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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구님의 밝달나무숲


발해 ‘십자가’ 유물은 개방과 공존의 상징
 tlstkdrn  | 2020·01·17 13:49 | 조회 : 491
발해 ‘십자가’ 유물은 개방과 공존의 상징

   우리에게 기독교는 근대 이후 서양을 통해 들어온 대표적인 종교다. 하지만 최초의 기독교는 그보다 훨씬 이른 1500년 전에 서유럽을 거치지 않고 실크로드를 따라 동아시아로 들어왔고, 당나라와 몽골 제국에서도 널리 유행했다. 그리고 그 일파는 발해에도 도달한 흔적이 최근 고고학적 자료로 확인되었다. 그들은 초기 기독교에서 억울하게 이단으로 규정받았던 네스토리우스파였다. 그들은 실크로드에서 교역을 주로 담당하며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유라시아 대륙을 넘었고, 동아시아의 여러 문화와 자연스럽게 동화되었다. 종교가 반목과 갈등의 상징이 되고 있는 지금, 동아시아 변방에서 번성했던 초기 기독교의 흔적 위에서 종교가 주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본다.
   발해 고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소련의 고고학자 샵쿠노프(1930~2001)는 1960년에 우수리스크 근처 고려인 마을이었던 ‘차피고우’ 일대에서 발해 유적을 조사했다. 그가 선택한 발굴지는 아브리코스라고 불리는 언덕 위의 발해 절터였다. 끊임없이 나오는 기왓장 사이에서 자그마한 진흙 조각을 발견했다. 그냥 흙덩이로 착각할 만한 진흙 조각을 자세히 살펴보니 십자가였다. 그것도 보통 십자가가 아닌 끝으로 갈수록 벌어지는 특이한 형태였다. 바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발해로 유입된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의 십자가였다. 흔히 ‘시리아식 십자가’라고도 하는, 끝이 넓어지는 십자가는 주로 아시아 기독교도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네스토리우스교를 대표한다. 샵쿠노프의 놀라운 발견은 1968년에 발간된 그의 박사 논문을 통해서 처음 소련 학계에서 공개되었다. 하지만 냉전의 시대에 그의 발견은 널리 주목받지 못했다. 다만 최근 발해 유적에서 다양한 실크로드의 흔적이 확인되며 재조명받고 있다.
   한문으로 ‘경교’(景敎)라고도 불리는 네스토리우스교는 네스토리우스(368~450)라는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이름을 딴 것이다. 그의 사상은 431년 제1차 에베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이후 서방의 기독교에서는 배척되었다. 하지만 그의 교리가 원인이 아니었다. 학식과 외모로 주변을 모두 압도했던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시기심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의 반대파들은 네스토리우스 무리의 도착이 풍랑으로 지연되는 틈을 타서 일방적으로 공회를 열어 이단으로 규정했다.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네스토리우스는 이집트에서 한 많은 여생을 마쳤다. 그의 추종자들은 뜻을 굽히지 않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동방으로 대거 이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활발하게 이어진 실크로드를 따라서 네스토리우스교 신자들은 페르시아를 거쳐 아르메니아와 인도, 중앙아시아로 퍼졌고, 당나라까지 이르렀다.
   중국에서는 이미 서기 6세기께부터 경교 신도들이 있었다. 그리고 실크로드가 번성한 당나라가 들어서면서 마니교,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 등과 함께 공인되었다. 서기 635년에 페르시아의 시리아 교회에서 파견한 알로펜(阿羅本)이라는 교주가 당나라에서 포교활동을 공식적으로 시작했으며, 이후 당나라의 13도 358주에 경교 사원을 세웠으니, 지방마다 그들의 사원이 하나씩 있었던 셈이다. 자신들의 종교를 공인받은 경교 신도들은 당나라 전성기인 781년에 시안(서안)에 경교 사원인 대진사(大秦寺)를 건립하고 ‘대진경교유행중국비’라는 기념비를 세웠다. 지금도 시안의 비림(碑林)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 비석은 높이가 3m에 가까운 거대한 크기에 한문과 시리아 문자가 새겨져 있다. 대륙을 건너서 드디어 종교의 자유를 찾은 그들의 감격이 시대를 넘어서 지금도 전해지는 듯하다. 이 비석은 천년 가까이 지난 뒤에 그들을 이단으로 규정했던 가톨릭 선교사들이 재발견하면서 다시 세계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19세기 말에 카자흐스탄에서 활동하던 제정러시아의 고고학자 판투소프는 네스토리우스 교인들의 공동묘지를 발견했고, 이후 그들이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를 오가며 상업을 하면서 살아왔던 무리였음이 밝혀졌다. 네스토리우스 교인들은 무슬림과 불교도들의 탄압으로 자신들의 교회나 벽화를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무덤과 일상에서 사용하던 도기에 자신들만의 십자가를 남겼고, 땅속에 숨어 있던 그들의 흔적을 고고학자들이 찾아낸 것이다.
   당나라의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은 845년에 발생한 무종의 회창폐불(會昌廢佛) 사건과, 이어서 일어난 황소의 난(878년) 사이에 큰 피해를 보았다. 이때를 기점으로 실크로드에서 유입된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경교 등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고, 알려진 것만 수만명이 살해당했다. 이 사건으로 경교 신도들은 중국 본토에서 자취를 감추고 중앙아시아와 몽골 초원 지역으로 피신했다. 그중에서 몽골 지역으로 흘러들어간 경교는 몽골 제국에서 다시 화려하게 등장했다. 몽골 제국에서 경교를 믿는 사람들은 옹구트족(Ongud)이라고 불렸다. 홍산문화 유적이 많기로 유명한 내몽골 웡뉴터치(翁牛特旗) 지역이 바로 경교를 믿는 옹구트족의 이름에서 기원했다. 또한 몽골 제국의 4대 황제인 몽케와 5대 황제인 쿠빌라이 칸의 어머니인 소르칵타니 베키 역시 네스토리우스교도였다.
   경교가 당나라에서 탄압받던 시기에 한반도 일대에서는 발해와 통일신라가 번성하며 사방과 교역하던 시기였다. 당시 발해는 몽골의 위구르 제국, 중앙아시아의 소그드 상인들이 살면서 많은 교역활동을 하던 때였다. 경교를 믿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소그드인들이었다. 소그드 상인들은 발해에서도 활동했으니, 그들의 일파와 함께 경교가 흘러들어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발해 아브리코스 유적은 불교 사원이고, 유물도 자그마한 진흙으로 만든 십자가에 불과하다. 이 십자가 말고도 중국 훈춘에서 경교의 흔적이 발견된 바 있다. 발해 시기의 불상 장식에서 십자가가 발견된 적도 있다. 그래도 경교의 흔적이라고 보기엔 많이 미약해 보인다. 그런데 당시 경교인들의 풍습을 보면 이런 상황은 이해된다. 경교인들은 수백년간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성상을 만들지 않았고, 자그마한 십자가만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동아시아에 토착화해서 유교와 불교의 풍습을 널리 받아들이면서 별도의 사원을 세우지 않고 불교나 유교 사원처럼 자신들의 사원을 꾸몄다. 둔황(돈황)이나 신장(신강)에서 발견된 경교 예수상도 불화의 한 장면에 십자가를 새겨넣은 것처럼 보인다. 경교인의 무덤에도 돌로 만든 십자가를 새겨넣었을 뿐이었다. 경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해뿐 아니라 통일신라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불국사 출토의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상이다. 하지만 불국사 출토품은 경교 십자가의 형태와 많이 다르며 경교 신도들은 성모상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논란이다.
   통일신라와 경교의 관련성은 고고학 유물보다는 이희수 한양대 교수가 발굴하여 소개한 페르시아의 고대 서사시인 쿠시나메에 그 힌트가 있다. 쿠시나메 이야기는 7세기 후반에 사산조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자인 아비틴이 중국을 거쳐서 신라로 와서 타이후르라 불리는 여자와 결혼을 하고 활동한 이야기이다. 물론 이야기로 윤색된 것이긴 해도 이 이야기는 회창폐불과 황소의 난과 같은 당나라의 탄압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국제적으로 번성했던 통일신라였으니 당나라의 탄압을 피한 사람들을 통해서 통일신라에도 경교가 전래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수천년간 탄압받던 경교가 다시 주목받은 계기는 근대 이후 서양의 선교사가 동양으로 들어오면서이다. 기독교 선교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진경교유행중국비를 유럽으로 가져갈 계획을 세웠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기독교는 네스토리우스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박해했던 세력이었다. 오히려 네스토리우스교가 경교로 바뀌어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한 것은 다양한 종교를 인정했던 실크로드의 관용이었다.
    한편, 동양에서는 실크로드를 불교의 전래 경로로만 생각했다.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실크로드 유물을 가져온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는 일본 불교의 기원을 찾기 위해서 조직된 것이었다. 실크로드를 통하여 인도의 불교가 일본으로 직접 들어왔다는 역사적인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이렇듯 동서양의 다양한 나라들은 실크로드를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해석하고자 했다. 하지만 발해의 절터에서 발견된 경교의 십자가는 실크로드가 배타적인 종교의 경로가 아니라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던 종교의 해방구였음을 증명한다. 이단으로 몰려 박해받던 경교가 소수의 선교사 힘으로 중앙아시아와 중국에 널리 퍼질 수 있었던 배경은 적극적으로 현지 문화와 결합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발해의 기독교 흔적은 비록 동아시아의 끝자락에 있는 발해였지만 적극적으로 실크로드를 통하여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였음을 증명한다. 어느덧 우리 주변에서 종교는 배타성과 갈등의 상징이 되고 있다. 자신만의 종교를 고집하기 전에 최초의 기독교가 전해졌던 당시의, 타자에게 개방적이며 공존을 인정했던 발해와 초원의 열린 모습을 되새길 필요가 여기에 있다.
                                                           <참고문헌>
    1. 강인욱, "발해 ‘십자가’ 유물은 개방과 공존의 상징이었다", 한겨레신문, 2020.1.17일자.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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