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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구님의 밝달나무숲


김상옥(金相沃) 시조시인의 생애와 업적
 tlstkdrn  | 2020·11·08 14:05 | 조회 : 14
김상옥(金相沃) 시조시인의 생애와 업적

    김상옥(金相沃, 1920-2004) 시조시인은 1920년 3월 15일 경남 충무에서 태어났다. 호는 초정(草汀)이다.
   인쇄소에 다니며 독학하면서 소년기를 보낸 뒤 1938년 10월 [문장]지에 <봉선화>와 194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부에 <낙엽>이 당선되어 데뷔.(김상옥의 [문장] 추천제 응모는 이호우의 경우처럼 <봉선화> 작품 한 회에 끝났다. 왜냐하면 두 번째 추천을 받기 전에 [문장]지가 폐간되어 그 기회를 잃은 것이다.)
   사상범으로 여러 차례 영어(囹圄)생활을 했다. 해방 후에는 삼천포, 부산 등지에서교사 생활. 통영문협 회장(1956), 경남여고 교사(1959), 상경하여 표구사인 [아자방(亞字房)] 경영. 시조의 현대화에 기여함. 노산문학상, 중앙시조대상, 가람시조문학상 수상.
   시조시인. 필명 초정(草汀). 경남 충무시 항남동 출생. 인쇄소 문선공 등으로 소년기를 보낸 뒤, 1938년 김대봉(金大鳳)ㆍ김용호(金容浩)ㆍ함윤수(咸允洙) 등과 동인지 [맥]의 동인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같은 해 시동인지 [아(芽)]에도 작품을 발표, 1940년 [문장]에 시조 <봉숭아>가 추천되었다. 194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부에 <낙엽>이 당선되었다. 그 후 해방되기까지 여러 차례 사상범(思想犯)으로 영어생활(囹圄生活)을 치렀다.
   1946년 이후 삼천포ㆍ부산ㆍ마산 등지를 전전하면서 교원생활을 계속, 이때부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47년 첫 시조집 <초적(草笛)>을 발간, 1949년에는 시집 <고원(故園)의 곡(曲)>과 <이단(異端)의 시(詩)>를 출간했다. 이 밖에 시집 <의상(衣裳>(1953) <목석(木石)의 노래>(1956), 동시집 <석류꽃>(1952) <꽃 속에 묻힌 집>(1958)을 발간했다.
   한편 1956년 통영문협을 설립, 그 회장이 되었다. 이 무렵에는 주로 [현대문학]에 <목련>(1955) <기억>(1955) <승화(昇華)>(1955) <살구나무>(1956) ,슬기로운 꽃나무>(1957) <근작시초(近作詩抄)>(1957) <속 초적집>(1958) <아가(雅歌)<(1958) 등의 작품을 내놓았다. 그리고 3권의 동인집을 출간, 또한 충무공시비(忠武公詩碑) 등을 건립했다.
   특히 섬세하고 영롱한 언어를 잘 구사하는 이 시인은 시조로 출발, 해방 후에는 시조보다 시쪽에 기울면서 1963년경부터 시조를 3행시라고 주장했다. 1959년 경남여고 교사를 거쳐 상경, 표구사(表具社) [아자방(亞字房)]을 경영했다.
   김상옥 시조시인은  2004년 10월 31일 향년 8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 386에 있다.
                                                  1.  김상옥 시조시인의 생애
   한국시조문학의 대가 초정 김상옥 선생은 1920년 통영 항남동에서 태어났다. '봉선화''사향''백자부' 등 교과서에 실린 작품을 비롯해 600여 편의 시조를 남겨 이름을 떨쳤지만 그는 시, 서, 화, 전각에 두루 통달했던 만능예술인이었다. 글과 그림을 사랑하며 살다간 삶, 예술만을 추구하며 자유롭게 살았던 삶이었다.
                                                1) 독학으로 공부한 청소년기
   김상옥 선생의 부친인 김덕홍은 선비였으나 벼슬도 없고 땅도 없어 갓을 만들어 생계를 꾸려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선생이 여덟 살 되던 해 부친도 별세하고 선생은 매우 어려운 청소년기를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학문을 배운 경험이라고는 어린 시절 다닌 서당이 전부로 선생은 자라는 내내 사환, 견습공, 문선공, 인쇄공, 도장장이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독학으로 문학에 대한 꿈을 키워 나갔다.
   어렸을 때부터 글과 그림에 소질을 보였던 선생은 문단에도 상당히 이른 나이에 입문했다. 18세가 되던 해인 1938년 시 동인지에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1939년 시조 '봉선화'가 '문장'지에 추천받아 등단했다. 얼마 지나지 않은 1941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낙엽'이 당선했다.
   일제시대 후반기에는 사상범으로 몰려 윤이상 등과 함께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세 차례나 투옥된 적이 있다. 작곡가 윤이상과는 이후에도 도피생활을 함께 하는 등 그 인연은 평생토록 이어졌다. 지난 1995년 윤이상 선생이 영면했을 때 고향 통영에서 열린 추도식의 추도위원장이 바로 선생이었다.
                                            2) 시조시인으로, 화가로, 서예가로 할약
   광복 이후에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추천강사의 형태로 교단에 섰다. 이 무렵 선생의 예술에 대한 창작열은 실로 뜨거웠다. 일제하에서 억압받던 열정이 한꺼번에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수시로 시 낭송회를 열고 그림을 그려 전시했던 그 시절, 1947년에 펴낸 첫 시조집 '초적'을 시작으로 '고원의 곡''이단의 시''의상''목석의 노래''꽃 속에 묻힌 집' 등이 이때 출간됐다. 윤이상, 유치환, 김춘수, 전혁림 등과 함께 한 '통영문화협회'도 1956년 창립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50년대를 자신만의 시조 기법으로 풍미한 김상옥 선생은 1960년대부터 고미술품점을 경영하며 전통시조에 대해 현대적인 실험을 시도하기 시작한다. 언어의 절제미를 살리면서도 자유로운 사설시조를 다수 발표해 시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예에 있어서도 자신만의 서체를 가진 뛰어난 서예가였으며,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려 팔순이 넘은 나이에 개인서화전을 연 적도 있다.
   그리고 2004년, 선생이 아내를 먼저 보내고 식음을 전폐하다 엿새 뒤 타계했다는 사부곡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이다. 선생이 타계한 후 고향 통영에서는 생가 주변에 초정 김상옥 거리를 조성했고 시비도 건립했다.
                                                2.  김상옥 시조시인의 작품세계
   김상옥은 이호우와 함께 1940년대 초에 가람 이병기에 의해 [문장]지를 통해 나온 시조 작가 중 대표적 인물이다. 이호우가 시조에 현대시적 내용을 도입한 공로자라면, 그는 시조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한걸음 발전시킨 공로자라 할만하다.
   그가 즐겨 쓰는 시조의 세계는 한국적 생활과 사상이다. 따라서 소재를 선인이 끼친 문화재나 역사적 설화 또는 예스러운 몸맵시 따위에서 취하여 한국의 미를 끈질기게 추구하되, 특히 주옥같은 영롱한 시어를 마음껏 구사하여 가구(佳句)로 엮어 놓는다. 한마디로 그의 시는 다분히 낭만적이다. 시상은 현대시와 동질이다. 그러나 언어 구사에 있어선 고아(高雅)한 말을 쓰기에 힘썼다. 명상적이고 관념적이며 화려하다.
   김상옥은 시조로 출발, 광복 후에는 시조시형으로 뿐만 아니라 자유시형으로도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시조는 문화재 등을 소재로 하여 민족 고유의 예술미와 전통적 정서를 형상화한 것이 많으나, 특히 이은상의 관념적 특성과 이병기의 청신한 감각성을 융합한 경지를 보여준다.
   전통적 서정을 바탕으로 생명의 구원을 위한 광명에의 희구, 사물의 배후에 깃든 생명감 등을 포착하여 영롱하고 섬세한 언어감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광복 후 시와 시조의 창작에 전념, 주로 긍정적이며 밝은 사상과 서정에 입각하여 고아하고 세련된 시어로 주옥같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1963년경부터 시조시형의 시를 삼행시 또는 삼연시라고 주장해 오면서 시조시의 현대적인 혁신을 작품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다.
   김상옥 시조시인 작품의 특징은 전통적인 율곡과 제재로 사실적 기법을 활용한 회고적 작품이 주류를 이루며, 섬세한 언어를 잘 구사하여 아취 있고 향수 어린 독특한 세계를 표현하였다.
   1) 섬세하고 영롱한 언어 구사, 전통적 시정(詩情)의 세계, 서정적 낭만시
   2) 한국적 생활 사상, 명상적, 관념적, 지성적, 예스런 언어, 밝고 자연스런 율격
   3) 사물에의 깊은 관조, 시어의 현대적 감각.
                                                      3. 김상옥 시조시인의 연보
    . 1930 진산 이찬근, 완산 김지옥, 노제 장춘식 사사(∼1935)
    . 1936 시지 [아] 동인
    . 1937 시지 [맥] 동인
    . 1938 문예지 [문장] 추천
    . 1938 동아일보 <시ㆍ시조ㆍ동요> 당선
    . 1940 시 동인지 [문장]에 시조 <봉선화>가 추천
    . 1941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낙엽> 당선
    . 1945 삼천포문화동지회 창립, 한글운동 전개
    . 1946 부산ㆍ마산ㆍ삼천포 등지에서 중학교 교사생활
    . 1947 시조집 <초적> 출간
    . 1959 부산 경남여고 교사
    . 1972 일본 교토에서 서화전 개최
    . 1973 삼행시집 <삼행시> 출간
    . 1989 고희기념시집 <향기 남은 가을> 출간
    . 1996 문학의 해 조직위원회 자문위원
    . 1996 시 동인지 [맥] 재창간
    . 1999 [우리시를 사랑하는 모임] 고문.
    . 2004 10월 31일 별세

    .【평론】<문학풍토기, 충무편: 동향(同鄕)의 선배와 후배를 말한다>(현대문학.1966.5)

<비시적(非詩的) 시성(詩性): 이달의 화제>(현대문학.1967.4) <평범에의 매력: 이달의 화제>(현대문학.1967.5) <문화적 원시성: 이달의 화제>(현대문학.1967.6) <1970년 시조 총평>(월간문학.1970.12)

    【시조】<모래알>(맥 2집.1938) <다방>(맥 2집.1938) <봉선화>(문장 9.1939) <낙엽>(동아일보신춘문예.1941.1) <청자부(靑磁賦)>(시조집 초적.1947) <백자부(白磁賦)>(시조집 초적.1947) <다보탑>(시조집 초적.1947) <사향(思鄕)>(시조집 초적.1947) <추천(鞦韆)>(백민.1948.4/5) <잠(蠶)>(民聲 37.1949.8) <가만히 눈 감고 느껴 아노니>(문예.1949.11) <예가 어딜까요?: 고궁(古宮) 미술관에서>(문학.1950.5) <사립문>(문예.1950.5) <한 폭 그림같이>(1952) <우수(憂愁)의 서(書)>(문예.1953.2) <대인(待人)>(문화세계.1953.7) <위치>(1953) <동굴에서>(1953) <좌석(座席)>(嶺文 12.1954.12) <기러기>(1954) <목련(木蓮)>(현대문학.1955.2) <기억(記憶)>(현대문학.1955.5) <승화(昇華)>(현대문학.1955.10) <질그릇>(문학예술.1956.1) <살구나무>(현대문학.1956.3) <돌>(1956) <슬기로운 꽃나무>(현대문학.1957.3) <근작시초(近作詩抄)>(현대문학.1957.8) <아가(雅歌): 아사녀의 노래>(현대문학.1958.6) <불>(현대문학.1960.1) <조춘(早春): 성소년(聖少年) 말세리노>(현대문학.1960.5) <무초산관기(無蕉山館記)(1)>(현대문학.1963.4) <무초산관기(無蕉山館記)(2)>(현대문학.1963.5) <무초산관기(無蕉山館記)(7)>(현대문학.1963.10) <무초산관기(無蕉山館記)(8)>(현대문학.1963.11) <무초산관기(無蕉山館記)(9)>(현대문학.1963.12) <무초산관기(無蕉山館記)(8)>(현대문학.1964.2) <근작수제(近作數題)>(현대문학.1964.3) <무초산관기(無蕉山館記)(2)>(현대문학.1964.5) <사표(辭表)>(문학춘추.1965.6) <다도해(多島海)의 풍경>(사상계.1965.7) <무슨 목청으로>(현대문학.1965.8) <약(藥)과 시(詩)와 골동(骨董)>(신동아 20.1966.4) <꽃과 걸인(乞人)>(현대문학.1966.6) <삼행시(三行詩)>(시조문학 14.1966.9) <꽃과 걸인>(1966) <이조(李朝)의 흙>(1966) <신록(新綠)>(1967) <순희(舜姬)>(현대문학.1968.2) <파편(破片): 포도인령가(葡萄印靈歌)>(월간문학.1968.12) <근작상행시초(近作三行詩抄)>(1968)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현대문학.1968.3) <백모란>(현대문학.1968.6) <가람선생>(한국시단 2.1969.2) <꽃의 자서(自敍)>(현대문학.1969.3) <꽃의 증명>(현대시학.1969.10) <금추(今秋)>(월간문학.1969.11) <애도(哀悼)>(1970) <아자방야화(亞字房夜話)>(현대시학.1970.1) <선(善)한 마법(魔法)>(현대문학.1970.7) <어떤 사실>(현대문학.1970.7) <따스롭기 말할 수 없는 무제(無題)>(현대문학.1971.9) <축제>(현대문학.1971.9) <어느 친전>(현대문학.1971.9) <나의 악기>(현대문학.1971.9) <과학, 비과학비비, 과학적 실험>(현대문학.1971.9) <겨울>(시문학 7.1972.2) <꼽추의 노래>(시문학 9.1972.4) <내가 네 방 안에 있는 줄 아는가>(풀과별 3.1972.9) <금(金)을 넝마로 하는 술사(術師)에게>(시문학 14.1972.9) <꿈의 연못>(현대문학.1972.10) <꿈의 연못>(문학과지성 11.1973.2) <아자방야화(亞字房夜話)>(신동아 103.1973) <아자방야화(亞字房夜話)>(アジア公論.1973.9) <고아(孤兒) 말세리노의 입김>(한국문학 8.1974.6) <청화연화문(靑華蓮花紋)>(한국문학 20.1975.6) <축원문(祝願文)>(현대문학 247.1975.7) <부처님과 차돌이>(현대문학 247.1975.7) <묵(墨)을 갈다가>(한국문학 25.1975.11) <봄 행상(行商)>(한국문학 32.1976.6) <마산(馬山)에서>(시문학 62.1976.9) <심마니의 노래>(창작과비평 40.1976.여름호) <옹이 박힌 나무>(창작과비평 40.1976 여름호) <가을과 석수>(창작과비평 40.1976 여름호) <변신의 꽃>(창작과비평 46.1977 겨울호) <귓전에 남은 소리>(창작과비평 52.1979 여름호) <봄>(창작과비평 72.1991 여름호)

【수필】<생활의 예지>(자유공론 5.1966.8) <시보다 서화(書畵)와 도자(陶瓷): 내가 영향 받는 작가>(현대문학.1968.8) <서예⋅서예가>(세대 64.1968.11) <한국의 눈, 한국의 손>(아세아.1969.6)

【시조집】<초적(草笛)>(처녀시집.수향서헌.1947) <고원(故園)의 곡(曲)>(성문사.1949) <이단(異端)의 시>(성문사.1949) <의상(衣裳)>(현대사.1953) <목석(木石)의 노래>(청우출판사.1956) <삼행시 65편>(아자방.1973) <묵을 갈다가>(창비.1980) <느티나무의 말>(성서각.1998) <눈길 한번 닿으면>(만인사.2000.육필시집)

【시화선집】<향기 남은 가을>(상서각.1989)

【동시집】<석류꽃>(현대사.1951) <꽃 속에 묻힌 집>(공저.창비.1979)

【산문집】<시와 도자(陶瓷)>(아자방.1975)

                                                     <김상옥 시조시인의 언론 보도>

                                                      1. '백자부'의 시인 초정 김상옥
   초정(草丁) 김상옥(金相沃. 1920-2004)은 일찌기 교과서에 실렸던 시조 ‘백자부白磁賦’로 인해 '백자부'의 시인으로 일컬어진다. 그는 1920년 경남 통영시 항남동에서 아버지 김덕홍(金德洪) 과 어머니 진수아(陳壽牙) 사이에 6녀 1남의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와 여섯 누나들은 외아들 하나를 위해 희생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의 거침 없는 성격,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외고집은 이런 환경 아래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가정이 부유하거나 중류 정도로 살아가는 데 걱정이 없었다면 초정의 일생은 별로 드러나지 않는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을 것이다.
   아버지 기호(箕湖) 김덕홍은 선비였다. 직함도 없고 땅뙈기도 없는 김덕홍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수단은 갓을 만드는 일이었다. 통영갓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김덕홍이 만드는 갓은 격이 높아, 철종 임금의 국상 때 사용한 백립은 김덕홍의 집에서 만든 것이 가장 많았다. 통영 갓방 중 '선창골 갓집' 이라면 초정의 부친이 하던 갓집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갓을 양산하는 것이 아니고 정성을 다해 조금씩 만들어내므로 언제나 집은 가난했다. 김덕홍이 병석에 눕게 되자 초정의 집안은 하루 아침에 궁색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초정이 여덟 살 되던 해 1927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초정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부터 서당 송호재(松湖齋)에 들어갔다. 학동 중에 초정이 제일 어렸다. 그러나 시험만 치면 '괴(魁)' 를도맡아 차지했다. '괴'란 무리들 중에 으뜸이라는 뜻이다.
   서당에서는 하나의 강(講)이 끝나면 시험을 보았고 그 결과 '괴'를 한 사람은 '괴턱'을 내야 했다. 떡을 찌고 술을 빚어 훈장과 학동들을 대접하는 잔치였다. 생계를 꾸려 가기에도 힘들었던 어머니 진씨는 괴턱을 감당하기 위해 가락지를 잡혔다. 그래서 초정은 '괴'를 받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할 형편이었다.
   그런데 서당을 그만 두게 되는 결정적 인 이유는 '군자君子' 취임식 때문이었다. 서당 송호재 뜰에는 앵두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발갛게 익은 앵두가 학동들의 군침을 삼키게 했다. 훈장은 앵두를 함부로 따 먹는 행위를 엄금했다. 앵두는 비록 한 그릇이라도 큰 섬에 따서 담아야 이듬해 더 많이 열린다는 것, 따서는 성주신과 서고 앞에서 천명한 후 골고루 나눠 먹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어느 날 훈장이 잠시 출타한 틈을 타 학동들 중 머리 큰 아이들이 앵두를 따 먹을 궁리를 했다. 자신들이 따 먹으면 날벼락을 맞을 게 뻔하니 나이가 어리고 공부를 잘해 훈장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던 초정에게 앞장 서서 따도록 부추겼다. 초정은 기왕 딸 바에야 많이 따서 골고루 나눠 먹어야지 하면서 , 나무에 있는 앵두를 거의 다 따버렸다.
   훈장이 돌아와 처참해진 앵두나무를 보고 진노했다. 범인을 추궁하자 한참 있다가 초정이 나섰다. 훈장은 "하고도 안했다고 발을 빼는 놈은 도적이다. 그러나 여럿을 위해 안하고도 했다고 나서는 놈은 군자다. 상옥이는 비록 어리나 군자다." 훈장은 서고 앞에 '군자'를 좌정시키고 다른 학동들은 마당에 무릎을 꿇리고 세 번 읍하게 하는 등의 '군자 취임식'을 거행했다. 이 내용은 장경렬 편 ‘불과 얼음의 시혼’(2007. 태학사)에서 인용했다. 앞으로 초정에 관한 이야기는 이 책을 중심으로 하여 필자와의 체험을 참고로 쓰게 될 것이다.
   초정은 청소년 시절이 매우 힘들었다. 먹고 살기 위해 몸으로 부딪쳐 해 보지 않은 일이 없을 정도였다. 사환에다 점원, 견습공, 그리고 밤낮 어두컴컴하고 연독(鉛毒)이 자욱하던 시골 인쇄소의 문선공, 조판공을 겸한 인쇄공, 도장포의 도장장이 표구사의 표구장이 골동상 아자방(亞字房)의 주인에다 중고등학교의 국어교사 자리까지 감당했던 이력을 지니고 있다. 광복 직후 출판이 된 초정의 첫 시집 ‘초적草笛’은 편집, 교정, 문선, 조판, 인쇄, 장정, 판각, 접지, 제본의 전 과정을 초정 혼자 손으로 해낸 것으로 유명하다. ‘초적’의 첫머리에 ‘독서의 명(銘)’이라는 시가 실려 있다.

     꿀벌이 꽃을 대하듯 책을 대하라
     벌은 달고 향기로운 꿀을 길어가되
     그 꽃잎 하나 아직 상한 적 없었나니!

    1960년대 중반쯤이었을까? 이 시를 접하고 감동을 받은 어느 분이 전국 도서관 사서회의에서 긴급동의를 하여 이 작품의 출처를 물었다는 것이다. 마침 회의 마감 전에 다른 누군가가 그 작품은 김상옥의 ‘독서의 명’이고 실려 있는 시집은 ‘초적’이라고 답을 했는데 다음 날 시에 대해 물었던 그 사서(司書)는 초정 시인 댁을 방문하게 되었다.
    방문하고, 책은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고 영하의 추위에도 방은 냉돌이고 난로도 전화도 없는 것에 충격을 받은 사서는 다음날 당장 목수와 미장이, 전화국 공원들을 시인의 집으로 들여보냈다. 초정은 이때의 심정을 “이리하여 내 가엾은 서울살이는 하루아침에 천지개벽을 이루었다”고 말한 바 있다.
    1970년대 초반의 일이다. 신세계 미술관이 초정에게 초정 시서화전(詩書畵展)을 열겠다는 제의를 했다. 카탈로그의 권두사는 이경성(李慶成)씨가 쓴다는 것이었다. 개전 전야에 이경성씨가 찾아와 작품을 일별하고는 “이것은 단지 문학의 여기(餘技)가 아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세계 전시를 마치자 미도파에서도 전시를 권유했다. 전시회는 신세계처럼 성황을 이루게 되었는데 개전 첫날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소설가 박완서(朴婉緖)씨가 그의 딸과 함께 찾아와서 불쑥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딸이 봉직하는 학교의 월급봉투였다. 유치원에서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대학교 4년, 근 20년 형설의 공을 쌓은 딸애의 첫 수확으로 초정의 서화를 산 것이었다. 초정은 “ 이렇게 귀한 화료는 아마 저 거장(巨匠) 미켈란젤로도, 화성畵聖 솔거도 받아 본 적이 없을 것이다.”고 술회했다.
    1973년 4월 초정은 자신의 시집 가운데 초호화판 시집(아마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시집 중에 최고의 장정?) ‘삼행시 육십오편’(三行詩 六十五篇)을 낸다. 초정은 스스로 쓰는 시조를 ‘삼행시’라 했는데 이는 시조를 현대시 개념으로 끌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다. 그 무렵 시집 한 권 값이 3백원인데 이 시집은 정가가 5천원이었다. 이렇게 고가(高價) 의 시집을 낸 까닭을 초정은 “그것은 아마 불우했던 나의 소년 시절의 간고(艱苦)에 대한 보상 심리의 작용이 아니었던가 싶다”고 측근에게 밝힌 바 있다.
    그 호화판이 나올 무렵 초정은 진주를 자주 방문했다. 삼현여자고등학교 창립자인 시조시인 아천(我川) 최재호(崔載浩) 교장을 찾아오는 것인데, 아천 교장은 그때마다 소장 시인 세 사람을 어김없이 분위기 좋은 밥집에 불러 앉히고 ‘문학의 밤’을 열었다. 그 세 시인은 박재두, 김석규(金晳圭), 그리고 필자였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초정의 시집을 한 권씩 기념으로 샀다. 이때의 이야기는 추억으로 많이 남아 있다. 어쨌거나 초정은 우리 문단에서 필자의 시를 아주 정확히 인정해 주는 사람 중에 한 분이었다.
    초정은 1934년 15세 되던 해에 통영에서 발행되던 '금융조합 연합회신문'의 동요 공모에 투고하여 당선되었다. 이것이 그의 작품의 첫번째 활자화였다. 초정이 정식으로 문단에 이름을 올린 것은 김용호(金容浩), 함윤수(咸允洙) 등과 함께 시지 '맥'동인으로 작품을 발표한 1937년이었다. 그가 18세되던 해였다. 바로 그 다음해 문예지 '문장'과 동아일보에 시, 시조, 동요가 연이어 당선되거나 추천이 되었다.
    그런데 16세 되던 해에 있었던 이야기는 어쩌면 황당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진주에 정기환이라는 30대 중반의 지식인이 있었는데 그가 진주로 어린 시인 초정을 초청했다는 것이다. 그때 초정은 뛰어난 동필(童筆)로 알려져 신동 소리를 들으면서 귀염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초정으로는 그때의 진주 행보가 난생 처음의 나들이이기도 했다.
    진주에 가 보니 정기환은 퇴기(退妓)의 집에 어린 초정의 거처를 마련하고 성대한 잔치를 열어주더라는 것이다. 초정 곁에는 초정 또래의 동기(童妓)도 한 사람 앉혀 놓더라는 것. 그 방에는 초정이 전에 정기환에게 써준 당시(唐詩) 족자 한 폭이 걸려 있었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닷새를 지내는 동안 초정은 생일을 맞이했는데, 그날 밤 휘황한 달빛 아래 벚꽃이 만발한 남강둑을 그 동기와 함께 거닐었다. 그 소녀를 생각하며 읊은 시는 다음과 같다.

     달빛에 지는 꽃은 밟기도 삼가론데
    취하지 않은 몸이 걸음조차 비슬거려
    이 한밤 풀피리처럼 그를 그려 울리어라

    숙성힌 상황에 숙성했던 작품으로 읽힌다. 초정의 청년기는 마냥 한가하지가 않았다.1936년부터 1939년까지 송맹수(宋孟秀), 김기섭(金杞燮), 장응두(張應斗), 윤이상(尹伊桑) 등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어 세 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그 뒤에도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낙인 찍혀 계속 감시를 받았다.
    그 무렵 다시 헌병대의 동태가 이상하게 느껴져 윤이상과 서울로 도망을 쳤다. 당시 윤이상은 통영군의 촉탁으로 있다가 미곡창고 서기로 삼천포에 있었다. 증명서 한 장 없이 우여곡절 끝에 서울로 올라간 초정은 화신 백화점 건너편 이규복이라는 충청도 노인이 경영하는 작은 도장포에 취직했다. 그 노인이 공교롭게도 서대문 형무소 바로 옆에 살아 그 집에서 안심하고 출퇴근을 했다.
    윤이상은 상경하여 등사 원지를 긁는 필경사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때 윤이상의 친한 친구 가운데 최상한이라는 지휘자가 있었다. 6,25가 닥치자 최상한은 월북했는데 그 사람 때문에 윤이상이 북한에 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초정은 도장을 판 덕분으로 위창(韋滄) 오세창(吳世昌) 선생을 만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초정은 향리에서 서당에 나가 한문 수업을 받았고 한의사로서 글씨와 시에 능했던 진산(眞山) 이찬근(李瓚根) 선생, 그림, 글씨, 전각에 뛰어난 완산(玩山) 김지옥(金址沃) 선생 등의 문하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이 예인의 삶을 살 수 있었던 행운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 어떤 예술이든지 정교하고 지미(至美)한 경지를 열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가람 이병기(李秉岐)는 18세 때 초정이 쓴 <청자부>를 보고 "글이 너무 절정에 올라가 있어 이런 글을 쓰면 단명한다'고 말한 대로 초정은 편편마다 언어의 지미함을 드러내 보였다. "보면 깨끔하고 만지면 매촐하고/ 신(神)거러운 손아귀에 한 줌 흙이 주물러져/ 천 년 전 봄은 그대로 가시지도 않았네."(<청자부> 첫련)
    1995년 11월 4일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이 독일 베를린의 발트 병원에서 영면했다. 그로부터 열흘 뒤인 11월 14일 그의 고향 통영에서는 젊은 시절 함께 교류했던 향인들이 모여 추도식을 열었다. 추도 위원장은 함께 고난의 길을 걸었던 친구 초정 김상옥이 추대되었다.
    초정과 윤이상은 닮은 점이 많다. 초정이 스스로 왕임을 자처한다면 윤이상 또한 그에 못지 않은 정신의 자유를 구가했다. 초정은 말하기를 "윤이상은 김일성의 귀빈으로 북한을 드나들었으나 사실은 고향 통영과 애증을 동시에 심어 준 한국땅을 죽을 때까지 그리워했어요. 세상을 뜨기 얼마전에 한국에 와서 연주를 할 목적으로 일본에까지 왔으나 우리 정부가 끝내 받아주지 않기 때문에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와 공해상에서 멀리 고향을 바라보다가 되돌아 갔어요." 하고 회상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엔 한사람의 뛰어난 음악가를 나라 밖으로 내 몰았던 것은 이땅의 편협한 예술 풍토였고, 밖에 나가 있는 그를 '북의 사람'으로 만들어 간 것은 우리 정부 기관이었지요" 라 말하기도 했다.
   윤이상이 국내에서 활약 할 때 음악 평론가로 상당히 큰 영향력을 주고 있던 한 분이 예술도 결과에 못지않게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했던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정규대학을 나오지 못했던 윤이상의 학벌을 두고 헐뜯었던 것이리라 그 바람에 자존심이 상해 유럽으로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기서 잠시 윤이상의 이력을 훑어보자.
   1956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파리 음악원에서 P. 르벨과 T. 오벵에게서 음악이론과 작곡을 배운다. 1957년 8월 서베를린 음악대학에서 R. 슈바르츠 쉴링, J. 루퍼에게서 음악이론을 배우고 B. 블라허에게서 작곡을 배운다. 1860년 서독 프라이부르크에서 중국 한국의 궁중음악에 대한 라디오 방송을 했고 1962년에는 관현악곡 ‘바라 婆羅’가 베를린 라디오 방송관현악단에 의해 초연된다. 1963년 북한을 방문하고 1965년 서독 하노버에서 ‘오 연꽃 속의 진주여’를 초연하게 된다.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중앙정보부는 그를 임의 동행 형식으로 귀국시키고 재판 결과 그는 무기징역을 받게 된다. 이후 동료 음악가 교수들의 국제적 항의와 독일 정부 도움으로 석방이 된다. 1971년 8월 뮌헨 올림픽의 문화행사로 오페라 ‘심청’이 발표되고 1977년 서베를린 예술대 교수로 임명된다. 1995년 죽기까지 수많은 작곡 발표와 수상이 이어졌다. 만년에 사람들은 그를 유럽의 현존 5대 작곡가로 불렀다.
    초정은 "독일에 있던 그가 북한으로 들어가게 된 동기는 단순했어요. 역시 고향 사람으로 북한에서 음악가로 활약하고 있던 최상한(崔相漢)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를 만나러 간 거지요. 김일성이 그를 극진하게 환대하고 이용한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한 쪽에서는 내몰고 잡아 가두는데 한 쪽에서는 이해하고 존경하고 환대하니 그런 사람을 끌어 안은 모습이 한국인들과 정부의 눈에 이상하게 비춰진 것이지요." 라고 윤이상 편에 서서 말했다.
    초정은 일제 때 보통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이고 윤이상은 제도권 국내 학교로는 중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전문으로 하는 일의 그 전문성으로 인해 전문성이라는 언덕에 큰 깃발 하나씩을 꽂아 놓았다. 초정의 경우 그 수련이 힘들고 외로운 것이어서 그도 모르는 사이 주변에서 왕따가 되어 있을 수도 있었으리라. 문단 주변이나 지역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둘러보아도 이점 쉽게 확인이 된다.
    초정은 문학의 길에서만은 언제나 당당했다. 그의 연조에 비슷한 어떤 시조작가가 신문사 주변을 맴돌면서 신춘문예 심사위원이라는 허명을 얻으려 한 것을 심히 못마땅히 여겼다. 어느 날 젊은 기자가 초정을 만난 자리에서 "도대체 시가 뭡니까?" 하고 느닷없이 물었다. 그러자 초정은 "기자 양반,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져 놓고 내가 당황하기를 바랬어요? 시가 뭐냐는 그따위 질문은 국민학교 2학년만 되면 그 나름으로 답할 수가 있어요. 반면에 평생 시를 써온 노인이 쉽게 답을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질문이요, 나도 그것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지, 그걸 질문이라고 해요?" 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시인들에 대한 빈정거림을 두고 그 대상이 언론인이라 하더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 성미를 지녔던 것이라 할 것이다.
     작곡가 금수현(금수현은 소설가 김말봉의 사위로서 장모로부터 받은 시 '그네'를 작곡하여 일약 유명해진 분. 지휘자 금난새의 아버지)이 문교부 편수관으로 있을 때 초정에게 편지를 보낸 일이 있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을 ' 시조 작법'에 관한 글을 써 달라는 내용이었다. 일본에는 단가(短歌)와 같은 국민시가 있어 현대시 못지 않는 사랑을 받고 있는데 우리나라 시조는 광복 후에 우리말과 글을 마음대로 쓰게 되자 오히려 천대받고 사라지는 기현상이 있어 안타깝다는 것이었다.
     초정은 처음에는 거절했다. 교과서에 그런 글을 실어 봤자 국어선생들이 낱말풀이나 가르칠 테니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예단을 한 때문이었다. 금수현은 다시 초정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초정은 "교과서에 그런 글을 싣기 전에 먼저 전국을 돌며 지역별로 중등학교 국어 선생님들을 모아 놓고 시조에 대한 강연을 개최하여 실질적인 교육을 위한 준비부터 해야 한다"고 했다. 금수현은 그렇게 할테니 먼저 글부터 써 달라고 졸랐다. 그때 초정은 글을 써 주었고 그 글은 교과서에 실렸다. 그후 초정은 "예상했던 대로 낱말풀이에 그치고 시조를 한국시의 원류이자 국민시가라는 관점에서 창작하고 감상하는 살아 있는 교육을 하는 학교는 별로 없었지요."라고 술회했다.
     초정은 현대시를 쓰는 시인들에게 자주 일침을 놓았다. 말을 너무 헤프게 쓰면서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옛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 준 일이 있었다. 초정이 12살 쯤 되는 때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통영의 해평 땅 갯마을에 어디서 굴러왔는지 이름도 성도 모르는 남녀 한 쌍이 와서 살았다.
     아내는 일을 하고 남편은 뱃일을 하여 비록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았다. 어느 바람 불고 파도가 높던 날 남편이 돌아오지 않았다. 함께 뱃일 나갔던 다른 선원들이 돌아와 남편의 죽음을 알렸다. 풍랑에 휩쓸려 수중고혼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아내는 그 선원들과 함께 망망대해로 나가 파도에 휩쓸린 자리를 확인하고 그대로 물속에 뛰어들었다. 남편의 뒤를 따른 것이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같은해역에서 두 구의 시체가 떠올랐다. 여인이 먼저 죽은 남편의 허리를 꽉 부여잡은 채 한 몸이 되어 있었다." 여기까지가 그 이야기의 줄거리이다.
     초정은 하늘도 바다도 가로막지 못한 한 여인의 열렬한 사랑에 감동한 통영의 선비들이 열녀비를 세웠다고 말하면서 글귀는 "만고창해 일편단심 萬古滄海 一片丹心"이라고 기억해냈다. 초정은 "이 한 마디보다 더 절절하게 표현된 문장을 찾기 힘들어요. 여기에 비하면 현대시는 아무것도 아니예요." 하고 시의 절제된 언어에 대해 강조한 바가 있다.
     광복이 된 후 초정과 윤이상은 그들의 삶의 터전이던 남쪽으로 내려왔다. 윤이상은 특유의 재능으로 부산사범학교 교사가 되었으나 초정은 부산, 마산, 진주 등지에서 그림도 그려서 팔고 길가에 앉아 도장도 새겨서 팔고 "도적질 말고는 안 해 본 일이 없다"고 할 정도로 여러 일을 하면서 떠돌았다.
     이 무렵 초정이 그린 그림은 아마 수천 장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확실한 밥벌이는 역시 도장 파는 일이었다. 도장을 새겨 밥벌이를 해온 탓에 초정은 안경알을 깎아 생계를 유지했던 철학자 스피노자를 좋아했다. 세공업이라는 점에서 동업자 개념이 있었던 것일까?
     초정이 온갖 일을 다하면서 떠돌던 시절도 새로운 직업을 가지면서 끝이 났다. 새로운 직업이란 교사를 말한다. 교사 노릇이지만 자격증이 없었으므로 '영원한 강사'의 출발이었던 셈이다. 그는 삼천포중학교와 삼천포여자고등학교 에서 그 일을 시작했다. 이 무렵 삼천포중학교에서 가르친 제자 중에 시인 박재삼이 있었다. 워낙 가난하여 제때에 학교에 다니지 못한 박재삼을 그는 유독 아꼈다.
     초정이 일단 백묵을 쥐고 교단에 서자 인기가 아주 좋았다. 정식 교원은 아니었지만 초정은 어느 학교에 가나 대접을 받았다. 사방에서 초청이 왔다. 통영여자중고등학교, 통영중학교, 통영수산고등학교에서 근무했다. 가는 곳마다 그는 그 학교의 교가 가사를 쓰고 대개 윤이상이 곡을 붙였다. 그 중 삼천포여자고등학교 교가는 지금도 옛날 그대로 불려지고 있다.

   와룡도 가얏나라 고운 그 산천
     철마다 이 고장에 짜 느린 비단
     육신보다 영혼을 곱게 가꾸는
     순결한 그 마음씨 향그로와라
     춘추로 고운 계절 바꿔 드나니
     불러라 삼천포여고 꽃다운 동산
     아 아 우리들 거듭 난 모교의 이름

     이때 문학에 대한 열정도 정점에 올라가 있었다. 초정은 "해방 직후에 삼천포에 '삼천포 문화 동지회'를 만들었지요. 좌익의 '동무'라는 호칭에 반발하여 굳이 '동지회'라는 용어를 썼어요. 그 무렵 좌익에 반발하고도 살아 남은 사람은 아마 흔치 않았을 겁니다. 그 무렵에는 사흘이 멀다 하고 시낭송회니 뭐니 문학행사가 열릴 정도로 일제때 억압당했던 갈증이 용출되고 있었어요. 나를 비롯하여 유치환, 전혁림, 윤이상, 허창언, 김용기, 탁형수, 김춘수 등이 주요 멤버들이었지요."하고 술회한 바 있다.
    초정은 교사로 일하면서도 그림을 계속 그리고 전시회도 열었다. 마산에서 전시회를 열자 마산고등학교 이상철 교장이 전시회를 와 보고 '함께 일하자'고 권유해 왔다.그래 마산고교 강사가 되었다. 이 학교에서 2년간 근무하던 어느날 오후, 초정은 몹시 피로했다. 의자에 앉아서 가르치려니 뒤에 앉은 학생들 얼굴이 보이지 않고,서서 가르치자니 피곤해 쓰러질 지경이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교탁 위에 올라 앉아 가르치고 있었는데 마침 그때 창문 너머로 교장이 지나가다가 이 광경을 보게 되었다는 것 아닌가.
    초정은 교장이 하는 몇 마디 소리를 듣게 되었고, 그는 그 다음날 사표를 내던졌다.다시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그림을 그려 파는 고달픈 나날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한때 삼천포중학교에서 같이 교편을 잡다가 퇴직 후 부산에서 큰 사업을 하고 있던 박기태의 도움으로 서울 올라가 출판사를 차릴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상경한 첫날 여관에서 돈을 몽땅 잃어버리고 하는 수 없이 비탄에 잠긴 채 부산으로 내려오고 말았다.
    초정에 대한 필자의 인연은 각별한 데가 있다. 초정은 1970년대 중반 이후 진주에 집중적으로 드나들었다. 삼현여자중고등학교를 창립한 아천(我川) 최재호(崔載浩) 선생을 만나러 오는 행보였다. 아천이 초정을 생각하는 마음과 배려는 끔찍할 정도였다.
    초정은 삼현여자중고등학교 초창기에 교가도 작사하고 학교 운영이나 문예활동 등에 대한 자문을 하기도 하고 특강도 했다. 당시 삼현에는 주로 문인 교사들을 많이 채용했다. 김석규(金晳圭), 박재두(朴績), 김창근(金昌根), 이 덕(李 德), 손정수 등이 있었고 좀 후에 수필가 최문석(崔文錫, 아천의 장남, 현 교장), 소설가 김인배(金仁培), 시인 강동주(姜東柱), 박종현(朴宗鉉), 수필가 정영선 등이 근무했거나 지금도 근무하고 있는 중이다. 특강 교사로 연만한 이경순(李敬純) 선생을 초빙했는데 이것은 순전히 아천의 특별한 배려였다.
    당시 서울에서 초정이 내려오면 아천은 거의 예외 없이 김석규, 박재두, 필자 이 세 사람을 동석시켰다. 주로 진양호에 있는 삼락장이거나 수정동의 서울집 같은 요정에서 회식을 했다. 회식이라지만 어찌 회식이겠는가. 주연(酒宴)이거나 시연(詩燕,宴)이었다. 이 이야기는 조금 미루고 초정과 필자의 개인적인 인연에 대해 먼저 말해 두고자 한다.
    필자가 대학 재학 중(66년, 4년 수료후 1학년 한 학기 학점을 추가로 이수하고 있을 때) 문공부에서 주최하여 공모했던 제5회 신인예술상 시 부문에 작품 2편을 응모하여 수상하게 된 일이 있었다. 문학, 연극, 무용, 국악 등 8개 분야에서 우리나라의 젊고 역량 있는 신인을 발탁한다는 취지였다. 이 상과 함께 오월 문예상은 중진 대가에 주는 상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신인예술상에 응모하는 사람은 대개 한 해 또는 두해 전에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거나 현대문학이나 자유문학 등에 추천을 받은 신인들의 리턴 매치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필자는 신문에서 공모 요강을 보고 그날 저녁 하숙집(문화동)에 들어가 거의 즉흥시로 ‘연기 및 일기’를 썼다. 전에 써 놓았던 ‘연잎의 물무늬’를 보태 2편을 그 다음날 우체통에다 넣었다. 필자는 그 전해에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으므로 떨어질 때 자존심에 상당한 상처를 입을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있었다.
    작품을 던져 놓고 까마득히 한 달쯤 흘러간 어느날 오후(아마 5월 31일경?) 교양과목 수업을 받고 나오는데 학교 신문사 기자가 달려와 "미당(서정주) 선생께서 전화로 알려 주셨는데 강희근의 시가 공보부 신인예술상 시부문에 수석상으로 확정되었고, 이제 조금 있으면 전체 심사위원회가 열리는데 그때 장르별 수석상 가운데서 한 사람 특상 수상자를 뽑는데 기다려 보라"고 일러 주더라는 것이다. 쿵,쿵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신춘문예 당선 때 전보와 함께 쿵,쿵 달려왔던 감격의 북소리가 1년 5개월여 만에 다시 달려온 것이었다. 그날 저녁에 안 것이었지만 필자는 전체 심사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특상 수상자로 결정된 것이었다.
    초정이 심사 현장에서 필자의 시를 좋다고 거들어 주어 결정적으로 뽑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1주일 쯤 지나서였다. 신문회관인가 어딘가에서 어떤 분의 시화전이 있어서 들렀는데 그 자리에는 이동주 시인과 다른 몇분 문인들이 담소하고 있었다. 필자는 신인인지라 언제나 앞서서 이름을 대고 인사를 드렸다. 그랬더니 이동주 시인이 손을 내밀며 "축하해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번 신인예술상 문학부문 심사 후일담을 초정에게 들었다면서 들은 대로 이야기 해 주었다.
     초정이 시조부문 심사를 먼저 하고 나오는데 시부문 심사는 끝나지 않고 계속 심사위원 두 분의 의견이 평행선을 긋고 있었다는 것이다. 서정주와 김현승 두 분 심사위원이었는데 서정주는 66년 J일보 당선자인 R씨의 작품을 밀고 김현승은 필자의 작품을 들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더라는 것이다. 미당은 왜 제자인 필자의 시를 밀지 않았을까?
    제5회 신인예술상 심사에서 시를 제외한 모든 장르의 심사위원들은 심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유독 시부문에서만 아직 결선에서 당선작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조부문 심사를 마치고 나오던 초정은 "여기는 뭐하는거요? 결정을 못하면 내가 하죠"하고 R의 작품과 필자의 작품을 한 눈으로 읽어내렸다. 초정은 "작품의 수준이 격차가 있네. 강희근의 '연기 및 일기'가 뛰어나요. 나 이것 안 뽑으면 나가서 소문낸다. 알았어요?"하고는 휑하니 나가버렸다는 것이다.
    미당은 그제서야 "R이 K군의 선배라서…"하고 얼버무렸지만 R의 작품을 뽑아 든 이유는 또 그 뒤에 밝혀졌다. R은 그해 서울의 모 신문의 신춘문예에서 ‘밀림의……’라는 작품으로 당선되었고, 그것이 표절 시비에 휩싸였는데 그런 전력과 관련이 있었다. 어쨌든 필자의 작품은 당당히 시부문 수석상이 되었고 R의 작품은 차석상이 되었다. 5개 장르의 통합 특상을 뽑는 종합 심사위원회가 그날 오후에 있었는데 만장일치로 필자의 ‘연기 및 일기’가 뽑혔다. 조연현이 필자를 밀고 김현승이 설명하고 서정주가 거들고 초정이 보장했다. 소설 심사위원이었던 김동리는 별 말이 없고, 다만 최정희가 "이게 무슨 소리요, 도통 알 수 없어요. 조금 더 설명을 해 주세요"하고 말하자, 김현승이 시가 갖고 있는 감각과 전위성에 대해 말해 주었다는 것이다.
    1966년 6월 11일 명동에 있는 국립극장에서 신인예술상 시상식이 있었는데 홍종철 문공부장관이 자리한 가운데 8개 분야 최고 수상자들에게 시상하는 시상식이 있었다. 필자가 받은 상장에는 오자(誤字)가 하나 있었다. 수상작 제목이 ‘연기 및 일기’인데 ‘연기와 일기’로 되어 있었다. 대한민국 문공부가 이렇게 허무한가, 투덜거리며 시상식 다음 연이어 있었던 최고 수상작 발표때 낭송을 하면서 분명히 '연기, 및, 일기' 이렇게 읽어나갔다.

  부드런 내의(內衣) 속에
    꿰맨 내의의 벌룸한 구멍 속에
    갖다 놓을 기쁨의
    내 힘대로의 기쁨의
    내음새
    풀어놓은 물감에 떠밀린 발치의 소리
    소리의 서너겹 언저리
    스콜이라도 남국의,
    일년수(一年樹) 겨드랑이에 부딪는 스콜의

    촉수(觸手)

  전체 6장 가운데 1장 대목이다.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나 자유분방한 '의식'같은 것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제목도 다른 사람이 전혀 쓰지 않았던 것이고 발상도 동서남북, 예고 없이 치닫는다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수상자 발표를 하고 나와서는 국립극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후배들과 시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명동의 한 술집으로 안내했다. 그 근처에서 필자를 기다리고 있던 시인 홍신선, 박제천 등이 저쪽 카페에 서정주, 김동리, 조연현, 최정희 선생 등이 계시므로 인사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가서 인사를 드렸는데 초정은 보이지 않았다. 김현승 시인도 보이지 않았다.
    초정이 불참한 것은 그 무렵 인사동에서 경영하던 골동품점인 '아자방(亞字房)'일이 바빴던 것이라고 이근배 시인이 귀띔해 주었다. 필자는 심사위원들이 앉아 있는 카페 카운터에 가서 상금 뭉치에서 뽑아낸 돈으로 일행의 찻값을 일괄 지불하고 나왔다. 신인이 문단의 대선배들을 위해 찻값을 내는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초정 선생에게는 좋은 기회가 올 것이야, 속으로 말하면서 후배들과 이근배, 이상범, 하덕조, 정해춘, 문영오, 정대훈, 박제천, 홍신선, 문정희, 정의홍, 송유하, 선원빈, 안양자, 정지하, 홍희표, 신상성,이국자 등이 기다리는 명동의 한 돌아앉은 술집으로 향했다. 이때 문효치(펜 이사장)는 ROTC 하사(연좌제로 장교 탈락한 계급)로, 조정래, 임웅수, 유근택은 졸병으로 전방 입대해 있었다.
     초정과 아천(我川)이 만나는 곳에 김석규, 박재두, 강희근이 세트로 배석했다는 말은 앞에서 한 바 있다. 아천은 교육자이기 전에 언론사 사장이었고 전분회사 사장이었다. 그만큼 스케일이 일반 문인들과는 달랐다. 문인은 최대한의 예우를 받아야 마땅하다며 최고의 밥집, 최고의 요정으로 문단의 신인들을 불러내 주곤 했다.
     다섯 시인이 만날 때는 식사와 술을 한 뒤 제 흥에 취한 대로 시낭송을 했다. 초정이 먼저 뽑았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여름산 같은/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이렇게 앞메기 소리로 뽑으면 이어 아천이 뒷소리로 받는다.

    "靑山이 그 무릎 아래 芝蘭을 기르듯/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어드는/오후의 때가 오거든,/내외들이여 그대들도/더러는 앉고/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하고 아천이 숨을 좀 쉬는 동안 초정은,

     "그래 갖고 안되겠다. 더 유장해야 한다니까…… 지어미는 지아비를 물끄러미 우러러 보고/지아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어느 가시덤불 쑥굴헝에 놓일지라도/우리는 늘 玉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인인 것이다."

     하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초정은 서정주의 ‘무등(無等)을 보며’를 암송하고 나서는 "서정주라는 인간은 싫은데 시는 귀신이란 말이야" 하고 덧붙이기를 잘했다. 그때 필자가 "선생님, 이 시는 서정주 초기의 '생명의식의 고양(高揚)'에서 동양적 느슨함으로 물러난 것이라는 평이 있는데요."하면 "동양이고 생명이고가 중요한 게 아니야. 시인은 시로써 말하는 것이야. 이 시는 한 편의 흐르는 시야. 아무도 말릴 수 없는 흐름, 그 흐름을 타고 있다는 것이지…"하고 일러 주었다.
     필자에게는 대가들이 불러 준 자리만에도 행복인데 은사이신 미당의 시에 심취한 자리라는 점이 너무나 큰 행복이었다. 김석규 시인은 청마 선생의 시로 관심이 넘어갔으면 하는 눈치였는데 좌장인 초정은 청마의 '청'자도 끄집어 내지 않았다. 이때 우리들의 시연(詩宴)에는 인간문화재 성계옥 이사장도 더러 동석했다. 아천과 초정이 성이사장의 춤과 교양을 관심 깊게 보고 있었던 때였다. 성이사장은 미당의 <무등을 보며>가 낭송되는 동안 어깨로 춤사위를 지펴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필자는 그때 이후 그분의 눈길에서 '팔검무'나 '의암별제'가 농축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이 무렵 초정은 필자의 제2시집 '풍경보風景譜'를 늘 좋게 평가했다. 오자회동(五者會同) 때 "강선생, 강선생 시 <논개사당의 단청>을 진주에서 아는 사람이 있나? 있다면 좋고…"라 말하면 아천은 "그 말씀이 좀 섭섭하네. 우리 식구의 시는 안 챙기시고…"하곤 했다. 초정은 "시집이 나오면 챙기지"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초정이 챙겼던 시는 다음과 같다.

  천길 벼랑에 백일홍
    가락지 모양으로 피다
    피는 네 모양의
    가락지 하나로 山
    가락지 하나로 노을
    가락지 하나로 바위
    가락지 하나로 또
    하늘을 갈아 끼다
    손가락 열이 열 번을
    바꾸어 갈아끼자 백일홍 꽃빛
    丹靑이 되어 들보의
    몇 군데 그려져 남다

 ㅡ강희근의 ‘論介祠堂의 丹靑’전문

     1970년대 중반쯤이던가, 한국 문인협회에서는 기금 조성의 일환으로 전국 문인 서화·시화전을 순회 전시했다. 진주에서 열릴 때는 상임이사 김윤성, 사무국장 오학영이 상주하면서 지방 유지들과 접촉했다. 그때 필자는 판매 선도를 위해 소설가 오영수의 글씨 한 폭을 샀다. 그 무렵 리명길, 최용호 시인 등이 백방으로 노력하여 성과가 좋았다. 한국 문협 사무국장 오학영은 "모든 지부들이 이 정도만 협조해 주면…"하고 진주 전시의 성과에 감격해 마지 않았다.
     그 어우름에 초정의 서화전이 시내 모 다방에서 개최되었다. 초정의 글씨도 이미 정평이 나 있었고 그림 또한 독특한 개성으로 주목을 받고 있었다. 초정을 일러 현대의 시(詩)·서(書)·화(畵) 삼절이라 일컫는 사람도 있었다. 이 전시는 물론 아천(我川) 최재호의 책임 아래 열리고 있었던 것이리라. 물증은 없지만 심증(心證)으로는 확실했다. '책임 아래'란 작품이 다 팔리지 않으면 책임 진 사람이 다 사들인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필자는 세 종류의 가격대 중에서 제일로 싼 것 한 작품을 샀다. 그림인데 동화풍의 단순한 그림이었다. 노란 색깔 바탕에 성냥갑 같은 작은 집이 그려져 있는 것이었다. 당시 초정의 그림들은 백자를 그린 것이 많았다. 백자를 그려 놓고 그 속에 그림이 백자 밖으로 툭 삐어져 나가 있는 것인데, 상상을 하게 하는 회화였다. 필자는 일금 20만원을 신권으로 정성을 들여 봉투에 넣고 초정에게 드렸다. 그때 초정은 "날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한다는 말이 아니라 월급의 한 부분을 싹둑 잘라 그것을 정표로 내놓는다는 일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야"하고 고마와 했다.
    당시에 묵고 있던 여관에서 초정은 필자에게 글씨 한 폭을 써 주었다. <공산무인수류화개(空山無人水流花開)>라는 글귀였다. 낙관 준비도 없이 썼던 글씨라 좀 뒤에 진주에 오는 길에 작품을 갖고 나오라 하여 들고 나갔더니 붉은 색 먹을 찍은 붓으로 그림 그리듯 낙관을 그려 주었다. 그것도 하나의 멋으로 보였다.
    초정이 진주를 방문하던 말기쯤에 시조시인 김정희의 새 시조집에 주목을 하고 시대·역사에 대한 폭넓은 수용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 영향으로 김정희는 <망울동 백일홍>같은 작품을 쓰게 되었다. 이 무렵 초정은 산청 덕산 출신 여류시인 허윤정의 초청을 받아 덕산 가는 걸음에 진주를 한 번씩 들리기도 했다.
    그런 어떤 걸음이었을 것이다. 저녁을 진주시내 식당에서 먹고 난 뒤 필자가 초정에게 진주의 시조시인 이영성이 <이름 모를 꽃>이라는 시조집을 내고 오늘 저녁 7시에 한 예식장에서 출판기념회를 여는데 후배를 위해 한 걸음 해주십사 요청했다. 거절하지 않았다. 식장을 들어서는데 식장에는 하객들로 가득찼다. 주최측에서는 이 돌발적인 사태에 전전긍긍이었다. 공식 초청해도 좀체 허락해 주지 않을 것 같은 대가가 불시에 참석해 주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웅성거렸다.
    초정은 격려사 순서 맨 앞에 호명되어 단 위에 섰다. "에, 오늘 뜻하지 않게도 이영성 시인의 시집 출판기념회에 참석하게 되어 모든 분들 반갑습니다. 에…"하더니 별로 할 말을 찾지 못하자 "에… 진주에 강희근 시인이 있습니다…"하고 이어나갔다. 그때 전광석화와 같은 도전적 음성이 장내를 흔들었다. "개인 PR 하지 마시요, 하지 마시요"하는 F씨의 고함이 기념회를 잡고 흔든 것이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기습을 당한 초정은 노대가답게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개인 PR하면 안되는 거죠. 말을 다 들어보시면… 에, 그런데 어떤 모임이든 저런 목소리를 듣는 것이 좋아요. 의외의, 큰 소리의, 질타같은 것이…"
    - 강희근(경상대 교수)[경남일보](2007. 7. 9∼10. 1) -

             2. 부인 세상 뜨자 식음 전폐, 장례식 이틀만에 숨져 - 연합뉴스(2004. 10. 31)

    원로 시조시인 김상옥(金相沃)씨가 31일 오후 6시 20분께 서울 안암동 고려대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4세.
    경남 통영 출신인 고인은 1938년 동인지 [맥]에 <모래알> 등을 발표하고 [문장]지에 <봉선화>를 추천받았으며, 194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낙엽>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동향의 예술가인 청마 유치환, 작곡가 윤이상 등과 가까웠던 그는 일제시대에 항일운동에 가담했다가 몇 차례 투옥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경남여고 등에서 교원생활을 했으며 그림, 서예, 전각 등에 뛰어나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그는 시조집 <초적>(1947) <목석의 노래'>1956) <삼행시>(1973) <묵을 갈면서>( 1979), 산문집 <시와 도자기>(1976)를 통해 민족의 얼이 깃든 문화유산, 영원한 생명에 관한 탐구정신을 보여줬다. 고인은 지난 26일 부인 김정자(金貞子) 여사가 먼저 세상을 뜨자 식음을 전폐했으며 부인의 장례식이 끝난 지 이틀만에 이승을 떠났다.

         3. 아내 따라 6일만에 세상 버린 어느 시인의 비가(悲歌)> - 연합뉴스(2004. 10. 31)
    원로 시조시인 김상옥 씨가 60여년간 해로했던 부인을 잃자 식음을 전폐하고 지내다가 엿새만인 31일 오후 세상을 떠났다. 노시인은 부부의 깊고 애틋한 정을 시작품과 함께 세상에 남기고 떠난 것이다.
    김 시인은 15년 전 화랑에 그림을 보러 갔다가 넘어져 다리를 다친 뒤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했다. 이후 지난 26일 81세로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 김정자 여사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아왔다.
    큰딸 훈정 씨는 "아버지의 병수발을 하던 어머니가 보름 전에 허리를 가볍게 다쳐 병원에 입원했는데,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다친 곳이 아니라 다른 곳의 뼈들이 이미 여러 곳 부러진 상태였다"면서 "어머니는 자신의 몸이 부서진 것도 모르고 그야 말로 '분골쇄신'하며 아버지를 수발하다가 세상을 먼저 떠났다"고 말했다.
    훈정 씨는 "아버지는 어머니 없으면 살 수 없는 분"이라며 "이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어머니가 입원한 지 한참 지난 24일에야 아버지와 함께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병문안을 갔다"고 밝혔다.
    병원에 누워 있는 아내를 바라보며 김 시인은 "자네를 전생에서 본 것 같네. 우리의 이생은 다 끝났나 보네"라며 죽음을 예감한 말을 했다고 큰딸은 전했다.
    면회 후 이틀만에 부인이 세상을 떠났지만, 김 시인은 그 사실을 모르고 지냈다. 충격을 받을까봐 자식들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훈정 씨는 "사후 이틀만에 아버지께 사실을 알렸는데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면서 "하지만 아버지는 '이제부터 나에게 밥을 권하지 마라'며 식음을 전폐했다"고 전했다. 김 시인은 이날 큰딸에게 '어머니 은혜'를 부르라고 시키는가 하면, 밤새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지난 30일 판교 공원묘지에 묻힌 아내의 묘지에 다녀온 김 시인은 거주하고 있던 종암동의 둘째 딸집에 도착하자마자 거실에서 쓰러져 인근 고려대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가족들은 전했다. 뇌사상태에 빠져 있던 노 시인은 이튿날인 31일 오후 6시 20분께 산소호흡기를 제거함으로써 60여년간 떨어져 살아본 적이 없던 아내 곁으로 따라 갔다. 훈정 씨는 "아버지는 다리가 불편한 것 외에는 건강해 오래 살 줄 알았는데 어머니를 잃은 슬픔이 너무 깊어 일찍 돌아가셨다"면서 "아버지가 평소 좋아했던 조선 백자 등 골동품을 정리하는 일을 도우며 미술관을 함께 열 계획이었는데 생전에 꿈을 이루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경남 통영 출신으로 일제시대 이후 국내 시단의 대표적 시조시인으로 활동했던 고인은 '봉선화' '백자부' '청자부' 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몇몇 작품은 중고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딸 훈정(58) 훈아(55) 씨와 아들 홍우(53.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씨 등 2녀 1남, 사위 김성익(58) 인하대 초빙교수 등이 있다.

                                          ▲경남 통영 남망산공원 김상옥 시비

                                          ▲부산 연지동 '옥저' 시조비

                                          ▲경남 통영시 항남동 김상옥 생가

                                          ▲경남 통영시 항남동 김상옥거리 표지석

                                          ▲경남 통영시 항남동 김상옥거리


                                                                < 참고문헌>
         1. 틀, "시조시인 김상옥(金相沃)", 재봉틀의 국어방,  2007. 7. 27. 20시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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