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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구님의 밝달나무숲


1904년 한일의정서 한 장에 사라진 용산 둔지미 마을
 신상구  | 2022·07·21 02:59 | 조회 : 29
            
                              1904년 한일의정서 한 장에 사라진 용산 둔지미 마을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아파트촌 입구에는 기차 건널목이 있다. 경원선 용산역과 서빙고역 사이에 있는 이 건널목 이름은 ‘돈지방’이다. 돈지방은 조선 후기 이 일대 행정명 ‘둔지방(屯之坊)’이 변형된 명칭이다. 조선시대 이 지역은 ‘둔지방’이었고 현 한강대로 서쪽 지역은 ‘용산방(龍山坊)’이었다. 각각 해당지역 최고봉인 ‘둔지산’과 ‘용산’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1904년 한일의정서에 의거해 둔지방에 주둔한 일본군은 새롭게 형성된 신시가지 전 지역을 ‘용산’이라 불렀고, 그 과정에서 ‘둔지산’은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둔지산기슭에 있던 마을 ‘둔지미’와 그 주민들에 대한 기억도 실종됐다./박종인 기자

   ‘일본군이 서빙고와 둔지미, 이태원 등 12개 동 토지에 말뚝을 박았다. 이미 내부(內部)와 약정이 된 사안이지만 내부는 주민에게 이를 알리지도 않았고 집행 예고도 없었다. 때가 이르러 일본군에 쫓겨난 주민이 각 동별로 수천이니 하루아침에 집도 밭도 없는 신세가 되어 거리에서 통곡을 했다. 파헤쳐진 무덤 또한 백 군데가 넘었다. 하늘을 찌르는 원망으로 만민이 함께 내부에 고발했지만 관리들과 백성 사이 싸움이 벌어져 사무실 유리창이 돌에 깨지고 내부대신 이지용은 뒷문으로 도주했다.’(김윤식, ‘속음청사’ 下, p148, 1905년 8월 19일, 국사편찬위)

   도대체 무슨 일인가. 대한제국 ‘행정자치부’가 제국 영토 그것도 제국 수도 한성 남쪽 12개 동에서 난동한 외국군을 방치하고 이를 고발하는 주민들을 피해 장관이 도망가다니. 바로 러일전쟁 개전 직후 한일 두 제국 사이에 체결된 ‘한일의정서’와 이를 체결한 고종 정권과 이로 인해 날벼락을 맞고 사라져버린 용산 둔지미 마을 이야기다.

                                                   기습적인 ‘중립 선언’
   동아시아를 넘어 근대 세계 강국이 된 일본과 태평양을 향해 동진 정책을 벌이던 러시아는 충돌이 필연적이었다. 그 사이에 낀 대한제국에 살길은 중립 혹은 한쪽에 연합하는 길밖에 없었다. 고종 정권은 중립을 택했다. 1903년 내내 고종은 각국 주재 제국 공사를 통해 ‘러일전쟁이 터지면 대한제국은 중립을 지킨다’는 뜻을 전달하고 지지를 요청했다. 일본과 러시아에 주재하는 공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잠재적 전쟁 당사국인 러일 양국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고종은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하면 본국은 관계하지 않고 중립을 지킨다’고 국내에 공식 선언했다.(1903년 11월 23일 ‘고종실록’)

   그리고 이듬해 1월 21일 중국 지부(芝罘)에서 고종이 보낸 특사가 전시 중립 전보를 각국에 타전했다. 내용은 이러했다. ‘…한국 정부는 황명을 받들어 엄정 중립을 선언한다.’(‘일본외교문서’ 37권1책 332, 박희호, ‘대한제국의 전시국외중립선언시말’, 국사관논총 60집, 국사편찬위, 1994, 재인용) 전쟁에 임박해 대한제국을 병참기지로 이용하려던 일본에는 말 그대로 불의의 한 방이었다. 그런데 전혀 대미지가 없는 주먹이었다. 황제의 선언에 그 어느 국가도 동참하지 않은 것이다.

                                                   외면당한 중립선언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군사력이 중립을 지켜주지 못했다. 그렇게 많은 무기를 수입하고 군사예산을 투입했지만 대한제국은 ‘무기제조창을 설치한 지 20년이 넘었음에도 총알 한 개 주조하지 못했다.’(1904년 3월 1일 ‘승정원일기’) 또 제국 건국 2년 뒤인 1899년부터 1904년까지 6년 동안 군부대신이 25명 바뀌었다.(장영숙, ‘고종의 정권 운영과 민씨척족의 정치적 역할’, 한국학 31권3호, 영신아카데미 한국학연구소, 2008) 그래서 ‘장수는 병사를 모르고 병사는 장수를 모를 정도로’ 군기 또한 전쟁은커녕 중립 유지도 불가능할 정도였다.(1900년 4월 17일 ‘고종실록’)

   이런 상황을 당시 러일전쟁 종군기자 F. 매켄지는 이렇게 묘사했다. “당신들이 자신을 보호하지 않는데 남이 보호해줄 턱이 있는가.”(F. 매켄지, ‘Korea’s fight for freedom’, Fleming H Revell Company, 1920, p78)

   정부 관료들조차 국가 운명을 두고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중립선언을 주장하는 중립파와 일본과 연합하자는 밀약파가 목숨을 걸고 갈등했다. 중립파는 아관파천 이후 친러노선을 걷던 고종과 고종 최측근 이용익이 핵심이었다. 밀약파는 외부대신 이지용과 군부대신 민영철이 주도했다. 이지용은 직접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에게 접근해 ‘운동비’ 1만엔을 수뢰했다. 친러파였던 원수부 회계국총장 이근택도 가세했다. 이들은 하야시에게 “의정서 체결에 목숨을 걸겠다”고 맹세할 정도였으니(‘주한일본공사관기록’ 18권 12.한일의정서 (20)한일밀약체결안 협의진행과정 보고 건, 1904년 1월 19일) 단순한 정책 갈등을 넘어 사욕(私慾)이 국익을 넘은 대표적인 매국노들이라 하겠다.

‘한일의정서’(1904) 제4조. ‘대한제국정부는 일본제국정부 행동에 편의를 제공하고 대일본제국정부는 이를 위해 군사 목적상 필요한 지점을 <마음대로(隨機·수기)> 수용할 수 있다’라고 규정돼 있다. /국사편찬위
‘한일의정서’(1904) 제4조. ‘대한제국정부는 일본제국정부 행동에 편의를 제공하고 대일본제국정부는 이를 위해 군사 목적상 필요한 지점을 <마음대로(隨機·수기)> 수용할 수 있다’라고 규정돼 있다. /국사편찬위
                                            공(公)과 사(私)의 양다리, 고종
   ‘황제 폐하께서 망명자들 때문에 괴로워하시고 계시다 하니 저들을 변경 깊숙한 곳에 보내서 엄중하게 구속해 둘 터이니 명단을 폐하께서 교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1903년 12월 27일 일본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가 주한공사 하야시에게 보낸 전문이다. 고무라는 “이런 내용을 황제에게 알려달라”고 주문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필요하다면 상당한 금액을 증여하는 것도 무방하므로 이유와 금액을 알려달라.”(‘주한일본공사관기록’ 18권 12.한일의정서 (2) 한국망명자 처리에 관한 건)

   본질적인 원인은 황제 자신이었다. 고종은 1895년 민비 암살 사건 직후 아관으로 파천한 이래 민비 암살 복수에 집착해 있었다. 일본은 바로 이 심리를 이용해 일본에 망명해 있던 암살범들 처리를 미끼로 던진 것이다. 다음 날 공사 하야시는 “망명자 처리에도 고종이 요지부동이면 경성에서 무력시위를 해달라”고 고무라에게 주문했다.(위 같은 책 (4) 한국조정 회유책에 관한 품신 건)

   고종은 즉시 ‘일본법으로 망명자 엄중 처벌’ ‘대한제국 황실 안전과 독립’ ‘대한국 영토 특히 수도 한성의 안전 보장’을 조건으로 외부대신 이지용에게 의정서 협상 개시를 명했다. 그리고 암살범 우범선을 죽인 고영근에 대한 관용 또한 요구했다.(위 같은 책 (5)한국인망명자 처분 교섭에 대한 칙지) 이듬해 1월 4일 고영근이 특사로 풀려나자 고종은 이지용을 통해 암살집단 27명 명단을 일본에 통보하고 이 가운데 주범인 이두황과 권동진은 국내 송환을 요청했다. 이틀 뒤 하야시는 이지용과 민영철, 이근택에게 1만엔을 뇌물로 제공했다.

   1월 18일 의정서 초안이 나왔다. ‘망명자에 대한 상당한 제재’가 조항에 삽입됐고 ‘전쟁 수행에 대한 대한제국정부의 충분한 편의 제공’ 조항이 들어갔다. 그런데 다음 날 일본 측은 ‘망명자 조치’ 조항을 본문에서 삭제하고 하야시 공사의 공문(公文)으로 보장하기로 방침을 바꿔버렸다.

   그리고 사흘 뒤인 1월 21일 고종은 ‘황제 본인이 아닌’ ‘외부대신 명의’로 ‘중국에서’ ‘실현 불가능한 중립’을 선언했다. 다시 말해서 고종은 공인(公人)으로서는 중립화안을 고집하면서도 그나마 발표를 외부대신에게 미루고, 사인(私人)으로서는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중립화안과 배치되는 일본 측 밀약 체결에 응한 것이다.(박희호, 앞 논문) 개인적 원한으로 시작한 협상은 주도권을 상실했다. 이어 기습적 중립선언 후 일본군이 하야시가 주문했던 ‘경성 무력시위’를 벌이는 과정에서 고종이 원하던 ‘망명자 처분’ 조항은 삭제돼 버렸다. 대신 ‘대일본제국이 군사상 필요한 지점을 <마음대로((隨機·수기> 수용할 수 있다’는 한층 강화된 조항이 본문에 삽입돼 버렸다. 그 조항 그대로, 1904년 2월 23일 러일전쟁 개전 직후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사이에 한일의정서가 체결됐다.

   닷새 뒤인 2월 28일 고종은 고종 본인과 두 아들인 황태자와 영친왕 이름으로 러일전쟁 군자금 명목으로 일본에 백동화 18만원을 기부했다.(일본 외무성 ‘일본외교문서’ 37권 1책, p273, ‘한국황제 내탕금 아군 군수 지원’) 한 달 뒤인 3월 22일 일본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30만엔이 입금된 제일은행 경성지점 통장을 헌납했다.(‘일본외교문서’ 37권 1책, p297, ‘3월 20일 이토 특파대사 내알현시말’·2022년 7월 19일 본지 <이토 히로부미를 짝사랑한 고종> 참조)

                                                     슬픈 둔지미 마을
   그 한일의정서에 의거해 일본군은 대한제국 각지 1000만평을 마음대로 수용했다. 그 가운데 ‘성저십리(城底十里)’라 불리는 한성 남쪽 ‘둔지방(屯之坊)’이 있다. 지금 개방을 눈앞에 둔 용산공원 부지다. 부지 한가운데에 둔지산이 있다고 해서 이 지역 마을을 ‘둔지미’라 불렀고 행정명은 둔지방이 되었다. 원래 용산(龍山)은 현 마포대교 쪽에 있다. 그쪽 행정구역은 ‘용산방’이었다. 용산 기슭 용산방과 둔지산 기슭 둔지방은 엄연히 다른 공간이었다. 일본군이 신시가지를 형성하면서 둔지방과 용산방은 용산이라는 명칭 하나로 합쳐졌다. 둔지방은 동부이촌동 철길 ‘돈지방건널목’처럼 관습적인 명칭에나 남아 있다.

   용산공원 부지에는 대한제국정부에 외면당하고 일본제국 폭력 속에 고향을 떠난 둔지미 마을 추억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다. 일본군이 직선화한 옛길도 남아 있다. 개울도 남아 있다. 둔지산 기슭에 있었음 직한 무덤가 석물(石物)들도 미군이 보존해 놓았다. 서글프지 않은가. 글로 표현하기 힘든 옛 권력자들에 대한 배신감.

                                                           <참고문헌>
   1. 박종인, "일본은 조선 땅 어디든 군사목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 조선일보, 2022.7.20일자. A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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