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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구님의 밝달나무숲


고조선과 고중국의 경계선 만리장성
 tlstkdrn  | 2020·01·01 19:22 | 조회 : 411
고조선과 고중국의 국경선 만리장성

   고조선은 BC 10세기 燕·晉과 국경 맞대고 교류·갈등하다가 BC 8세기엔 古중국군 격파뒤 산동반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오늘날 국경선의 영향 때문에, 과연 고조선의 영역이 지금의 중국 베이징(北京) 부근에까지 이르렀는지 의문시하는 한국인과 중국인이 다수 있다. 그러나 중국 역사에서 말하면 하(夏)나라(BC 2070∼BC 1600)와 상(商)나라(BC 1600∼BC 1046)까지는 지금의 베이징 부근을 관통해 톈진(天津)에 이르는 큰 강인 영정하(永定河)가 고중국(夏, 商)과 고조선의 국경선이었다. 이 사실은 중국 고문헌 및 출토유물들과 함께 유명한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이를 잘 증명해준다.
   지금 만리장성의 남과 북에서 출토되는, 고고학에서 말하는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가 BC 14세기∼BC 7세기경의 고조선문명 서변문화유적이다. 대체로 노노아호산(努魯兒虎山) 이서로부터 영정하·간하(干河) 양안까지가 동일한 하가점상층문화권이라고 볼 수 있다. 매우 선진한 청동기 문화가 특징이고, 출토품목의 대종은 기마문화와 기마부대의 청동무기·마구·의기가 중심이다. 비파형동검도 대부분 조립식이 아니라 칼에 자루를 붙여 만들고 곡선도 약화시켜서 전투 실용성을 높였다. 고조선 후국별로는 고죽·불령지·불도하·산융(원흉노) 등 당시 고중국족이 말한 호맥·동호·예맥조선(濊貊朝鮮)의 유물이다.
   상(商)은 고죽국(孤竹國)과 마찬가지로 고조선 사람들이 건국한 나라였기 때문에 고조선과 매우 우호적이었고, 상호 교류가 활발했다. 상(商)시대에는 많은 고조선 사람이 영정하를 넘어 남하해서 자치 마을공동체를 만들어 평화적으로 함께 거주했다. 그러나 주(周)가 상(商)을 멸망시킨 후에는 고조선인의 남하에 대한 견제가 본격화됐다.
   만리장성은 연의 진개에 의해 고조선 후국 고죽국이 멸망한 직후 고중국 측(연·진)이 축성한 고조선과 고중국의 국경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른쪽 작은 지도는 중국사회과학원이 그린 지도이다.
   BC 11세기경 후반 고조선 사람들이 계속 서남쪽으로 내려오므로 주(周)는 소공석(召公奭)을 연(燕)에 봉하고, 당숙(唐叔)을 진(晉)에 봉해 이를 막게 했다. 연(燕)은 당시 황하 이남의 소국이었으며, 지금의 베이징 지구는 연(燕)의 영역이 아니라 고죽국의 영역으로서 고조선의 변경지역이었다. 고중국 주(周)나라 후국 연(燕)이 북방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자, 고조선의 서변 후국들은 BC 10세기경부터 주(周)의 후국 연(燕), 진(晉)과 국경을 접하게 됐고, 자연히 교류와 함께 갈등도 일어나게 됐다.
   BC 8세기 말(BC 707년, 동주 환왕(東周 桓王) 13년)에 고중국 사가들이 호맥(胡貊)이라고 기록한 고조선 서변 후국이 연(燕)을 공격해 격파하고 산동반도에 있는 제(齊)를 공격한 일이 있었다. 이때 고조선 후국(산융)의 공격력은 주로 고조선 기마문화의 선진성과 우월성에 의거하고 있었다. 고조선 후국 기병부대의 민첩한 기동성이 연(燕)을 격파하고 순식간에 산동반도의 제(齊)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이때는 고중국 측이 패전해 막대한 공물을 내고 화친을 맺어 간신히 돌려보냈다. 그로부터 43년 후인 BC 664년(동주 혜왕 13년)에 고조선 후국 산융이 또 연과 진을 공격해 들어왔다. 위급해진 연(燕)이 제(齊)에 긴급 구원을 요청했다. 연(燕)이 패망하면 전례에 비춰 제(齊)를 공격할 것이라고 판단한 고중국 패권자 제(齊)의 환공은 재상 관중(管仲)을 대동하고 고중국 제후국들의 수십만 연합군을 편성해 이번에는 북으로부터의 ‘기구’(騎寇: 기마를 한 침략군)를 격퇴하려고 출병하게 됐다. 이때 고중국 연합군의 편성을 보면 주(周)나라의 북변 후국들을 알 수 있다. 그에 대응해서 편성된 고조선의 연합군을 보면 고조선 서변 후국들을 알 수 있다.
   △고조선(후조선) = 고죽(孤竹), 불도하(弗屠何 또는 屠何), 불령지(不令支, 또는 令支), 산융(山戎, 원흉노, 일명 무종(无終), 또는 북융(北戎)
   △고중국(東周) = 제(齊), 조(曺), 허(許), 노(魯), 연(燕), 진(晉: 그 후 한(韓)·위(魏)·조(趙) 3국으로 분화)
   이때 고조선 후국들(고죽·불도하·불령지·산융)과 고중국 후국들(제·조·허·노·연·진)의 지리적 전쟁터를 찾아보면, BC 8세기∼BC 7세기의 고조선과 고중국의 국경선을 대체로 알 수 있게 된다. 전쟁터의 지명은 대부분 영정하 이남 지역들이었다. ‘관자’(管子)에는 환공의 연합군이 고조선 연합군을 물리쳤다고는 기록돼 있으나, 반년 이상 걸린 이 전쟁에서 환공이 큰 승전은 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고조선 연합군은 모두가 기병(騎兵)부대였는데 비해, 고중국 연합군은 주력이 보병(步兵)부대였기 때문이었다.
   이 전쟁에서 제(齊)나라 환공의 목표는 산융 등 ‘동북이’를 영정하 이북으로 밀어내는 것이었다. BC 664년 제(齊)나라 환공의 연합군 원정 이후의 상태를 보면, BC 4세기까지 고죽·불도하·불령지·산융의 이동은 없고 연(燕)의 이동도 없는 것으로 보아, 제(齊)나라 관중의 연합군은 산융·불도하·불령지·고죽을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연(燕)나라를 그 자리에 존속하도록 보호해 주고 돌아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도)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고조선 전성기의 고중국과의 경계선은 고조선 서변 후국들인 고죽, 불도하, 불령지, 산융(무종) 등이 고중국의 후국 연(燕)나라와 동으로는 영정하, 북으로는 간하를 경계로 국경을 접해서 연(燕)나라를 대체적으로 동·북·서방에서 둘러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齊)나라의 출병과 귀환 후의 고조선과 고중국의 변경 양상을 보면, BC 7세기 후반부터 BC 4세기 말까지에도 이 국경선은 변동이 없고, 고조선 후국 동호와 고죽 등이 연(燕)을 압박해 연(燕)은 존망의 위기가 계속됐다. 신채호 선생에 의하면(‘조선상고문화사’), 이때 고조선 측(동호와 고죽)이 연(燕)보다 군세가 우세하고 군제가 발달해 연(燕)을 공격했으면 고조선의 승리가 확실했다. 그러나 동호의 대신 예(禮)가 개전(開戰)을 극력 반대하고 화친을 추구하므로 그의 주장이 채택됐다. 이에 긴장과 공포 속에 있던 연(燕)은 환영해 동호에 진개(秦開)를 인질로 보내어 화친을 약속했다. 동호(고조선 후국)의 왕은 진개를 매우 신임했으므로, 진개는 수십 년간 동호의 군사시설과 군사무기, 군사기술을 관찰하고 습득하게 됐다.
    연(燕)의 진개는 수십 년간 동호를 거울같이 잘 알게 된 후 탈출해서 연(燕)에 귀환해 군사령관이 됐다. 진개는 고조선의 철기문화와 철제병기를 수입해서 무기를 고조선식으로 개혁하고, 기마부대를 편성해서 징병제를 실시해 강군으로 훈련시킨 후, BC 3세기 초엽에 동호를 기습했다. 진개는 동호의 강점과 약점을 잘 알고 탈출해 본국에 돌아가서 치밀한 전쟁 준비를 한 후에 동호를 기습한 것이므로, 결국 동호는 대패하고 연(燕)의 진개가 크게 승리해 동호의 많은 영토를 빼앗게 됐다.
    진개가 승리한 후 연(燕)이 행정구역을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의 5군(郡)으로 편성했는데, 이때 연·진 당시에는 지금의 난하(롼허강)를 ‘요수(遼水)’라고 호칭했다. 그러므로 연(燕)이 이때 말한 요동·요서는 난하(당시의 요수)의 동쪽과 서쪽 양안을 가리킨 것이었다. 중국 고대사에서 요하, 요수는 중국의 동북 국경지대 ‘멀리 있는 강’의 호칭이어서 여러 차례 변동했다. 신채호 선생이 잘 밝힌 바와 같이 진(秦)나라 때까지는 요하가 지금의 난하였다.(‘조선상고문화사’) 그 후 고중국의 영역과 인식이 동북쪽으로 이동·확대됨에 따라 대능하(大凌河)를 요하로 불렀다가, 한(漢)나라 이후에야 지금의 요하를 요하로 호칭하기 시작했다.
   요컨대 연(燕)의 장수 진개의 공격 때 BC 3세기 초엽에 이르러서 요동·요서(난하의 동·서)에 걸쳐 있던 고죽국·불도하·불령지는 패퇴했으며, 고조선은 서변 1000여 리의 영토를 상실한 것이었다. 고조선은 BC 3세기에 이르러 연(燕)의 장수 진개의 공격과 뒤이은 진시황의 만리장성 수축으로 이전의 영정하·간하 계선에서 후퇴해 이 단계에서는 만리장성을 고조선과 고중국의 국경선으로 삼게 됐다.
   BC 3세기 초, 연(燕)이 고조선 후국 동호를 공격해 고조선 영토 1000리∼2000리를 빼앗은 전성기 이후, 연(燕)은 중국의 전국시대(BC 403∼BC 221) 이른바 ‘전국7웅’(戰國七雄)의 하나가 됐다. 연(燕), 제(齊), 한(韓), 위(魏), 조(趙), 초(楚), 진(秦)의 7국은 패권을 장악하려고 치열한 쟁투를 벌이게 됐다. 이 가운데서 진(秦)이 가장 강성해 한·위·조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마침내 BC 222년에는 연(燕)도 멸망시켰다.
    진의 왕 정(政)은 열국을 통일하자 BC 221년에 황제를 자칭해 ‘시황제’(始皇帝)라고 불렀다. 진시황은 통일을 성취하자마자 기존 열국의 성들을 연결해 이른바 만리장성의 수축을 시작했다. 그 가운데서 고조선과 접경한 나라가 연(燕)나라였으므로 만리장성은 연(燕)의 장성을 동북 방면의 한계로 했다. 즉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연·진과 고조선의 경계선으로 된 것이었다.
    만리장성의 역사를 3기로 나누어 본 신채호 선생의 연구를 요약해 보면 그 실상을 정확히 알 수 있다. 첫째는 진시황 이전의 연(燕) 장성이다. ‘사기’에 “연(燕)이 흉노를 막으려고 장성을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 쌓았고, 그 안에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 군(郡)을 두었다”고 했는데, 이것이 진시황 이전의 연(燕)의 장성이다. 둘째는 진시황의 장성이니, 진시황은 연(燕)의 장성을 그대로 활용한 위에 북방과 경계를 이뤘던 한·위·조(본래 진(晉)에서 분화)의 성곽을 북서변으로 연결했다. 이것이 진시황의 이른바 만리장성이다. 셋째는 진시황 이후의 장성인데, 오늘날 남아 있는 만리장성은 명(明)나라 때 서달(徐達)이 진시황의 장성을 그대로 보수해 축성한 것이다. 신채호 선생에 의하면 연(燕)의 장성이나 진시황의 장성이나 또는 명의 장성이나 모두 그 동남쪽 끝은 난하 유역의 구 영평부(永平府) 안에 있었고, 지금의 난하 하류 동쪽 갈석산(碣石山) 부근에서 끝나는 것이다. 이것을 통칭해 만리장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만리장성은 연(燕)의 진개(秦開)에 의해 고조선 후국 고죽국이 멸망한 직후의 고중국 측(연·진)이 축성한 고조선과 고중국(연·진)의 국경선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중국사회과학원이 그린 지도 위에 그려보면 위의 작은 사진과 같다. 고중국(연·진)의 입장에서 보면, 만리장성은 고조선 후국들(산융·동호 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연(燕)과 진(秦)이 축성한 방어선이었다. 고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만리장성은 그 이전 영정하까지 남하 진출했다가 BC 3세기 초엽에 연(燕)에 기습당해 패전해 고죽국 등 1000여 리를 잃고 후퇴했다가, 진의 만리장성 수축으로 회복하지 못하게 경계선이 축성된 고조선의 서변 ‘국경선’이었다.
    필자는 즉 만리장성은 고중국 측(연·진)이 축성한 BC 3세기경의 고조선과 고중국의 마지막 단계의 국경선이었다고 보고 있다. 왜 고중국(연·진)은 만리장성을 축성했으며, 왜 고조선(동호·산융)은 잃어버린 만리장성 이남의 영토를 회복하지 못했을까? 고조선의 후국 동호와 산융(원흉노) 등의 질풍노도 같은 막강한 기병(騎兵)부대가 만리장성을 넘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리장성은 고조선 후국들 가운데 유목기마민족(遊牧騎馬民族)의 막강한 기병부대의 남하를 막기 위한 길고 높은 성벽이었다. 보병부대는 만리장성을 기어서 넘을 수 있었으나, 인간의 손이 성문을 열어주지 않는 한, 손이 없는 말은 만리장성을 넘을 수 없었다.
   오늘날 중국의 일부 소위 ‘동북공정’ 추진 인사들이 고조선과 고중국의 국경선 만리장성의 시원을 역사적 진실 그대로 난하(당시 호칭 요수) 동쪽 강안 갈석(碣石)에서 구하지 않고, 지금의 요령(遼寧)성 요하의 동쪽 압록강 대안 단동(丹東)에서 구하는 것은 완전히 허위다. 일부 ‘동북공정’ 인사가 단동의 고구려 성인 호산산성(虎山山城)을 중국식으로 개수해 ‘장성(長城)의 시원(始原)(만리장성의 시작)’이라고 새겨넣은 것을 답사갔다가 목격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 왜곡 날조이며,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2300년 전 고조선과 고중국의 국경선인 난하 하류 갈석산 아래에서 시작하는 만리장성이 고조선 유민을 포함한 연·진 사람들의 가혹한 부역 노동으로 쌓아놓은 역사 유물로 달에서도 보이도록 길게 우뚝 서 있기 때문이다.
                                                              ■ 용어설명
   진개(秦開) : 중국 전국시대 연(燕)나라의 장군이다. 진개는 본래 호(胡·북방 이민족)에 인질로 보내져서 그곳 사람들에게 신임을 얻었다. 이후 연나라로 돌아가 군대를 거느리고 동호(東胡)를 습격해 패주시켰다. 진개의 정확한 활동 시기는 알기 어렵다. 다만 ‘사기’ 흉노열전에서는 진개가 조 무령왕이 운중(雲中)·안문(雁門)·대(代) 등의 3군을 설치한 후에 활동했다고 쓰여 있다. 이는 대략 무령왕이 재위 26년(BC 300년)에 운중을 차지한 이후이다. 그의 손자 진무양(秦舞陽)의 활동 시기가 BC 227년인 것으로 미뤄 볼 때 대략 BC 3세기 초에 활동한 것으로 짐작된다.
                                                             <참고문헌>
   1. 신용하, "고조선과 古중국 경계선 이어서 쌓은 것이 만리장성이었다", 문화일보, 2019.12.31일자.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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