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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기(夫餘紀)
 성미경  | 2005·09·28 16:54 | 조회 : 2,766
<font size=5>2)</font>1)<font size=5>북부여기(北夫餘紀) </font>


1세 단군 해모수(解慕漱)(45년간 재위)

첫해가 임술(BC239)년이다. 23살에 하늘로부터 내려왔는데 이것이 단군 고열가(高列加) 57년 4월 8일이다. 웅심산(熊心山)(1)을 의지하여 일어나 집을 난빈(蘭濱)(2)에 지었다. 새깃으로 만든 관을 쓰고 용광검을 차고 오룡거를 탔다. 데리고 다니는 500명과 더불어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로 돌아가더니 이때에 이르러 왕위에 올랐다.

1) 웅심산 : 요나라 종주(宗州) 석웅산(石熊山-우리말 새개마, 西蓋馬)은 오늘날의 심양시 강평현(康平縣)인데 이곳이 바로 해모수의 웅심산으로 추정된다.
2) 난빈(蘭濱) : 난변(蘭邊)이라고 하는데, 난가점(蘭家店)이 강평에 있다. 즉 강평현을 지나는 물이름이 당시에 난하(蘭河)였다. 강평현 북쪽 대횡도자(大橫都子)가 해모수의 도성으로 추정된다. 발해 안원군 영주(寧州)가 되었다가 금나라 때에는 영안현(榮安縣)이 되었다.
2년 3월 16일에 하늘에 제사지내고 연호법(烟戶法)(3)을 세웠으며 오가의 군사를 나누어 두고 둔전을 작급하게 하여 불시의 근심이 있을 때를 대비하게 하였다.

3) 연호법(烟戶法) : 사람과 집 수를 조사하여 해마다 나라에 보고하는 법.
8년에 임금이 무리를 거느리고 옛 도읍에 가서 깨우치니 오가(五加)가 드디어 공화(共和) 의 정치를 철폐하고 나라 사람들이 추대하여 단군(檀君)을 삼았다.

11년에 북막(北漠)의 추장 산지객륭(山只喀隆)이 영주를 습격하여 순사(巡使) 목원등(穆遠登)을 죽이고 크게 약탈해 갔다.

19년에 비(丕)가 죽고 아들 준(準)이 아버지를 이어 번조선(番朝鮮)왕이 되었다. 연(燕)이 장수 진개(秦介)를 보내어 우리의 서부 변방을 침범하여 만번한(滿番汗)(4)에 이르러 경계를 삼았다.

4) 만번한 : 부신시 하얼투(哈爾套) 서남쪽의 탑영자향(塔營子鄕) 만한영자촌(滿漢營子村)으로 추정된다. 단 만번한은 당시의 이름이 아니라 조금 훗날의 이름인데, 뒤에 위만의 번한성이 되었기 때문에 만번한이다
20년에 명을 내려 백악산 아사달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게 하고 7월에 새 궁궐 366간을 짓고 이름을 천안궁(天安宮)이라 하였다.

22년에 창해(滄海)의 역사 여홍성(黎洪星)이 한인(韓人) 장량(張良)(5)과 더불어 박랑(博浪)(6)의 모래 가운데서 진(秦)왕 정(政)을 저격하다가 잘못하여 부거(副車)(7)를 맞췄다.

5) 장량(張良) : 전한(前漢)때의 공신 소하(簫何)·한신(韓信)과 함께 한의 삼걸(三傑)의 한 사람
6) 박랑(博浪) : 장량(張良)이 역사(力士)에게 진시황(秦始皇)을 저격하게 한곳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양무현(陽武縣) 남쪽에 있다.
7) 부거(副車) : 본인이 타지 않고 여벌로 따라가는 수레.
31년에 진승(陳勝)이 군사를 일으키자 진(秦)나라 사람이 크게 어지러워지니 연(燕)·제(齊)·조(趙)의 백성이 번조선으로 도망 온 자가 수만명이나 되었다. 이들을 상하 운장(雲障)에 나누어 두고 장수를 보내어 감시하게 하였다.

38년에 연의 노관(盧 )(8)이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동쪽의 한계를 패수(浿水)로  하였는데 패수는 지금의 난하( 河)(9)이다

8) 노관(盧 ) : 한(漢)의 풍(豊) 땅사람으로서 고조와 한 마을에 살고 같은 날 낳았다고 하여 매우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뒤에는 흉노로 항복해 들어가 동호로왕(東胡盧王)에 봉해졌다.
9) 난하( 河) : 유수(濡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하북성 임구현 서북쪽에 있다.
45년에 연의 노관(盧 )이 한을 배반하고 흉노(凶奴)로 들어오자 그 무리 위만(衛滿)(10)이 우리에게 도망올 것을 요구했으나 임금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금이 병중에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단안을 내리지 못할 뿐 아니라 번조선왕 기준(箕準)이 많은 기회를 잃으므로 드디어 위만을 받들어 박사(博士)를 삼고 상하 운장(雲障)(11)을 나누어 봉하였다.

이 해 겨울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웅심산 동쪽 기슭에 장사지내고 태자 모수리가 왕위에 올랐다.

10)  위만 : 유방이 죽자 노관은 여황후(呂皇后)의 전횡(유씨 왕, 즉 자기 아들이 아닌 왕은 다 죽여버리는 처사)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흉노에 망명하였다. 이때 노관의 부하인 위만이 번한(后新秋)으로 망명하였고, 번한왕은 위만에게 연나라와의 경계에 살면서 상하 운장(上下 雲章; 閭陽+黃泥崖)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위만은 한나라 군대가 쳐들어온다고 번한왕 기준(箕準)을 속여서 번한성에 입성하였고 번한왕을 내몰았으며 스스로 번한왕이 되었다.
11) 운장(雲章; 閭陽, 盤山 險瀆城) : 위만은 연나라 진개가 쳐들어온 적이 있는 만번한, 즉 요동군 양평성에 위만조선을 세워 만번한(滿番韓)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위만의 번한이라서 만번한이라고 부르게 된 것인데 훗날 <조선열전>을 기록하면서 진개가 쳐들어온 곳도 역시 만번한으로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한나라 때의 요동군 양평성이었고발해의 평양현(平陽縣)이 되었다.


  
2세 단군 모수리(慕漱離)(25년간 재위)

첫해(丁未-BC194)에 번조선(番朝鮮)왕 기준(箕準)이 오랫동안 수유(須臾)에 있으면서 일찍 많은 은혜를 베풀어 백성들이 다 부유하였다. 뒤에 떠돌아 다니던 도적에게 패하여 도망하였는데 바다로 들어가서 돌아오지 않았다(12). 이에 제가(諸加) 무리들이 상장(上將) 탁대(卓大)를 받들어 많은 사람들이 길을 떠나 바로 월지(月支)에 이르러서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곧 탁이 난 고향인데 이것을 중마한(中馬韓)(13)이라 한다.

이에 변(弁)·진(辰) 두 한이 또한 각각 그 무리들이 봉함을 받은 백리 땅을 가지고 도읍을 세우고 스스로 나라 이름을 지었으나 모두 마한(馬韓)의 정령(政令)을 듣고 사용하니 대마다 반(叛)하지 않았다.

2년에 임금이 상장 연타발(延 勃)(14)을 보내어 평양에 성책(15)을 세워 적(賊) 만(滿)에게 대비하게 하였는데 만(滿)도 또한 괴로움에 지쳐 다시는 침략하는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3년에 해성(海城)을 평양도(平壤道)에 소속시키고 임금의 아우 고진(高辰)에게 지키도록 하니 중부여(中夫餘)(16) 한지역이 모두 군량미를 바쳤다.

25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고해사가 왕위에 올랐다.

12) 기원전 146년에 위만(衛滿)이 기준을 배신하고 거짓으로 중국군이 쳐들어 온다고 하여 패수 번한성(沛水番韓城; 彰武市 後新秋)에 입성하여서, 기후의 후손인 번한왕 기준(箕準)을 내몰고 번한왕이 되었고 기준은 황해도로 옮겨가 금마(金馬) 마한에 정착하였다.
13) 월지는 웅백다(熊伯多) 마한 조선의 개국지, 영변의 달지국(達支國)과 같은 곳으로 본다. 우리말 달지가 중국말 월지(月支)로 바뀐 것으로 본다. 따라서 중마한 탁의 월지국은 청천강패수 일대이다.
14) 연타발(延 勃) : 고구려 주몽의 부인이었던 소서노(召西努)의 부친이다.
15) 무순시 고이산성(高爾山城)으로 추정된다. 즉 혼하 강남의 해성보다 강북의 평양책이 전략적으로 주요해진 것이다.
16) 중부여(中夫餘) : 북부여(北夫餘; 今 康平縣)에 비하여 개원시 일대가 중부여(中夫餘)인 것인 바, 단군 구물(丘勿) 이래 대부여(大夫餘)를 중부여라고 말하는 것이다.
  



3세 단군 고해사(高奚斯)(49년간 재위)

첫해(壬申-BC169) 정월에 낙랑(樂浪)왕 최숭(崔崇)이 곡식 300석을 해성에 바쳤다. 이보다 앞서 최숭이 낙랑으로부터 진기한 보물을 산같이 쌓아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馬韓)의 수도 왕검성(王儉城)에 이르렀다(17). 이것이 단군 해모수(解慕漱)의 병오(BC195) 겨울이었다.

42년에 임금이 몸소 보병과 기병 1만명을 거느리고 남려성(南閭城)에서 위적(衛賊)을 쳐서 이기고 거기에 관리를 두었다.

49년에 일군국(一郡國)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이해 9월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고우루가 왕위에 올랐다.

17) 기원전 195년에 낙랑국(樂浪國)의 후예가 해모수에게 패전하여 철령시 낙랑홀 땅에서 마한의 왕검성 주위, 즉 대동강변으로 이주하였다. 최씨 낙랑은 낙랑홀, 즉 철령시 최진보산성에 살다가 해모수(解慕漱) 북부여의 성립에 의해 그 압력으로 마한땅으로 옮겨간 것이다. 철령시의 낙랑인들이 마한에 옮겨가서 상륙한 곳은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부근으로 추정한다.



  
4세 단군 고우루(高于婁) 또는 해우루(解于婁)(34년간 재위)

첫해(辛酉-BC120)에 장수를 보내어 우거(右渠)(18)를 치게 하였으나 이롭지 못하여 고진(高辰)을 발탁하여 서압록(西鴨綠)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병력을 증강하고 성책을 많이 설치하여 우거를 막는데 공이 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高句麗侯)를 삼았다.

3년에 우거(右渠) 적이 크게 쳐들어 왔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해성 이북 50리 땅이 모두 노략질 당하여 그들의 소유가 되었다.

4년에 임금이 장수를 보내어 해성을 쳤으나 석달이 되어도 이기지 못하였다.

6년에 임금이 친히 정예 군사 5천을 거느리고 해성을 쳐서 이기고 추격하여 살수(薩水)(19)에 이르니 구려하(句黎河)(20)로부터 동쪽이 모두 항복하였다.

7년에  좌원(坐原)(21)에 목책을 설치하고 군사를 남려(南閭)에 주둔시켜 불시의 일에 대비하게 하였다.

13년(BC108)에 한(漢)의 유철(劉徹)(22)이 평나(平那)에 쳐들어와 우거(右渠)를 멸하고 이어 이곳에 사군(四郡)(23)을 설치하려 하여 큰 기세로 군사를 내어 사방을 침입하였다. 이에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의를 부르 짖고 군사를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의 도둑을 쳐부수니 남아있는 백성들이 사방에서 호응하여 싸우는 군사를 도와 크게 떨치는 소식을 알려왔다.

34년 10월에 동명왕(東明王) 고두막한(高豆莫汗)(24)이 사람을 시켜 와서 말하기를 "나는 천제이 아들로서 장차 여기에 도읍을 하려고 하니 왕은 이곳을 피하라"하였다. 임금이 이를 곤란하게 여기다가 그 달에 걱정으로 병을 얻어 세상을 뜨니 임금의 아우 해부루가 왕위에 올랐다.

동명왕이 군사를 내어 위협하는 것을 그치지 않으니 군신이 이를 매우 곤란하게 여겼다. 이에 국상(國相) 아란불(阿蘭弗)이 아뢰기를 "통하(通河)(25)가에 가섭원(迦葉原)이 있어 땅이 기름지고 오곡을 키우기에 마땅하오니 도읍할만한 곳입니다."하고 드디어 왕을 권하여 도읍을 옮겼다. 이곳을 가섭원부여(迦葉原夫餘)라 하고 혹은 동부여(東夫餘)라고도 한다.

18) 우거(右渠) : 위만(衛滿)의 손자 우거(右渠)는 북부여를 살수 이북으로 물리치고 요양의 연주산성으로 천도하였으나 한무제에게 토벌당했다.
19) 살수 : 혼하(渾河)를 말한다.
20) 구려하(九黎河) : 오늘날의 수수하(秀水河)이다.
21) 좌원(坐原) : 구려하(句黎河)를 말한다. 오늘날의 수수하(秀水河)를 국경으로 지킨 것이다. 고구려의 좌원(坐原; 今 法庫縣)이 또한 이곳이다. 법고현 주지구(周地溝)가 좌원으로 추정된다.
22) 유철(劉徹) : 한(漢)의 무제(武帝), 경제(經濟)의 아들.
23) 사군(四郡) : 기원전 108년에 설치된 한사군(漢四郡)은 낙랑(樂浪), 임둔(臨屯), 진번군(眞番郡)이고 현도군(玄 郡)은 1년 뒤인 기원전 107년에 설치되었다.
24) 고두막한(高豆莫汗) : 동명왕(東明王)이라고도 하는데,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高朱蒙) 역시 시호가 동명성왕(東明聖王)이나 고구려 시대에는 <광개토왕 비문>에 추모왕(鄒牟王)이라고 기록하였으니 고두막한 동명왕과 구별되는 것이다.
25) 통하 : 오늘날의 이통하(伊通河)이고 가섭원은 우리 고어에서 개사원과 같은 발음으로서 장춘 서북쪽의 부여시 백도눌성 일대를 가리킨다. 가섭원(迦葉原)  금와(金蛙)가 도읍한 땅이름. 원(原)은 벌판이라는 뜻이다.



  
5세 단군 고두막(高豆莫)(22년간 재위, 27년간 재제위)

첫해(癸酉 - BC108)가 단군 고우루(高于婁) 13년이다. 임금의 사람됨이 호걸스럽고 준수하며 용병을 잘 하였다. 일찍이 북부여(北夫餘)가 쇠하고 한(漢)의 도둑이 강성함을 보고 분개하여 세상을 구할 뜻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본(卒本)(26)에서 즉위하여 스스로 동명(東明)이라 하고 혹은 고열가(高列加)의 후손이라고도 하였다.

3년에 임금이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檄文)을 띄웠는데 가는 곳마다 대적하는 자가 없더니 10여일이 못되어 무리가 5000에 이르렀다. 싸울 때마다 한의 도둑이 그대로 무너지니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구려하(句黎河)를 건너 추격하여 요동(遼東)의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곧 옛날 고리국( 離國) 땅이다.

22년은 곧 단군 고우루 34년이다. 임금이 장수를 보내어 배천(裵川)의 한나라 도적을 쳐서 이기고 남아있는 백성들과 힘을 합하여 가는 곳마다 계속하여 한나라 도적을 쳐부수고 그 지키는 장수를 사로잡아 적을 막으며 대비 하였다.

23년에 북부여(北夫餘) 온 성읍이 항복하고 여러번 보전하게 해주기를 애걸하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 해부루(解夫婁)의 직급을 낮추어 후(侯)로 삼고 이를 분릉( 陵)(27)으로 옮게게 하였다. 그리고 임금이 앞에서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무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인도하여 도성으로 들어가니 이를 북부여라 하였다.

가을 8월에 한의 도적과 더불어 여러 번 서압록하(西鴨綠河) 위에서 싸워 크게 이겼다.

30(BC79)년 5월 5일에 고주몽(高朱蒙)이 분릉( 陵)에서 탄생하였다.

49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유명(遺命)에 의하여 졸본(卒本)천에 장사지내고 태자 고무서가 왕위에 올랐다.

26) 졸본(卒本) : 졸본산(卒本山)은 철법시(鐵法市) 효명진(曉明鎭) 조병산(調兵山)으로 추정한다. 졸본(z b n)이 졸병(卒兵)으로 되었다가 조병(調兵) (di o-bing)으로 남은 것이다. 졸본천도 철법시(鐵法市)에서 대요하로 들어가는 물이 된다.
27) 분릉 : 이통하와 송화강이 만난 곳을 이른다. 다시 말하면 분릉수의 가지가 이통하이고 이통하의 가지가 개사수이다.
  



6세 단군 고무서(高無胥)(2년간 재위)

첫 해(壬戌 - BC59)에 임금이 졸본천에서 즉위하였다.

2년에 임금이 순수하다가 영고탑(寧古塔)에 이르러 흰 노루를 얻었다. 겨울 10월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고주몽(高朱蒙)이 유명에 따라 그 뒤를 이어 대통을 계승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이 비상한 사람임을 보고 딸을 그의 아내로 삼았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 자리에 올랐는데 당시의 나이가 23세였다.

그 때에 하부여 사람이 장차 그를 죽이려고 하자, 어머니의 명을 받들어 오이(烏伊)·마리(摩離)·협부(陜父) 등 세람과 더불어 덕과 의로써 사귄 벗이 되어 도망하였다.




<font size=5>2)가섭원부여기(迦葉原夫餘紀)</font>



1세 단군 해부루(解夫婁)(39년간 재위)

첫해(乙未-BC86)에 왕이 북부여(北夫餘)의 통제를 받아 가섭원으로 옮겨가 살았는데 또한 분릉( 陵)이라고도 한다. 오곡을 기르기가 알맞고 또 범, 표범, 곰, 이리가 많아 사냥하기가 편리하였다.

3년에 국상 아란불(阿蘭弗)에게 명을 내려, 진대(賑貸) 제도를 만들고 원근의 유민들을 불러 위로하고 그들이 제 때에 배부르게 먹고 따뜻하게 입도록 하였다.

8년 이보다 앞서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가 나가 놀다가 부여(夫餘) 황손(皇孫) 고모수(高慕漱)의 꾀임을 받아 강제로 끌려가 압록의 가에 있는 방에서 사사로이 정을 통하고 고모수는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그 부모는 그가 중매도 없이 따라간 것을 책망하여 쫓아내어 변실(邊室)에 살게 하였다. 고모수는 본래 이름이 불리지(弗離支) 였는데 고진(高辰)의 손자라고도 한다.

이해 5월 5일에 유화부인이 알 하나를 낳았는데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다. 이를 고주몽(高朱蒙)이라 하였다. 그는 골격과 외양이 영특하고 잘생겼다. 나이 겨우 일곱 살에 스스로 활과 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번 쏘면 백번 다 맞추었다. 부여 말에 활 잘 쏘는 것을 주몽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한다.

10년에 왕이 늙고 아들이 없었다. 어느 날 산천에 제사지내어 뒤를 이를 아들이 있기를 구하였는데 타고 있던 말이 관연에 이르러 큰돌이 서로 마주 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왕이 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렸더니 조그만 아이가 있었는데 금빛 개구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왕은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곧 하늘이 나에게 자식을 준 것이로다"하고 거두어다가 기르니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였다. 그가 자라서 태자가 되었다.

28년에 나라 사람들이 고주몽이 나라에 이롭지 못하다 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 이렇게 되어 고주몽이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들어 동남쪽으로 달아나 엄리대수(淹利大水)를 건너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러 이듬해에 새나라를 열었다. 이 이가 고구려(高句麗)(28)의 시조이다.

39년에 왕이 세상을 뜨니 태자 금와가 왕위에 올랐다.

28) 고주몽이 정신병(조울증 추정; 백제본기 온조 즉위기 염세 기록에 의함) 증상이 있어서인지 졸본부여의 구신(舊臣)들에 의해 퇴위되었다. 구신들에 의하여 고주몽이 강제로 퇴위를 당하고, 그의 아들인 여달왕(閭達王)이 고구려 2대왕, 졸본부여로 치면 고두막한 이후의 4대왕으로 세워졌던 것이다. 고주몽은 졸본부여의 3대왕이다. 당시 여달의 나이는 19세나 20세밖에 되지 않으므로 자력으로 고주몽을 밀어낸 것이 아니라 졸본부여의 구신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것이다.강제로 퇴위된 고주몽(高朱蒙)은 도망쳤든지, 은거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은거지는 다름아닌 비류수(길림성 사평시 쌍료현 동     명(東明)으로 추정되는 곳이다.)이다. 고주몽의 다른 아들들인 비류, 온조 등도 이미 소서노(召西努)를 앞세워 백제로 떠나간      것이다.고주몽의 구려국(句麗國) 재건국 시기가 [삼국사기]에 소개된 기원전 37년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졸본부여의 단군으로     즉위한 것이 기원전 58년이므로 21년을 재위하였다가 물러난 것이다.




2세 단군 금와(金蛙)(41년간 재위)

첫해(甲戌-BC47)에 왕이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어 방물을 받쳤다.

24년에 유화부인이 세상을 떴다. 고구려가 호위하는 군사 수만명을 시켜 졸본으로 돌아가 황태후의 예로 산릉(山陵)에 장사지내고 옆에 사당을 세웠다.

41년에 왕이 세상을 뜨니 태자 대소가 왕위에 올랐다.




3세 대소(帶素)(28년간 재위)

  첫해(乙卯-BC6) 봄 정월에 왕이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어 아들을 볼모로 하여 수교할 것을 청하였다. 고구려의 열제가 태자 도절(都切)을 볼모로 삼으려 하였으나 도절이 가지 않으므로 왕이 이를 노여워하였다.

겨울 10월에 군사 5만을 거느리고 가서 졸본성(卒本城)을 쳤으나 큰 눈이 내려 얼어 죽는 군사가 많으므로 그대로 물러났다.

19년에 왕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학반령(鶴盤嶺) 밑에 이르렀다가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다.

28년 2월에 고구려가 온 나라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오자 왕이 스스로 무리를 거느리고 나가 싸우다가 진창을 만나 왕이 탄 말이 빠져 나오지 못하였다. 고구려의 상장 괴유(怪由)가 앞으로 다가와 이를 죽였다. 그러나 우리 군사는 오히려 굴하지 않고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는데 마침 이레동안이나 짙은 안개가 끼어 고구려의 열제는 밤에 군사를 몰아 포위망을 벗어나 샛길로 도망갔다.

여름 4월에 왕의 아우가 자기를 따르는 자 수백명과 함께 달려가 압록곡(鴨綠谷)에 이르러 해두왕(海頭王)이 나와 사냥하는 것을 보고 이를 죽이고 그 백성을 취해 달아나 갈사수(曷思水)가를 확보하고 나라를 세워 왕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갈사(曷思)(29)이다.

태조무열제(太祖武烈帝) 융무(隆武) 16년 8월에 이르러 도두왕(都頭王)이 고구려가 날로 강해지는 것을 보고 온 나라가 스스로 항복하니 모두 3세로써 47년을 지나 나라가 없어지고 말았다. 도두(都頭)를 명하여 우태(于台)를 삼아 집을 내려주고 혼춘(琿春)을 식읍(食邑)으로 삼고 그를 봉하여 동부여후(東夫餘侯)를 삼았다.

가을 7월에 왕의 종제(從弟)가 옛도읍의 백성 만여 명을 데리고 고구려(高句麗)에 항복하자 고구려가 봉하여 왕을 삼고 연나부(椽那部)(30)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등에 얽힌 무늬가 있다아여 낙(絡)(31)씨로 성을 내렸다.

뒤에 차음 자립하게 되자 개원(開原)(32) 서북 쪽으로부터 이사하여 백낭곡(白狼谷)(33)에 이르니 연(燕)과 가까운 땅이다. 문자열제(文咨烈帝)의 명치(明治) 갑술(甲戌)에 이르러 그나라를 가지고 고구려 연나부(椽那部) 굽히고 들어가니 낙씨들이 드디어 제사 지내지 않았다.

29) 갈사 : 고구려 막힐부의 힐주( 州)였던 길이가랑(吉爾 浪) 부근으로 추정된다. 이 갈사국은 고구려 태조왕에게 항복하고 다시 두만강가 훈춘(琿春)으로 옮겨갔다. 해두왕(海頭王)은 해모수의 후예로 고려되며 해모수가 수도로 삼았던 웅심산이 있는 강평현 북쪽 해주(海州)의 왕으로 추정된다.
30) 연나부(椽那部) : 고구려 오가(五加) 속에 있는 절노부(絶奴部).
31)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 때, 서기 22년에 고구려가 동부여를 쳐서 동부여 대소왕(帶素王)을 죽이자 동부여의 후예는 두 파로 나누어졌다. 그 하나는 갈사국을 건설하고 하나는 낙씨부여이다. 낙씨부여는 본래가 해부루를 따라서 동부여로 가지 않고 강평현 부근에 남아 있던 해모수의 후예로 고려된다.
32) 개원(開原) : 만주 요녕성 도현 남쪽.
33) 백랑곡(白浪谷) : 연국(燕國)의 동쪽에 있었는데 오늘날의 부신시(阜新市)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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