 무시당한 왕에게 필요한 사람은 김자점 같은 인물이었다.
  화려하게 재기하고 보니, 옆에 라이벌 심기원이 있지 않은가. 복귀 후 4년이 지난 1644년 그 라이벌 심기원이 회은군 이덕인을 앞세워 반정을 기도하다가 발각됐다. 소현세자 부부가 강빈 부친상을 치르러 일시 귀국 후 돌아간 무렵이었다. 조사 결과 이들은 인조는 상왕(上王)으로 내쫓고, 소현세자가 불안하니 회은군을 왕으로 추대할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억울하다는 심기원과 그 무리들은 모진 고문을 받았다. 모두가 죄를 자백했다.
   인조는 사약을 내리는 걸로 마무리하려 했지만 모두가 처형을 원했다. 심기원은 처형됐다.(1644년 3월 21일 '인조실록') 그때 좌의정 김자점이 처형 담당관을 따로 불러 말했다. "먼저 팔과 다리를 벤 뒤에 나중에 머리를 베라." 같은 반정공신 이시백이 다른 이에게 말했다. "어찌 저런 자가 제 명대로 살겠는가."('연려실기술'27 심기원의 옥사 '공사견문') 인조는 그에게 낙흥부원군 군호를 내렸다.
   창의문(자하문) 문루에 걸린 반정 공신 명단. ‘계해거의 정사공신’이라는 제목으로 1등부터 3등까지 공신 47명 이름이 새겨져 있다. 반정 120주년인 1743년 영조가 명해 새겼다.
   2년 뒤 청나라에 구금 중이던 임경업이 공모 혐의로 압송됐다. 임경업은 "내가 명나라로 망명한 사실을 김자점에게 알리라고 했다"고 자백했다. 임경업은 그날 고문으로 죽었다.(1646년 6월 17일 '인조실록') 연려실기술은 '김자점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죽였다'고 기록했다.('연려실기술'27 심기원의 옥사 '조야첨재') 이듬해 김자점의 손자 김세룡과 인조 후궁 조씨의 딸 효명옹주가 혼인했다. 옹주와 부마는 옷과 기물이 극히 풍족하고 사치스러웠다.(1647년 8월 16일 '인조실록') 김자점은 이제 왕과 사돈이 되었다.
   1645년 2월 심양에서 귀국한 소현세자가 두 달 만에 죽었다. 그리고 인조는 서둘러 둘째 아들 봉림대군을 세자로 선정했다. 원손(세자의 아들) 대신 차남을 세자로 봉하겠다는 인조의 결정에 모두가 반대했다. 김자점은 인조의 결정을 "종사를 위해 내놓으신 깊고 원대한 계획"이라고 찬양했다. 봉림대군을 세자로 결정하겠다고 인조가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김자점이 "곧바로 왕명을 받들겠다"고 아뢰었다. 오히려 인조가 당황해서 "천천히 해도 늦지 않다"고 말릴 정도였다. 사관은 그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임금 뜻을 미리 알아 비위를 맞추는 경우는 소인일 뿐이니, 낱낱이 기록해둔다.'(1645년 윤6월 2일 '인조실록')
   질투심과 권력 찬탈의 공포심에서 인조는 후계자로 앉힌 차남을 보호하려 했다. 그 보호책 가운데 가장 강경한 방안이 소현세자 주변 인물 제거였다. 가장 가까운 인물은 며느리 강빈이었다. 제거 작업에 가장 강력한 장치는 역모(逆謀)였다. 이듬해 강빈 역모 사건이 터졌다. 강빈이 인조를 저주하고 죽이려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인조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강빈 사사(賜死)를 작심했다.
   조선 말 도화원 화가 유숙(劉淑·1827~1873)이 그린 ‘세검정’. 인왕산 골짜기 개울가 한가운데에 정자가 서 있다. 세찬 물소리 덕에 도청당할 염려 없이 모의를 꾸미기 딱 좋다.
   1646년 2월 7일 인조는 김자점을 내의원 도제조에 임명했다. 최측근이다. 실록에 따르면 인조는 '대신들이 강빈 사사를 반대하는 보고서를 올릴 때마다 김자점이 병을 핑계로 불참하자 김자점은 부리기 쉽다는 것을 알고는 끌어다 쓴 것이다.'(1646년 2월 7일 '인조실록') 최측근으로 임명된 그날, 김자점이 인조 면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개 부모에게 불순한 자에 대해서는 선대에서도 이미 벌을 시행한 일이 있나이다. 사람들이 소현세자 잘못한 점을 많이 말하는데, 이는 다 강씨 짓입니다. 신하들이 어찌 이 사람을 위해서 비호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근래에 사대부들이 세상에 명예를 구하고자 하니 이런 일이 벌어지나이다." 회의 끝에 김자점이 또 말했다. "다른 대신들은 괘념치 마소서." 김자점은 영의정에 올랐다. 벼슬 없는 유생으로 반정에 참가한 지 23년 만이었다.
   3년 뒤 인조가 죽었다. 그때까지 부귀영화란 부귀영화는 다 누리던 김자점에게 재앙이 닥쳤다. 효종이 즉위하고 한 달 뒤 김자점을 탄핵하는 상소가 줄을 이었다. 사헌부에서는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은 김자점을 탄핵했다. 사간원은 사헌부와 함께 그의 사치와 불의, 교만과 방자를 성토했다.(1649년 6월 22일 등 '효종실록') 그러자 김자점은 역관 이형장을 통해 청나라에 '조선이 명나라 연호를 쓰고 있다'고 고자질했다. 청나라 압력을 통해 권력 회복을 노린 것이다. 이듬해 3월 김자점은 광양으로 유배됐다. 순식간에 김자점은 허물어졌다. 1651년 마침내 아들 김식을 포함한 역모가 적발됐다. 정적들이 벌인 공작이었는지도 모른다. 기댈 언덕은 인조밖에 없던 김자점이었으니까. 김자점은 결백을 주장했으나, 고문은 그의 입을 열고야 말았다.
   1651년 12월 17일 효종이 인정문 앞에서 김자점을 친국했다. 김자점이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죄를 자백했다. 그 자리에서 김자점은 처형됐다. 사흘 뒤 효종이 잡범 사면령을 발표하고 백성에게 이렇게 일렀다. "(김자점은) 권세를 등에 업고 악행을 저질렀고, 안팎을 연결해 간계를 길렀다. 죄는 머리털을 뽑아 헤아려도 속죄하기 어렵다. 하여 죽어 마땅한 자들을 모조리 가마솥에 넣고 도끼로 자르는 극형에 처했다(妖腰亂領 咸就釜鑕之膏·요요란령 함취부질지고)."(1651년 12월 20일 '효종실록') 김자점처럼 "머리를 맨 끝에 자르라"는 사람은 없었을 터이니, 진짜 가마솥에 끓이고 도끼를 휘두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똥찬 처세술의 종착지였다.
                                                            <참고문헌>
   1. 박종인, "반정공신 김자점의 기똥찬 처세술", 조선일보, 2020.6.2일자. A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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