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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기(高句麗紀)
 성미경  | 2005·09·28 17:10 | 조회 : 2,950
<font size=5>고구려기(高句麗紀) </font>


고구려(高句麗)의 선조는 해모수(解慕漱)로부터 나오나니 해모수의 어머니의 고향 역시 그곳이다. 해모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웅심산(熊心山)에서 일찌기 살다가 부여(夫餘)의 옛 서울에서 군대를 일으켜 무리에게 추대되어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니 이를 부여의 시조라고 한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관을 쓰고 용광의 검을 차고 오룡의 수레를 탔다.  단군 해모수가 처음 하늘에서 내려오심은 임술(BC239)4월 초 여드레로서 곧 진시황 정의 8년이다.

고리군( 離郡)의 왕 고진(高辰)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며 옥저후(沃沮候) 불리지(弗離支)(1)는 고진의 손자이다.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한 공을 세워 봉함을 받은 바라. 불리지는 일찌기 서쪽 압록강(鴨綠江)변을 지나다가 하백(河伯)녀 유화(柳花)를 만나 그녀를 맞아 들여 고주몽(高朱蒙)을 낳게 하였다. 때는 곧 임인(BC79) 5월 5일이다. 곧 한(漢)나라왕 불능(弗陵) 원봉(元鳳)2년이다. 그는 골격과 외양이 영특하고 잘생겼다. 나이 겨우 일곱 살에 스스로 활과 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번 쏘면 백번 다 맞추었다. 부여 말에 활 잘 쏘는 것을 주몽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한다.

불리지(弗離支)가 죽으니 유화는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왔으니 지금의 서란(舒蘭)(2)이다. 주몽이 성장하여 사방을 주유하다가 가섭원(迦葉原)을 택하여 거기서 살다가 관가에 뽑혀 말지기로 임명되었다.

가섭원부여(迦葉原夫餘) 단군(檀君) 해부루(解夫婁) 28(BC59)년에 나라 사람들이 고주몽이 나라에 이롭지 못하다 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 이렇게 되어 고주몽이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들어 오이(烏伊)·마리(摩離)·협부(陜父) 등 세람과 더불어 덕과 의로써 사귄 벗이 되어 동남쪽으로 달아나 엄리대수(淹利大水)(3)를 건너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러, 졸본부여(卒本夫餘)(4) 단군 고무서(高無胥) 2(BC58)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고주몽(高朱蒙)이 유명에 따라 그 뒤를 이어 대통을 계승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이 비상한 사람임을 보고 딸을 그의 아내로 삼았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 자리에 올랐는데 당시의 나이가 22세였다. 이 이가 고구려(高句麗)의 시조이다.(5)




1대 동명성왕(東明聖王) - 18년간 재위

1년(BC37) 졸본(卒本) 비류수(沸流水)(6)에서 즉위하여 구려국(句麗國)(7)을 새웠다.

2년 여름 6월 비류국(8)왕 송양(松壤)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해 왔다. 그 땅을 다물군(多勿郡)이라 하   고 송양을 그 곳의 주인으로 봉했다. 고구려의 말에 다시 얻은 옛 땅을 다물이라 했던 까닭이다.

1) 불리지(弗離支) : 가섭원부여(迦葉原夫餘) 1세 단군 해부루(解夫婁)이다.
2) 서란(舒蘭) : 만주 길림성 영길현 북쪽.
3) 엄리대수(淹利大水) : 개사수(蓋斯水), [한단고기]에서는 분릉수( 陵水)라고도 한다. 해부루가 세운 동부여가 통하(通河)의 가섭원(迦葉原) 땅인데 가섭원은 개사원과 같은 "가시"를 어원으로 하는 말이고 현재 지명으로 통하는 이통하(伊通河), 개사수는 신개하(新凱河), 분릉수는 이통하와 송화강이 만난 곳을 이른다. 다시 말하면 분릉수의 가지가 이통하이고 이통하의 가지가 개사수이다.
4) 졸본부여의 위치는 철법시(鐵法市) 조병산(調兵山)이다.
5) 고주몽이 정신병(조울증 추정; 백제본기 온조 즉위기 염세 기록에 의함) 증상이 있어서인지 졸본부여의 구신(舊臣)들에 의해 퇴위되었다. 구신들에 의하여 고주몽이 강제로 퇴위를 당하고, 그의 아들인 여달왕(閭達王)이 고구려 2대왕, 졸본부여로 치면 고두막한 이후의 4대왕으로 세워졌던 것이다. 고주몽은 졸본부여의 3대왕이다. 당시 여달의 나이는 19세나 20세밖에 되지 않으므로 자력으로 고주몽을 밀어낸 것이 아니라 졸본부여의 구신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것이다. 고주몽의 구려국(句麗國) 재건국 시기가 [삼국사기]에 소개된 기원전 37년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졸본부여의 단군으로 즉위     한 것이 기원전 58년이므로 21년을 재위하였다가 물러난 것이다.
6) 비류수(沸流水) : 길림성 사평시 쌍료현 동명(東明)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7)구려국(句麗國) : 고구려현(高句麗縣; 內蒙古 杉)은 북부여의 제후인 고구려후 고진의 영지였고, 고구려(高句麗; 鐵法市)는 고두막한의 졸본부여이고, 구려(句麗; 雙遼縣 雙山鎭)는 고주몽의 홀본부로서 셋은 각기 다른 곳이다. [후한서]에서 고구려(高句驪)와 구려(句麗)가 분리되어 있는 까닭은 바로 고주몽(高朱蒙)이 나라를 두 번 건국한 때문이다. 고구려는 고두막한의 졸본부여를 근거로 하였고, 구려는 뒤에 비류국의 맥이족을 근거로 하였다.
8) 비류국(沸流國) : 개원시 서풍현(開原市 西豊縣)이다.


4년 7월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

6년 오이(烏伊)와 부분노(扶芬奴)에 명하여 태백산 동남에 있는 행인국(荇人國)을 쳐서 그 땅을 취하여 성읍으로 삼았다.

11년 갑오(BC 27) 10월 북옥저(北沃沮)를 정벌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12년 졸본(卒本)에서 눌현(訥見)(9)으로 도읍을 옮겼다.

14년 8월 왕모 유화가 동부여에서 승하하자 그나라 왕 금와는 태후 예로써 장사를 지내고 드디어 신묘까지 건립했다.

19년 4월 왕자 유리(琉璃)가 부여에서 그 모친과 같이 도망해 왔으므로 태자로 세웠다. 9월에 왕이 승하하니 용산(龍山)에 장사지냈다.

9) 눌현(訥見) : 구려(句麗) 왕국의 수도로, 개원시 서풍현 양천자진의 눌현성이다.




  2대 유리왕(琉璃王) - 37년간 재위

1년(BC19) 이름은 유리(類利) 혹은 유류(孺留)로 주몽의 원자이고 모친은 예(禮)씨이다.

2년 7월 다물후(多勿侯) 송양(松壤)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14년 정월 부여왕 대소(帶素)가 사신을 보내어 수교를 하고 서로 질자(質子)를 교환하자고 청하였다. 태자 도절(都切)이 가지 않았다. 대소는 11월 군사 5만으로 졸본(卒本)을 침입했으나 많은 눈으로 군사가 만이 죽어 돌아갔다.  

22년 눌현(訥見)으로부터 국내위나암성(國內尉那巖城)(10)으로 옮겼으니 또한 황성이라고도 한다. 성안에 환도산이 있는데 산 위에 성을 쌓고 일이 있으면 여기에 머물렀다.

23년(BC4) 왕자 해명(海明)(11)을 세워 태자로 책봉하였다.

31년 한의 왕망(王莽)이 우리의 군사로 흉노(匈奴)를 침략했으나, 군사가 도망하니, 우리장수 연비(延丕)(12)를 죽이고 우리의 변경을 자주 침략하였다.

32년 11월 부여에서 군사를 일으켜 침략하자 왕자 무휼(無恤)이 나아가 부여군을 섬멸하였다.

33년 왕자 무휼을 태자로 세웠다. 오이, 마리에 명하여 군사 2만을 이끌고 서쪽의 양맥(梁貊)을 쳐서 멸하고 한나라의 고구려현을 습격하여 취하였다.

37년 10월 두곡(豆谷)의 별궁에서 승하하여 두곡(豆谷) 동원(東原)에 장사지냈다.

        10) 국내위나암성(國內尉那巖城) : 요원시내의 용수산산성(龍首山山城)으로 국내성(國內城)과는 다른 것이다.

11) 해명(海明) : 유리왕 27년, 서기 8년에 왕자 해명은 황룡국왕(黃龍國王)의 선물인 활을 훼손하여 분쟁을 일으켰다. 그래서 유리왕은 해명왕자를 자결토록 하였다.이 황룡국왕은 바로 졸본부여의 고구려 여달왕(閭達)으로 추정된다.
12) 연비(延丕) : 후한서와 남북사에는 고구려후 추(鄒)로 기록되어 있다. 또는 과( )라고도 한다. 이 고구려후 추가 바로 황룡국 여달왕으로 추정된다. 왕망은 이후에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라고 하였는데, 졸본부여를 그렇게 부른 것이다.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 - 26년간 재위

1년(AD18) 주류왕(朱留王)이라고도 하며 모친은 송(松)씨로 다물국 송양의 딸이다.

2년 백제민 1천여호가 항복해 왔다.

5년 2월 부여국 남쪽을 쳐서 왕을 죽였으나 이롭지 못하여 돌아왔다. 4월 대소(帶素)의 아우가 갈사수(曷思水)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7월에 부여왕의 종제(從弟)가 옛도읍의 백성 만여 명을 데리고 고구려(高句麗)에 항복하자 고구려가 봉하여 왕을 삼고 연나부(椽那部)(13)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등에 얽힌 무늬가 있다하여 낙(絡)(14)씨로 성을 내렸다.

9년(AD26) 10월 개마국(蓋馬國)을 쳐서 그 왕을 죽이고 백성을 위로하였다. 12월 구다국왕(句茶國王)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

11년 한의 요동태수(遼東太守)가 침략했으나 성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15년 왕자 호동(好童)(15)으로 인하여 옥저낙랑(沃沮樂浪)(16)을 기습하자 왕 최리(崔理)가 항복을 하였다. 12월 왕자 해우(解憂)가 태자에 봉해졌다.

20(AD37)년 왕이 낙랑(樂浪)(17)을 기습하여 멸하였으니 동압록 이남이 우리에 속했는데 해성(海城)(18)의 남쪽, 바다근처의 여러 성들만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다.

27년 9월 광무제가 살수(薩水)(19)까지 이르는 침략이 있었다. 이후로 살수 이남은 한나라에 다시 속했다. 10월 왕이 승하하여 대수촌원(大獸村原)에 장사하였다.

13) 연나부(椽那部) : 고구려 오가(五加) 속에 있는 절노부(絶奴部).
14)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 때, 서기 22년에 고구려가 동부여를 쳐서 동부여 대소왕(帶素王)을 죽이자 동부여의 후예는 두 파로 나누어졌다. 그 하나는 갈사국을 건설하고 하나는 낙씨부여이다. 낙씨부여는 본래가 해부루를 따라서 동부여로 가지 않고 강평현 부근에 남아 있던 해모수의 후예로 고려된다.
15) 호동(好童) : 대무신왕(大武神王)의 둘째비 갈사왕 손녀의 소생으로 용모가 아름답고 수려하였다. 낙랑공주가 그 아비에게 죽임을 당한후 그도 자살하였다.
16) 옥저낙랑(沃沮樂浪) : 옥저의 낙랑국으로 철령시 최진보산성(鐵嶺市 催陣堡山城)으로 추정한다.
17) 낙랑(樂浪) : 한나라 낙랑군(樂浪郡)을 없앴다는 것으로 앞의 최씨 낙랑과는 구별되며 역시 한사군 중의 낙랑과도 구별된다. 당시 낙랑군이 요동태수의 고구려 침략후에 새로 생겨나 있었고 그 임시 낙랑군 치소는 심양시 우홍구 평나(平那)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 해성(海城) : 만주 요령성 무순시.
19) 살수(薩水) : 살수는 혼하(渾河)이다.




  4대 민중왕(閔中王) - 4년간 재위

1년(AD44) 이름은 해색주(解色朱)이고 대무신왕의 아우이다. 태자가 아직 어려 나라사람이 왕으로 추대하였다.

5년 왕이 승하하자 민중원(閔中原)의 석굴에 장사지냈다.




  5대 모본왕(慕本王) - 5년간 재위

1년(AD48) 이름은 해우(解憂)이며 대무신왕의 원자이다. 왕자 익(翊)을 태자로 봉했다.

2년 한의 북평(北平 - 당산), 어양(漁陽 - 북경시), 상곡(上谷 - 창평), 태원(太原 - 산서성 태원)을 습격했으나 요동태수 채동(蔡 )이 신의로써 대우하여 다시 화친하였다.

6년 왕이 포악하고 어질지 못하여 11월 두로(杜魯)가 임금을 시해하였다. 모본원(慕本原)에 장사하였다.




  6대 태조대왕(太祖大王) -93년간 재위

1년(AD53) 이름은 궁(宮)이며 유리왕(琉璃王)의 아들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이다. 모태후(母太后)는 부여 사람이다. 태자가 어리석어 사람들이 왕으로 추대하였다. 왕의 나이가 7세인 까닭에 모태후가 발을 드리우고 정사를 보았다.

3년 요서(遼西)에 10성을 쌓아 한군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4년 7월 동옥저(東沃沮)를 쳐서 토지와 성읍을 취하였다. 그 지경이 동으로는 창해에 이르고 남으로는 살수(薩水)에 이르렀다.

16년(AD68)  8월 갈사왕(曷思王)의 손자 도두(都頭)가 나라를 들어 항복하자 그를 우태(于台)에 명하였다.

46년 왕은 동쪽의 책성(柵城)에 행차하였다.

53년(AD105) 왕이 군사를 보내어 요동(遼東)에 쳐들어 가 6현을 탈취하였으나 요동태수 경기(耿 )에게 결국 패하였다.

66년 예맥(濊貊)과 같이 한나라의 현도(玄 )를 쳐서 화려성(華麗城)을 공취하였다.

69년 한의 침략이 있었으나 왕의 아우 수성(遂成)이 이를 막았다. 12월 마한(馬韓), 예맥(濊貊)의 1만여명의 기병을 이끌고 현도성(玄 城)을 포위하자 부여왕이 아들을 파견하여 한의 군사와 더불어 대항하니 패하였다.

94년 8월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아 왔다. 11월 왕이 늙어 곧 동복 동생 수성(遂成)에게 왕위를 선위(禪位)하고 별궁으로 물러났다.




  7대 차대왕(次大王) - 19년간 재위

1년(AD146) 이름은 수성(遂成)으로 태조대왕(太祖大王)의 동복동생이다. 용맹하고 위엄은 있으나 어질지 못하였다. 태조께서 양위(讓位)하여 76세에 즉위했다.

3년 4월 왕이 태조대왕의 원자 막근(莫勤)을 살해하자, 그 아우 막덕(莫德)이 자살하였다.

20년 3월 태조대왕이 별궁에서 119세로 승하했다. 10월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왕을 시해하였다.




  8대 신대왕(新大王) - 14년간 재위

1년(AD165) 이름은 백고(伯固) 혹은 백구(伯句)이며 태조대왕의 막내 아우이다. 즉위나이 77세 였다.

2년 명림답부(明臨答夫)를 국상에 삼았다.

8년 한의 대군이 향도를 앞세우고 쳐들어 왔으나 명림답부가 이를 물리쳤다.

12년 왕자 남무(男武)를 태자로 세웠다.

15년 9월 명립답부가 113세로 죽었다. 12월 왕이 승하해서 고국곡(故國谷)에 장사했다.




  9대 고국천왕(故國川王) - 18년간 재위

1년(AD179) 이름은 남무(男武)이며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 장자 발기( 奇)가 왕이 되지 못함을 분하게 여겨 소노가(消奴加)와 함께  3만여 가구를 거느리고 공손탁(公孫度)에게 항복하고 비류수(沸流水) 상류에 거주하였다.

2년 부인 우(于)씨를 왕후(王后)로 세웠다. 왕후는 제나부(提那部) 우소(于素)의 딸이다.

6년 요동태수가 침입하여 왕자 계수( 須)를 보냈으나 패하자 친히 나아가 좌원(坐原)에서 섬멸하였다.

13년(AD191) 동부의 안류(晏留)가 을파소(乙巴素)(20)를 천거하니 재상으로 임명하였다.

19년 왕이 승하하여 고국천원(故國川原)에 장사하였다.

20) 을파소(乙巴素) : 유리왕(琉璃王)때의 대신 을소(乙素)의 손자. 을파소는 국상이 되더니 나이어린 준걸들을 뽑아서 선인도랑이라 하였다. 요화를 관장함을 참전이라 하였으니, 무리들을 선택하여 계를 지키고 신을 위하는 일을 맡겼다. 무예를 관장하는 자를 조의라 하였으니 바른 행동을 거듭하여 규율을 만들고 공동을 애하여 몸을 바친다.




  10대 산상왕(山上王) - 30년간 재위

1년(AD197) 이름은 연우(延憂) 일명 위궁(位宮)이며 고국천왕의 아우이다. 고국천왕의 형인 발기( 奇)가 왕이 되지 못함을 분하게 여기어 요동태수 공손탁(公孫度)의 군사를 빌려 쳐들어 오니 왕의 아우 계수( 須)가 나아가 막으니, 발기가 패하여 자결하였다. 그러므로 비류수가를 다시 회복하였다. 왕은 다시 우(于)씨를 왕후로 삼았다.

2년 환도성(丸都城)(21)을 축조하였다.

7년 8월 을파소(乙巴素)가 죽고 고우루(高優婁)를 국상(國相)에 명했다.

13년 9월 주통촌(酒桶村)의 여인과 관계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교체(郊 )라 하였다. 10월 도읍을 환도(丸都)로 옮기었다.

17년 교체(郊 )를 태자로 봉했다.

21년(AD217) 8월 한의 평주(平州) 사람 하요(夏瑤)가 백성 1천여 호를 이끌고 와서 책성(柵城)에 살게 했다.

31년 5월 왕이 승하하여 산상릉(山上陵)에 장사하였다.

21) 환도성(丸都城) : <광개토왕 비문>에서 비류수가의 홀본동강(忽本東崗)으로 기록한 사평시 쌍료현의 대하라파산이 환도성이다.




  11대 동천왕(東川王) - 21년간 재위

1년(AD227) 동양(東襄)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우위거(憂位居) 어릴때는 교체(郊 )이다.

2년 졸본(卒本)에서 시조묘(始祖廟)에 제사하였다. 3월 우씨를 왕태후(王太后)로 삼았다.

10년 2월 오(吳)나라 왕 손권(孫權)이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7월 그 사신을 죽이고 목을 위(魏)나라로 보냈다.

16년(AD242)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19년 10월 신라(新羅)의 북변을 침범하였다.

20년 8월 위나라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 丘儉)에게 1만을 주어 현도(玄 )를 거쳐서 침략해 왔다. 처음 싸움에 이롭더니 나중 패하여 10월 환도성(丸都城)을 빼앗기고 남옥저(南沃沮)(22)로 피하였다. 밀우(密友), 유유(紐由)의 계책과 희생으로 위(魏)군을 물리치니 위군은 낙랑(樂浪)으로 도망하여 물러갔다.

21년 2월 환도성(丸都城)을 복구할 수 없어 평양성(平壤城)(23)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

22년 2월 신라와 화친하고 9월 왕이 승하하자 시원(柴原)에 장사지냈다.

22) 남옥저(南沃沮) : 현재의 집안(集安) 지방으로 추정된다.
23) 평양성(平壤城) : 무순시(撫順市) 서북쪽 기반산의 기수(淇水) 상류로 위치는 철령시 최진보산성이다. 즉 한반도의 평양이 아니다.




  12대 중천왕(中川王) - 22년간 재위

1년(AD248) 중양(中襄)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연불(然弗)이며 동천왕의 아들이다. 10월 연( )씨를 왕후로 삼고, 11월 왕제 예물(預物), 사구(奢句)등이 모반하다 죽었다.

7년 4월 국상 명림어수(明臨於漱)가 죽자 비류패자(沸流沛者) 음우(陰友)를 국상에 명하였다.

8년 왕자 약노(藥盧)를 태자로 세웠다.

23년 10월 왕이 승하하자 중천원(中川原)에 장사 하였다.




  13대 서천왕(西川王) - 22년간 재위

1년(AD270) 서양(西襄)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약노(藥盧) 또는 약우(若友)로 중천왕의 둘째 아들이다.

2년 서부(西部) 대사자(大使者) 우수(于漱)의 딸을 왕후(王后)로 삼았다.

11년(AD280) 10월 숙신(肅愼)이 침입하여 변방의 백성을 살해하자 왕이 달가(達賈)로 하여금 적군을 평정케 하였다. 단로성(檀盧城)을 빼앗아 추장을 죽이고 그 민가 600여 호를 부여 남쪽의 오천(烏川) 땅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이때 큰 부락 17개 소를 항복 시키자 달가(達賈)를 안국군(安國君)에 봉하고 양맥(梁貊), 숙신(肅愼)(24)을 통괄하게 하였다.

23년 왕이 승하하자 서천원(西川原)에 장사하였다.

24) 양맥은 강평현으로 추정한다. 숙신은 길림시로 추정한다.




  14대 봉상왕(烽上王) - 8년간 재위

1년(AD292) 일명 치갈(雉葛)이며 이름은 상부(相夫) 또는 삽시루( 矢婁)로 서천왕의 태자이다. 3월 왕이 달가(達賈)를 의심하여 죽였다.

2년 8월 연(燕)나라 모용외(慕容 )가 침략하자 신성(新城)(25)의 재상 북부소형(北部小兄) 고노자(高奴子)가 이를 물리쳤다. 9월 왕제(王弟) 돌고( 固)를 모반한다 하여 죄없이 죽였다.

5년 모용외가 침입하니 고노자를 신성의 태수로 삼았다.

9년 창조리(倉助利)가 군신들과 모의하여 왕을 폐하고 을불(乙弗)을 왕으로 맞이하였다. 왕은 두 왕자와 자살하였다. 봉산원(烽山原)에 장사하였다.

25) 신성(新城) : 창도현 팔면성으로 비정한다.




  15대 미천왕(美川王) - 31년간 재위

1년(AD300) 일명 호양왕(好壤王)이며 이름은 을불(乙弗) 혹은 우불(憂弗)이며 서천왕의 아들 고추가(古鄒加) 돌고( 固)의 아들이다.

3년 9월 군사 3만으로 현도군을 치고 8천을 생포하여 평양으로 옮겼다.

12년(AD311) 8월 군사를 보내어 요동 서안평을 쳤다.

14년 10월 낙랑군을 공격하였다.

15년 정월 왕자 사유(斯由)를 태자로 삼았다. 남쪽의 대방군을 공략하였다.

20년 진(晋)나라 평주자사(平州刺史) 최비(崔毖)가 도망왔다. 이를 핑계로 모용외가 하성(河城)을 침범하였다.

21년(AD320) 12월 왕은 군사를 파견하여 요동을 공략하였다.

31년 사신을 후조(後趙) 석륵(石勒)에 보내어 고시( 矢)를 전했다.

32년 2월 왕이 승하하자 미천원(美川原)에 장사하였다.




  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 - 40년간 재위

1년(AD331) 일명 국강상왕(國岡上王)이며 이름은 사유(斯由) 혹은 교(釗)이다.

4년 평양성(平壤城)을 증축하였다.

9년 연(燕)나라왕 모용황(慕容 )이 신성까지 침공하자 화친하니 돌아갔다.

12년(AD342) 2월 환도성(丸都城)(26)을 수리하고 국내성(國內城)(27)을 쌓았다. 8월 수도를 환도성으로 옮겼다. 11월 연의 모용황이 쳐들어와 미천왕 묘를 파해치고 5만여호와 왕모를 포로로하고 환도성을 불태운 후 돌아갔다.

13년 7월 평양 동쪽 황성(黃城)(28)으로 이주하였다.

15년 10월 연왕이 모용각(慕容恪)으로 하여금 침략하게 하여 남소(南蘇)를  빼앗았다.

25년(AD355) 왕자 구부(丘夫)를 왕태자로 삼았다. 12월 태자를 볼모로 연(燕)에 보내고 왕모(王母)를 귀국시켰다.

39년 9월 군사 2만으로 백제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치양(雉壤)(29)에서 싸워 패하였다.

41년 10월 백제왕(근초고왕)이 3만으로 침입하여 평양성(平壤城)(30)을 공격하여 왕이 맞서 싸우니 10월 23일 화살에 맞아 승하하니 고국원(故國原)에 장사하였다.

26) 환도성(丸都城) : 쌍료현 대하라파산.
27) 국내성(國內城) : 요원시 공농산성.
28) 황성(黃城) : 집안(集安)의 성산자산성
29) 치양(稚壤) : 영흥군(永興郡) 서쪽 70리에 있었다는 평주진(平州鎭)으로서 현재 요덕군(耀德郡) 선흥면(宣興面)의 고성(古城)이 된다.  
30) 평양성(平壤城) :  집안성을 의미한다.




  17대 소수림왕(小獸林王) - 13년간 재위

1년(AD371) 일명 소해주유왕(小解朱留王)이며 이름은 구부(丘夫)로 고국원왕의 아들이다.

2년 6월 진(秦)나라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중 순도(順道)를 보내어 불상과 경문(經文)을 전해 주었다. 왕은 태학(太學)을 설치하여 자제를 교육하였다.

3년 율령(律令)을 반포하였다.

5년 처음으로 초문사(肖門寺)를 창건하고 순도를 머무르게 하고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워 아도(阿道)를 머물게 하였다. 7월 백제 땅 수곡성(水谷城)(31)을 쳤다.

7년(AD377) 백제(百濟)가 3만으로 평양성을 침공하였다. 11월 왕이 직접 백제를 쳤다.

8년 9월 거란(契丹)이 북변을 침공하여 8부락을 함락시켰다.

14년 11월 왕이 승하하자 소수림(小獸林)에 장사 하였다.

31) 수곡성(水谷城) : 함경도 함흥 근처로 고구려 장곡현(長谷縣)이 있었는데 백제 수곡성(水谷城)의 후신이다. 현재의 정평군(定平郡) 금진강변(金津江邊)이다. 백제 수곡성은 세류고성(細柳古城)으로 추정되며 토축이고 성둘레는 4228척이었다.




  18대 고국양왕(故國壤王) - 7년간 재위

1년(AD384) 이름은 이련(伊連) 혹은 지지(只支)이며 소수림왕의 아우이다.

2년 6월 군사 4만으로 연(燕) 대방(帶方)의 용성(龍城 - 朝陽市)을 습격하여 요동, 현도(32)를 함락하여 남녀 1만을 포로로 잡았다. 11월 연의 모용농(慕容農)이 침공하여 요동(遼東)과 현도(玄 )를 회복했다.

3년 왕자 담덕(談德)을 태자로 세웠다.

7년 백제의 달솔(達率) 진가모(眞嘉謀)가 도압성(都押城)(33)을 쳐부수고 남녀 2백명을 포로로 하고 돌아갔다.

9년 신라(新羅)와 수교를 맺고 3월에 불법을 믿도록 하교하고 종묘를 보수하였다. 5월 왕이 승하하자 고국양(故國壤)에 장사하였다.

32) 노룡현의 요동성과 수중현의 현도성.
33) 도압성(都押城) : 고구려쪽에서는 도곤성(都坤城)이라고도 기록하였다. 북청군의 통팔령천의 동쪽 가지는 곤파천, 혹은 압파천이라고도 한다. 즉 당시에 도곤성과 도압성이 각각 양국에 기록된 흔적으로서 지금도 곤파천, 압파천이 병용되는 것이다. 아무튼 도곤성은 대곤호(大困湖), 압해산이 있는 신포시 구남대천(舊南大川) 남안 발해고도비(渤海古都碑) 부근으로 추정한다.




  19대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 22년간 재위

1년(AD392)(34) 이름은 담덕(談德)으로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7월 남쪽의 백제를 쳐서 10성을 빼앗고, 9월에 북쪽의 거란(契丹)을 정복하고, 10월에 백제의 관미성(關彌城)(35)을 함락시켰다.

2년 평양에 9사를 창건하였다.

4년 8월 백제와 패수(浿水)(36) 가에서 싸워 격파하고 8천을 포로로 잡았다.

6년 왕이 친히 백제를 토벌하여 여러성을 치고 백제 왕성을 점령하였으나, 백제왕은 탈출하여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려 하였다. 왕이 진노하여 아리수(阿利水)(37)를 건너고, 장수를 보내어 백제 임시수도인 성횡(城橫)-혹은 악성(岳城)-을 핍박하니 마침내 백제왕이 항복하고 영원히 변방의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하였다.

8년 원수를 보내어 숙신(肅愼)의 터전(38)을 돌아보게 하였는데, 가태라곡(加太羅谷)(39) 남녀 삼백명의 포로를 얻어 돌아왔으며 이때부터 숙신도 조공하고 고구려를 섬겼다.

9년 연왕 모용성(慕容盛)이 3만으로 침입하여 신성(新城), 남소(南蘇) 두성을 취하였다. 백제가 서약을 배반하고 왜적과 사통하여 신라(新羅)를 공격하니 신라왕이 사자를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10년(AD401) 왕은 보기병 오만 병사를 보내어 신라를 구원토록 하였는데 종남거성(從男居城)을 지나 신라도읍에 이르러 왜적을 패퇴시켰다. 도망가는 왜구를 따라서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40)의 발성(拔城)까지 쫓아가니 임나가라는 항복하였다. 이후 고구려 본토 출신 안라인(安羅人)(41) 사람으로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11년 왕이 군사를 보내어 숙군성(宿軍城)(42)을 공격하자 연의 모용귀(慕容歸)가 도망했다.

14(AD405)년 연이 요동성에 침입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17년 3월 북연에 사신을 보내어 종족의 은의를 배풀자 북연왕(北燕王) 고운(高雲)(43)은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어 보답했다.

18년 왕자 거련(巨連)을 태자에 봉하고 7월 동쪽지방에 독산성(禿山城)등 6성을 축조하고 평양 민가를 옮겼다.

22년 10월 왕이 승하하였다.

34) <광개토왕 비문>에서 대무신왕의 17세손, 즉 고구려 19대왕 광개토왕(廣開土王)은 二九세에 즉위하였다. 그런데 二九세는 29세가 아니고 18세이다. 흔히 하는 말로서 이팔(二八) 청춘이 16세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단고기]<고구려본기>에서도 광개토왕은 18세에 즉위하였다고 전한다.또한 <광개토왕 비문>의 기록 방식도 십단위 숫자에서 중간의 십을 생략하지 않고 있으니 실제 29는 이십구, 혹은 이십유구     로 표시하여야 맞다.<광개토왕 비문>에서 을미년(395년)이 영락 5년, 병신년(396년)이 영락 6년이었다는 기록에 의하면 그의 즉위년도는 391년 신    묘년이 된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의하면 그는 재위 22년에 붕어하였는데 겨울 10월이라고 하였다. 역시 <광개토왕 비    문> 기록에서도 18세에 등극하여 39세에 붕어하였으므로 그의 재위 기간은 22년으로 일치한다.그런데 그가 붕어한 39세가 되는 해는 412년이 된다. [삼국사기] 기록에서는 광개토왕의 즉위년도가 392년으로, 붕어년도는 4    13년으로 각기 1년씩 뒤로 미루어져 있다. 이는 장수왕(長壽王)의 즉위년도까지 1년 늦추어 놓았고 그 이후 장수왕의 붕어년    도부터 다시 맞는다. 이는 결국 장수왕의 재위가 1년 짧게 잡혔기 때문이다.장수왕(長壽王)은 491년 붕어하였는데 이 해는 장수왕의 재위 79년이 아니고 재위 80년이 맞다. 이때는 장수왕의 세번째 연호    (年號)였던 연가(延嘉) 19년인데 장수왕 62년째에 세워진 연호로서, 이를 61년째에 세워진 연호로 착각하면 재위 79년으로 잘    못 기록할 수가 있다. 여기서는 삼국사기에 의하여 재위원년에 맞추어 기록한다.
35) 관미성(關彌城) : 대련시(大連市) 북쪽 금주시 대흑산산성(金州市 大黑山山城)이다.
36) 패수(浿水) :  패수는 한반도의 청천강으로 백제기 371년 근초고왕 26년에 싸웠던 패하(浿河)는 단군 시대 패수인 중국 요양시의 태자하(太子河)로 추정된다.  
37) 아리수(阿利水) : 예전의 압록하이던 오늘날의 동요하를 말한다.
38) 숙신토곡은 흑룡강성 영안현의 동경성 부근으로 추정된다.
39) 가태라곡(加太羅谷) : 목단강 하류 가목사(佳木斯) 일대로 추정한다.
40) 임나가라(任那加羅) : 대마도(對馬島)를 지칭한다.
41) 안라인(安羅人) : 안라국이 본래 홀본인(忽本人)이라고 하였는데 홀본은 비류수가 있는 중국의 사평시 서쪽 쌍료현 땅이다. 이 홀본인들은 고구려인 협보(陜父)의 후손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본에서 다파라국을 세웠다고 전한다. 다파라국 위치와 안라국의 위치는 같다.대왕릉비에 의하면 아소산(阿蘇山)을 경계로 북쪽에는 왜국(倭國; 百濟 侯國)이 남쪽에는 고구려의     도움으로 성장한 안     라국(安羅國)이 임나 10국의 하나로서 자리하였던 것이다. 임나 십국 중의 일국이    대마도 임나가라(인위가라)가 되며, 따     라서 임나는 때때로 대마도를 가리키고 때로는 임나 10국이 있    던 규슈(九州)와 한반도 남부를 말한다. 즉 고구려군은 대     마도에 주둔하고 규슈에서는 안라국이 고구    려를 대신하였다.
42) 숙군성(宿軍城) : 영주자사의 치소이면서 용성의 동북에 있었다고 전하므로 진황도시 청룡현의 동북이며 요녕성과 경계 지역이 된다.
43) 고운 : 고구려의 고양 고씨의 후예로 모용보가 태자일 때 그를 아들로 삼아 모용씨의 성을 주었다.




20세 장수왕(長壽王) - 78년간 재위

1년(AD413) 이름은 거련(巨連)이며 광개토대왕의 아들이다.

15년(AD427) 도읍을 평양(平壤)(44)으로 옮겼다.

24년 위(魏)가 연(燕)을 공격하니 왕이 장군 갈로(葛盧), 맹광(孟光)을 보내 연을 도왔다.

28년 신라사람이 변방을 장수를 죽이니 왕이 분노하여 군사를 내니 신라 눌지왕(訥祗王)이 사신을 통해 사과했다.

56년(AD468) 말갈 군사 1만을 내어 신라국 실직주성(悉直州城)을 취하였다.

63년 3만의 군사로 백제의 한성(漢城)(45)을 함락하고 왕 부여경(夫餘慶 - 개로왕)을 살해한 후 8천을 포로로 하여 돌아왔다.

79년(AD491) 12월 왕이 승하하였는데 나이가 98세 였다.

44) 평양(平壤) : 무순시 고이산성(撫順市 高爾山城)이다.무순시 고이산성의 실측 기록에 둘레가 8리이고, 동성(東城)과 서성(西城), 남위성(南衛城), 북위성(北衛城) 등으로 이루어졌다.
45) 한성(漢城) : 백제 평산한성으로, 하남위례성을 지키는 주요한 성으로서 광개토왕에게 패전한 아신왕이 제일 먼저 쌓았다.예성강 근처의 평산군에 위치한다.




21세 문자명왕(文咨明王) - 28년간 재위

1년(AD492) 일명 명치호왕(明治好王)으로 이름은 나운(羅雲), 장수왕의 손자이다. 부친은 고추대가(古雛大加)의 벼슬을 한 조다(助多)이다. 부친이 일찍 죽어 궁중에서 키우고 대손으로 정해졌다.

3년 2월 부여왕(夫餘王)과 그 처자가 나라를 바치며 항복해 왔다.

4년 백제의 치양성(雉壤城)(46)을 치자 신라가 백제를 도와 물러났다.

6년 신라의 우산성(牛山城)(47)을 공취하였다.

7년 정월 왕자 흥안(興安)을 태자에 세웠다.

12년(AD503) 백제(百濟) 달솔(達率) 우영(優永)이 5천의 군사로 수곡성(水谷城)(48)을 침입했다.

16년 고노(高老)에게 말갈(靺鞨)과 도모하여 백제의 한성을 치게 하였으나 이롭지 못해 물러났다.

28년 왕이 승하하였다.

46) 치양성(雉壤城) : 치양(稚壤)은 영흥군(永興郡) 서쪽 70리에 있었다는 평주진(平州鎭)으로서 현재 요덕군(耀德郡) 선흥면(宣興面)의 고성(古城)이 된다.
47) 우산성(牛山城) : 강릉 명주 지방으로 추정된다.
48) 수곡성(水谷城) : 함경도 함흥 근처로 고구려 장곡현(長谷縣)이 있었는데 백제 수곡성(水谷城)의 후신이다. 현재의 정평군(定平郡) 금진강변(金津江邊)이다. 백제 수곡성은 세류고성(細柳古城)으로 추정되며 토축이고 성둘레는 4228척이었다.




22세 안장왕(安藏王) - 12년간 재위

1년(AD519) 이름은 흥안(興安)이며 문자명왕의 장자이다.

11년 백제와 오곡(五谷-황해도 서흥군)의 싸움에서 이기고 2천여명을 참살하였다.

13년 5월 왕이 승하하였다.





23세 안원왕(安原王) - 14년간 재위

1년(AD531) 이름은 보연(寶延)으로 안장왕의 아우다.

3년 왕자 평성(平成)을 태자로 삼았다.

10년 백제가 우산성(牛山城)을 포위하자 군사를 내어 이를 물리쳤다.

15년 3월 왕이 승하하였다.





24세 양원왕(陽原王) - 14년간 재위

1년(AD545) 일명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으로 이름은 평성(平成)이며 안원왕의 장자이다.

3년 7월 백암성(白巖城)을 다시 축조하고 신성(新城)도 보수하였다.

6년 정월 백제가 도살성(道薩城)(49)을 취하였다. 3월 백제의 금현성(金峴城)(50)을 치자 신라가 이 틈을 타서 2개의 성을 공취하였다.

7년 9월 돌궐(突厥)이 침략하였으나 장군 고흘(高紇)이 이를 물리쳤다. 이 기회를 이용 신라가 10성을 공취하였다.

8년 장안성(長安城)(51)을 축조하였다.

15년 3월 왕이 승하하였다.

49) 도살성(道薩城) : 백제 초기에 십제국(十濟國)이라고 부른 하남 위례성이 도살성을 가리킨다. 즉 [일본서기]의 한성은 바로 평산군 태백산성을 의미하는 것이다.고구려가 붙인 도살성이라는 이름은 고구려군이 백제왕성, 즉 평산위례성을 공략하여 백제 왕족을 도살(屠殺), 도륙(屠戮)하    고서 붙인 섬뜩한 새이름으로 추정된다.
50) 금현성(金峴城) : 금천군 우봉면으로 각각 추정된다.
51) 장안성(長安城) : 무순시 동쪽 신빈현(新賓縣) 영릉진(英陵鎭) 노성(老城) 즉 신빈현 혁도아라성이다.




25세 평원왕(平原王) - 31년간 재위

1년(AD559) 일명 평강상호왕(平崗上好王)으로 이름은 양성(陽成)이고 양원왕의 장자이다.

28년(AD586) 도읍을 장안성(長安城)으로 옮겼다.

32년 10월 왕이 승하하였다.





26세 영양왕( 陽王) - 28년간 재위

1년(AD590)  일명 평양왕(平陽王)이며 이름은 원(元) 또는 대원(大元)이며 평원왕의 장자이다.

9년 말갈군사 1만으로 요서(遼西)를 침공하였으나 영주총관(營州摠管) 위충(韋沖)이 기습하여 퇴군하였다. 이에 수(隋)의 문제(文帝)가 왕세적(王世績)을 원수로 하여 수.육군 30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강이식에게 참패하고 물러갔다.

11년(AD600) 대학박사(大學博士) 이문진(李文眞)이 옛 역사 유기(留記) 1백권을 정리하여 신집(新集) 5권을 만들었다.

14년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어 신라의 북한산성(北漢山城)(52)을 공격하였는데 신라왕이 직접 도우니 후퇴하였다.

19년 2월 신라의 북변을 기습하고 4월 신라의 우명산성(牛鳴山城)을 빼앗았다.

23년(AD612) 정월 수(隋)의 양제(煬帝)는 부왕 문제(文帝)의 원한을 풀고자 고구려를 침략하니 수.육군 1백13만 3천 8백이고 수송자만도 이 배가 되었다. 그러나 왕자 건무(建武), 도원수(都元帥) 강이식(姜以式)과 막리지(莫離支) 을지문덕(乙支文德)(53)의 활약으로 적은 살수(薩水)(54)에서 참패하여 돌아갔다.

24년 4월 수 양제가 다시 요수(療水)를 건너 침략하였으나, 요동성에서 굳게 항쟁하니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25년 다시 수(隋)의 침략이 있었지만 왕이 화친하여 돌아갔다.

29년 9월 왕이 승하하였다.

52) 북한산성(北漢山城) : 진흥왕 때에 신라가 쌓은 북한산성이 오늘날의 서울 북쪽 북한산성이다. 그후 신라의 북한산성을 신라가 한성주(漢城州)라고 고쳐 불렀다.
53) 을지문덕(乙支文德) : 고구려(高句麗) 석다산(石多山) 사람으로 수의 대군을 살수에서 격멸시켰다.
54) 살수(薩水) : 지금의 혼하(渾河) 이다.




27세 영류왕(營留王) - 24년간 재위

1년(AD618) 이름은 건무(建武) 혹은 성(成)이며 영양왕의 이복 동생이다.

7년 당에서 도교(道敎)의 법을 가져왔다.

12년 신라장군 김유신(金庾信)이 동변의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하여 파하였다.

14년(AD631) 2월 동북의 부여성(夫餘城)에서 동남의 바다에 이르는 1천여리의 장성(55)을 16년만에 준공하였다.

25년 10월 연개소문(淵蓋蘇文)(56)이 왕을 시해하였다

55) 천리장성(千里長城) : 부여성(夫餘城; 今 彰武市=遼東城= 拂涅國城)에서 서남쪽의 바다까지 쌓았다. 즉 천리장성이 당시 수도 장안성의 남쪽까지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제까지 추정해온 천산산맥을 중심으로 한 천리장성은 고구려 국토의 상당 부분을 바깥으로 하고 있으므로 잘못 비정된 것     이다. 부여성은 [요사지리지]에서 불열국성이었다는 고구려 요동성인 창무시로 보아야 하고 그 서남쪽의 바다는 반금시 부근     으로 추정한다.
56) 연개소문(淵蓋蘇文) : 혹 개금(蓋金)이라고 하며 성은 연(淵)씨며 그 조상은 봉성(鳳城) 사람이다. 아버지는 태조(太祚)이며 대대로 막리지(莫離支)를 지냈다.




28세 보장왕(寶藏王) - 26년간 재위

1년(AD642) 이름은 장(臧) 혹은 보장(寶藏)이며 건무왕의 아우 대양왕(大陽王)의 아들로서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계승시켰다.

4년 당(唐) 태종(太宗)이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침략하니 요동성(遼東城)(57)이 무너졌으나 안시성(安市城)(58)에 이르러 성주(城主) 양만춘(楊萬春)이 굳게 항쟁하여 당군(唐軍)을 물리치니 태종은 한쪽 눈을 잃고 물러났다.

6년 당의 이세적이 요하를 건너 침공하니 우리성들이 이에 대항하였다.

13년(AD654) 10월 장군 안고(安固)로 하여금 말갈(靺鞨)과 함께 돌궐(突厥)을 쳤으나 신성(新城)에서 대패하였다.

14년 정월 아군이 백제, 말갈과 더불어 신라 북변의 33성을 공취하니 신라왕 김춘추(金春秋)가 당에 원병을 청하였다. 2월 당 고종(高宗)이 정명진(程名振)과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공격하였다.

19년 11월 당의 설필하력(契苾何力), 소정방(蘇定方), 유백영(劉佰英), 정명진(程名振)이 길을 나누어 쳐들어 왔다.

20년 정월 당이 35군대(軍隊)를 수륙으로 나누어 침공하였다. 8월 소정방이 평양성(平壤城)(59)을 포위하였다. 9월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男生)이 정병 수만으로 압록수(鴨 水)(60)를 지켰으나 당의 설필하력(契苾何力)이 이를 물리치고 들어오니 아군 3만의 희생을 내고 남생은 겨우 목숨을 건졌다.

21년 정월 당의 방효태(龐孝泰)가 연개소문과 사수(蛇水)(61)에서 싸웠으나 전군이 몰살하였다. 소정방은 평양의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25년 연개소문이 죽자 장남 남생이 막리지에 올랐다. 남생과 그 동생 남건(男建), 남산(男産)과 반목하여 남건이 남생을 붙잡아 가두고 남건이 스스로 막리지가 되자 남생이 국내성(國內城)으로 도망후 당으로 달아났다.

27년(AD668) 2월 부여성(夫餘城)이 함락되었다. 9월 평양성(平壤城)이 함락되어 왕과 함께 남건이 잡혔다.

이로써 고구려는 망하여 보장왕(寶藏王)의 연호는 없으며, 오직 원수 당나라 고종의 연호를 쓰게 되었다.

당 총장 2년(AD669) 왕의 서자 안승(安勝)이 4천여 호를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당 함형 원년(AD670) 4월 검모잠(劍牟岑)은 고구려를 다시 일으키고자 당에 모반하고 왕의 외손 안순(安舜)을 임금에 세우려고 하자 당 고종이 이에 군사를 내니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도망하였다.

당 의봉 2년(AD677) 고구려의 남은 장수들이 각지에서 항쟁하자 항복한 보장왕을 조선왕에 봉하여 요동에 보내자 은밀히 말갈과 통하여 다시 일어서려 하니, 공주로 소환되어 당 영순(永淳)초에 승하하니 힐리( 利) 묘의 왼편에 장사하였다.

57) 요동성(遼東城) : 현제 창무시(彰武市)로 부여성(夫餘城) 혹은 불열국성(拂涅國城)이다
58) 안시성(安市城) : 옛날 안촌홀(舊 安寸忽)로 현제 태안현 손성자 이다.
59) 평양성(平壤城) : 고구려의 한성, 즉 남평양성으로 현제의 대동강 평양이다.천도는 언제였는지 명확한 기록이 없다.[한단고기]에 의하면 642년에 있었던 연개소문의 반정 때에 영류왕(榮留王)이 송양(松壤)으로 도망쳤는데, 송양은 오늘날의 평양 동쪽 강동군의 고지명이다. 영류왕은 송양에서 조서를 내려 대신을 모아 연개소문에게 반격하려다가 실패하고 죽었다. 따라서 이 영류왕 시해 사건 전의 고구려 수도는 이미 오늘날의 평양이다.
60) 압록수(鴨 水) : 오늘날의 대요하(大遼河)로 지금이 압록이 아니다.
61) 사수(蛇水) : 오늘날의 대동강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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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발해기(渤海紀)  성미경 05·09·28 2475
 고구려기(高句麗紀)  성미경 05·09·28 2950
90  신라기(新羅紀)  성미경 05·09·28 2550
89  백제기(百濟紀)  성미경 05·09·28 2759
88  단군 조선 47대 제호 분석  성미경 06·07·17 2736
87  화랑세기(1세 풍월주 위화랑 ~ 8세 풍월주 문노)  성미경 09·09·03 5302
86  화랑세기(9세 풍월주 비보랑 ~ 15세 풍월주 유신공)  성미경 09·09·03 4151
85  화랑세기 (16 풍월주 보종공~22세 풍월주 양도공)  성미경 09·09·03 3254
84  화랑세기(23세 풍월주 군관공~32세 풍월주 신공)  성미경 09·09·03 2803
83  화랑세기-발문  성미경 09·09·03 2786
82  규원사화 책입니다.배달전서 책입니다. 1  역사 09·11·03 2720
81  부도지 책입니다.한단고기책입니다. 1  역사 09·11·03 2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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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천부경과 삼일신고 책입니다.  역사 09·11·06 2545
78  한단본기 책입니다. 1  역사 09·11·06 2387
77  삼국사기 책입니다. 1  역사 09·12·24 2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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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9000년 역사의 역대 왕계표  관리자 11·04·14 1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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