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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구님의 밝달나무숲


연극 <관객 모독> 공연 이야기
 신상구  | 2022·07·26 11:41 | 조회 : 28
    
                                                연극 <관객 모독> 공연 이야기

  "이것은 연극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막간 휴식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여러분에게 감동을 주는 어떤 사건도 없습니다. 이것은 연극이 아닙니다, 이것은 '언어극(言語劇)'입니다."

  무대 막이 걷히고 소품 하나 없는 텅 빈 무대로 네 명의 배우가 걸어 들어오며 이렇게 외칩니다. 극이 시작됐지만 객석을 비추는 조명은 꺼지지 않고, 극장 안은 환하기만 해요. 공연이 시작된 걸까, 관객은 어리둥절하기만 한데요. 이 연극에는 우리가 기대하는 어떤 특별한 사건이나 줄거리가 없습니다. 네 배우가 쏟아내는 '언어'만 들릴 뿐이지요.

  관객의 당혹감을 예견한 듯 배우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늘 보았던 것들을 여기서는 보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늘 들었던 것들을 여기서는 듣지 못할 것입니다." 1시간 30분간의 낯선 경험 막바지에 관객에게 돌아오는 것은 욕설입니다.

  '여러분'이 '너희들'로 바뀌더니 역사와 정치·문화를 비난하는 단어들로 확장됩니다. "혐오스러운 어릿광대들아, 가련한 몰골들아, 뻔뻔스러운 작자들아, 멍청하게 서서 구경하는 꼴통들아!"

  이 작품은 바로 2019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페터 한트케(80)의 희곡 '관객모독'입니다. 역사와 정치를 비판하는 기본적인 대본은 있으나, 즉흥극을 선보이는 대목에서 발언은 공연마다 그때그때 바뀝니다. 1966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초연했고, 한국에서는 1978년 극단 76이 첫 무대를 선보인 뒤 꾸준하게 공연되고 있는 작품입니다. 8년 만에 다시 우리나라 무대에 올려진 이번 공연은 오는 10월 10일까지 대학로 아티스탄홀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기성 문학 질서 신랄히 비판

  오스트리아 극작가이자 소설가, 그리고 시인인 한트케는 기성 문학 질서를 신랄하게 비판한 논란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구변극(口辯劇)'이라는 실험적인 연극 형식을 개척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작가인데요. 구변극이란 연극 내의 사건 진행 없이 오직 배우들 욕설·자기 비난·고백·질문·변명 등 말로만 구성된 연극을 의미합니다. 연극 장면을 나누는 막과 장도 없지요.

  한트케의 작품은 우리에게 낯설고도 불친절합니다. 사건과 줄거리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경험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언어를 의미 전달의 도구로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언어를 변형하고 다양화하는 시도를 하며 온갖 언어유희와 말장난을 하지요.

  이 때문에 듣다 보면 언어들이 반복되며 리듬을 만들고, 언어 자체가 마치 오케스트라의 화음을 이루는 듯합니다. 예를 들어 작품 속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릿광대가 아닙니다. 우리는 원형 경기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경기장을 둘러싼 권력자처럼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언어의 희극을 즐기는 것입니다."

  한트케는 줄거리에 집중하면서 서사에 치우치는 기존 문학 작품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연극이 되기 위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

                                             난해함 때문에 연출가들 거절

  이런 한트케의 독창적인 생각은 그가 자신의 첫 소설 '말벌들'(1966)을 출간하고 같은 해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열린 문학 단체 47그룹 모임에 참석하며 세상에 알려집니다. 47그룹이란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독일 패전으로 끝나고, 2년 뒤인 1947년을 기점으로 독일 문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예요.

  이들은 독일 전쟁 범죄 행위에 속죄하는 심정으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쓰겠다'는 결의를 했는데, 그래서 이들 작품을 '신사실주의 문학' '참여문학'이라고도 불러요. 1977년 공식적으로 해체됐지만, 2차 세계대전 후 독일 현대문학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문학 단체로 평가받고 있지요. 47그룹 문학상을 받은 작가로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하인리히 뵐(1917~1985)과 귄터 그라스(1927~2015) 등이 있어요.

  이 자리에 참석한 24세 신출내기 한트케는 기라성 같은 작가들과 비평가들에게 당시 문학 작품이 "무미건조하고 어리석으며 낡은 서술 문학에서 성장한 것"이라는 과격한 비판을 하며 주목을 끕니다. 그리고 4개월 뒤 출간된 관객모독은 수많은 연출가들 거절을 받은 뒤 가까스로 무대에 오르게 되는데요.

  난해함 때문에 흥행에 실패할 것이라는 비평가들 예측을 뒤엎고, 연극은 폭발적인 관객들 반응을 얻습니다. 그의 희곡에는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전쟁광들아, 짐승 같은 인간들아, 공산당 떼거리들아, 나치의 돼지들아." 기존 연극과 다른 형식으로 모든 것을 비판하는 모습에 관객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낀 거예요. 현실을 성찰하는 경험을 하기도 했지요.

  그의 또 다른 언어극 작품으로는 1968년 발표한 '카스파(KASPAR)'가 있습니다. 독일에서 전설처럼 전해지는 10대 소년 카스파 하우저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는 언어를 익히지 못해 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채로 길거리에서 1828년 발견됐다고 합니다. 한트케는 이 작품에서 어느 한 인물이 어떻게 언어를 통해 말을 할 수 있게 되고, 사물을 비교하게 되는지 등을 묘사합니다. 그는 서문에서 자신이 쓴 극을 "'언어 고문'이라 해도 좋다"고 하지요.

  노벨상을 시상하는 스웨덴 한림원 측은 이런 한트케의 작품에 대해 "독창적인 언어로 인간 경험의 섬세하고 소외된 측면을 탐구한 영향력 있는 작품들"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한트케 수상 논란]
  한트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규탄하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그가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 인종 학살을 자행한 전범 정치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1941~2006)를 옹호하며, 2006년에 있었던 밀로셰비치 장례식에 참석해 직접 추도사를 읊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참고문헌>
  1. 최여정 작가/조유미 기자, “줄거리 없이 시종일관 말로 세상을 비판하는 내용이래요”, 조선일보, 2022.7.25일자. A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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