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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1세 풍월주 위화랑 ~ 8세 풍월주 문노)
 성미경  | 2009·09·03 08:19 | 조회 : 5,324
[서문]

(발췌본 화랑세기로 시작)
화랑은 선도仙徒1)이다. 우리 나라2)에서 신궁神宮3)을 받들고 하늘에 대제大祭를 행하는 것은 마치 연燕의 동산桐山, 노魯의 태산泰山과 같다. 옛날 연부인燕夫人이 선도仙徒를 좋아하여 미인을 많이 모아 이름하기를 국화國花라 하였다. 그 풍습이 동쪽으로 흘러들어 우리 나라에서도 여자로써 원화源花를 삼게 되었는데, 지소태후只召太后4)가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하여 국인國人으로 하여금 받들게 하였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法興大王이 위화랑魏花郞을 사랑하여 이름을 ‘화랑이라 불렀다. 화랑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하였다. 옛날에 선도는 단지 신神 받드는 일을 주로 하였는데, 국공國公들이 무리(화랑도)에 들어간 후5) 선도는 도의道義를 서로 힘썼다. 이에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빼어났고 훌륭한 장군과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나왔다. 화랑의 역사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


[1세 풍월주 위화랑]-------------------------------------------------------------------------------------------------------------------

[마복칠성]
(1세) 위화랑魏花郞은 섬신공剡臣公6)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벽아부인碧我夫人이다. 어머니가 총애를 받아 비처왕毗處王의 마복자摩腹子7)가 되었다.
세간에서 말하는 바 마복칠성摩腹七星이다. 아시공阿時公의 아버지는 선모善牟이고, 어머니는 보혜宝兮이다. 수지공守知公의 아버지 이흔伊欣이고, 어머니는 준명俊明이다. 이등공伊登公의 아버지는 숙흔叔欣이고, 어머니는 홍수洪壽이다. 태종공苔宗公의 아버지는 아진종阿珍宗이고, 어머니는 보옥공주宝玉公主이다. 비량공比梁公의 아버지는 비지比知이고, 어머니는 묘양妙陽이다. 융취공肜吹公의 아버지는 덕지德知이고, 어머니는 가야국의 융융공주肜肜公主이다. 혹은 말하기를, 법흥대왕은 칠성七成의 우두머리이며, 위화랑은 어머니의 신분이 낮아 참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칠성록七星錄』과 『보혜기宝兮記』에는 모두 이등공伊登公이 없고 위화랑을 기재하고 있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잘 알 수 없다.

[위화랑의 풍모]
공은 얼굴이 백옥과 같고, 입술은 마치 붉은 연지와 같고, 맑은 눈동자와 하얀 이를 가졌는데, 말이 떨어지면 바람이 일었다. 벽아부인碧我夫人이 날이捺已에 있을 때 한 딸을 낳았는데, 곧 비처후毗處后인 벽화부인碧花夫人8)이다. 벽화부인이 입궁하자, 공은 사제私弟로서 출입하여 비처왕의 총애를 받았다.

[법흥과의 관계]
법흥대왕9)은 그 때 부군副君10)의 아들로 국공國公의 자리에 있었는데,(국공에 대한 왕의) 총애가 (공만) 못하였다. 아시공이 이에 (법흥)대왕에게 권하여 공에게 하배下拜를 하게 하였다. 공이 그것을 섬신공에게 말하였다. 섬신공이 말하기를 “국공이 너에게 하배를 하는 것은 너를 신하로 삼기 위한 것이다. 지금 왕은 늙었고, 국공은 대망을 가지고 있다. 너는 그를 섬겨야 한다” 하였다. 공이 이에 찾아가 신하가 되어 섬기니, 많은 것이 (국공의) 뜻에 맞았다. 법흥이 말하기를 “나의 등통鄧通11)이다”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처가 과연 죽었다.12) 지증대왕이 즉위하고 법흥을 태자로 삼았다.

[옥진궁주]
공이 벽화후碧花后에게 태자를 섬기도록 권하여 딸을 낳으니, 바로 삼엽궁주三葉宮主이다. 그 때 태자비인 보도부인保道夫人은 곧 비처의 딸인데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 보도의 아우 오도吾道는 선혜후善兮后와 묘심妙心이 사통私通하여 낳았다. 그러므로 매우 아름다워 태자(법흥)에게 총애를 받았다. (오도는) 삼엽三葉에게 아양을 떨어 공과 깊이 사귀고 몰래 서로 정을 통하였다. 그리하여 옥진궁주玉珍宮主를 낳았다. 태자가 알고 오도를 아시공阿時公에게 주고, 벽화碧花를 비량공比梁公에게 주었다. 이에 정비正妃인 보도부인을 총애하고, 공을 물리치고 멀리 하였다.
그러나 보도保道는 공이 덕이 있다고 여기고 지증대왕에게 청하여 (공을) 천주天柱에 봉하고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연제태후延帝太后 또한 공을 사랑辛하였다. 옥진이 궁에 들어가 왕(법흥)의 사랑辛을 받자, 곧 다시 처음과 같이 공을 총애하게 되었다. 마침내 공은 이찬伊湌의 위位에 있게 되었다. 옥진이 법흥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자, 보도保道로 하여금 비구니가 되게 하고, 공을 신하로 삼았다. 그러므로 지소태후가 국정을 맡자 화랑을 설치하게 되었는데, 공을 그 우두머리로 삼아 이름하여 풍월주風月主13)라 하였다. 지소只召는 보도부인의 딸인데 입종공立宗公14)의 부인이 되어 진흥대왕眞興大王을 낳았다. 그러나 법흥대왕이 옥진궁주를 사랑하여 진흥대왕으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할 뜻이 없었기에, 지소는 걱정이 되었다. 공이 이에 대의로써 옥진을 깨닫게 하여, (진흥을 태자로) 삼게 하였다. 그 때 사람들이 의롭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다. 이로써 사도태후思道太后 또한 무사하였다. 공의 덕이 컸다.

[위화랑의 자손]
공의 자손은 매우 많았다. 장녀 옥진궁주와 차녀 금진부인金珍夫人은 곧 오도부인이 낳았다. 옥진은 처음에 영실공英失公에게 시집을 갔으나, 얼마안 있어 법흥대왕의 사랑辛을 받아 비대공比臺公을 낳았다. 대왕이 (비대공을) 태자로 삼으려고 하자, 공이 그것을 말리며 간하기를 “신의 딸은 골품이 없고15) 또 영실과 더불어 함께 살았으나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하였다. 법흥이 죽자崩 지소태후는 비대공의 왕자의 지위를 낮추어 공사公祀16)를 받들게 하였다. 비대공의 딸 개원궁주開元宮主는 동륜태자銅輪太子를 섬겨 아들을 두었다. 공의 아들 이화랑二花郞은 곧 준실부인俊室夫人이 낳았다. 준실부인은 수지공守知公의 누이이고 자비왕慈悲王의 외손인데, 아름다웠고 문장도 잘 하였다. 처음에 법흥대왕의 후궁後宮이 되었으나 아들이 없었고, 공에게 시집을 가서 (이화랑을) 낳았는데, 또한 모습이 아름답고 문장을 잘 하였다. 지소태후가 총애를 하여 늘 좌우에서 모시게 하여다. 태후의 딸 숙명궁주叔明宮主가 좋아하여 도망가 아들을 낳았으니, 바로 원광조사圓光祖師17)로 우리 동방의 대성인이다. 원광의 동생 보리菩利 사문沙門은 곧 나18)의 증조이다.

찬하여 말한다 : 화랑의 시조이고 사문의 아비이며, 청아靑我의 손자이고 벽아碧我의 아들이다. 생시에는 선仙이고 죽은 후에는 부처로서 원만하게 늘 존재하니 공덕이 모자람이 없도다.


[2세 풍월주 미진부]-------------------------------------------------------------------------------------------------------------------

(2세) 미진부공未珍夫公은 아시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삼엽궁주이니, 곧 법흥대왕의 딸이다. (궁주는) 꿈에 백학을 보고 (공을) 낳았다. 공은 모습이 아름답고 재주가 많아, 법흥대왕이 사랑하였다. 비대공比臺公 등과 더불어 궁중에서 자랐다. 그 즈음 (법흥대왕은) 옥진궁주에 대한 사랑이 극진하여 (비대공을 태자로 세우려 하였으나), 지소태후가 (진골)정통이 즉위하기 어렵다 하고, 삼엽과 아시공이 태후를 지지하였다. 이로써 태후가 삼엽과 공을 사랑하였다. 태후가 정치를 맡자 공은 폐신嬖臣19)으로 삼았다. 이 때 공의 나이가 16살로, 능히 태후의 뜻에 부합할 수 있었다.

[원화]
이에 앞서 삼산공三山公의 딸 준정俊貞이 원화源花가 되었는데 많은 낭도를 두었다. 그 때 법흥대왕의 딸 남모공주南毛公主는 백제 보과공주宝果公主20)의 소생으로, 또한 뛰어난 미인이었으며, 공과 더불어 도탑게 사랑하였다. 태후가 공을 사랑하여 남모를 도와 원화로 삼고자 하였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은 옥진궁주의 사부私夫인 영실공을 용양군龍陽君21)으로 삼아 총애하며 높은 위에 있게 하고, 원화를 물러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준정은 (영실공을) 부지런히 섬겨, 남모가 원화가 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태후는 비록 (왕의) 유명遺命으로 영실을 계부繼父로 삼았으나22) 실제로는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공에게 명하여 물러나게 하였다. 태후는 또 낭도가 부족한 것을 염려하여, 위화공魏花公의 낭도를 소속하게 하여 더하여 주었다. 준정이 투기를 하였다. 이에 술로 유혹하여 물에서 죽였는데, 남모의 낭도들이 그것을 폭로하였다.

[풍월주 설치]
태후가 이에 원화를 폐지하고 선화仙花를 화랑으로 삼았다.23) 그 무리를 일러 풍월風月이라 하였고, 그 우두머리를 일러 풍월주라 하였다.24) 위화공이 풍월주가 되고, 공이 부제副弟25)가 되었다. 얼마 안 있어 공이 풍월주가 되었다.
공은 남모를 잃은 이후 아내를 맞지 않았다. 공은 외손으로서 일찍이 법흥대왕을 모셨는데, 궁중에서 후궁인 묘도부인妙道夫人과 사통하였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태후가 알고 허락하였다. 공은 이에 묘도를 아내로 맞이하여 미실낭주美室娘主와 미생랑美生郞을 낳았다. 미실은 재색이 뛰어났는데 진흥과 진평을 섬겨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미생랑 또한 화랑에 들어갔다. 공은 지소태후를 섬기며 충성을 다했는데, 총애가 줄어들자 몸을 나라에 바치기를 원하여, 낭도들을 거느리고 전쟁에 나아가 과연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미실이 (왕의) 총애를 얻자, (공은) 작爵이 각간角干으로 오르게 되었다. 부인인 묘도 또한 궁주宮主26)에 이르러 대원 신통大元神統27)을 잇게 되었으니, 아! 성대하다.

찬하여 말한다 : 색色으로 섬기어 충성을 다했으며, 용맹으로 나라를 받들고 또한 그 공을 다하였다. 부인 묘도는 위화랑공의 손녀인데, 배필로 삼아 미화를 낳으니 천도天道가 아득하고 오래도다.


[3세 풍월주 모랑]-------------------------------------------------------------------------------------------------------------------

(3세) 모랑毛郞은 남모의 아우이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이 국공國公으로서 백제에 들어가 보과공주宝果公主와 더불어 사통을 하였다. 후에 보과가 도망을 하여 입궁하여 남모와 모랑을 낳았다. 모두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미진부未珍夫가 화랑이 되자 모랑을 부제로 삼았다. (모랑은) 태후의 총애를 받았다. 진흥대왕 9년(548), 태후가 명하여 3세 풍월주로 삼아 남모의 혼백을 위로하였다. 위화랑공이 그의 딸 준화俊花를 (모랑의) 처로 삼게 하였으니, 곧 이화랑二花郞의 누나女兄였다. (모랑은) 딸 준모俊毛 하나만 낳고 일찍 죽었다. 마침내 이화랑이 뒤를 이었다.

찬하여 말한다 : 동성(왕)의 아름다움이요 위화랑의 사위다. 대왕의 아들이고 태후의 사랑이다.


[4세 풍월주 이화랑]-------------------------------------------------------------------------------------------------------------------

(4세) 이화랑二花郞은 위공魏公의 아들이다. 피부가 옥과 같이 부드럽고, 눈은 미소짓는 꽃과 같고, 음율과 문장을 잘 하였다. 12살에 능히 모랑공의 부제가 되었다. (지소)태후가 매우 사랑하였다. 그 때 황화黃華ㆍ숙명淑明ㆍ송화松花 공주가 모두 공을 따라 배웠다. 공은 이에 숙명궁주와 정을 통通할 수 있었다. 그 때 태후는 왕의 총애를 홀로 받게 하고자 모든 일을 공주에게 받들게 하였는데, 왕은 어머니가 같은 누이라고 하여 매우 사랑하지는 않았다. 공주 또한 그러하였다. 공주의 아버지는 곧 태종공苔宗公28)인데 그 때 상상上相29)으로서 나라를 위한 가장 중요한 신하였다. 그래서 왕은 공주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공주는 총애를 믿고 스스로 방탕하였다. 태자를 낳고 황후로 봉해지자, 더욱 꺼림이 없었다. 왕은 평소에 사도思道 황후를 사랑하여 그 아들 동륜銅輪을 태자로 삼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숙명의 사랑]
이에 이르러 숙명후는 공과 더불어 서로 정을 통함이 더욱 심하여졌고, 여러 번 왕에게 들켰다. 왕이 (황후를) 폐하려 하자, 태후가 울면서 간하여 이룰 수 없었다. 왕이 숙명을 사랑하지 않았는데, 숙명은 스스로 임신을 하였다. 이에 공과 더불어 도망하여 나갔다. 군신群臣들이 태자가 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의심을 하였다. 이에 동륜공을 태자로 삼았다. 공은 비록 죄가 있으나 태후에게 사랑을 받았고, 또한 도리어 동륜공에게는 하나의 행운이 되었다. 그러므로 사도황후가 왕에게 권하여 힘써 보호하여 태후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드디어 숙명에게 허락하여 부부가 되게 하였다. 이에 원광圓光과 보리菩利를 낳았으니 또한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개국開國30) 5년(555), 모랑공이 비사벌比斯伐31)에 여행하다가 병을 얻어 길에서 죽었다. 낭도들이 공을 받들기를 원하였다. 그 때 공은 태후의 총애로 늘 궁중에 머물렀기에 사양하고자 하였다. 낭도들이 말하기를 “위공魏公의 아들이 앉지 않으면 누가 앉겠습니까?”하였다. 태후가 이에 명하여 오르게 하여 4세 풍월주로 삼고 군현郡縣을 순행케 하였다. 그 때 태후가 바야흐로 만호낭주萬呼娘主를 임신하였다. 그러므로 그 출산을 기다려 떠났다.

[금진과 토함]
옥진궁주玉珍宮主의 동생은 금진金珍인데 또한 위공魏公의 딸이다. 법흥대왕을 섬겼으나 아들이 없었다. 대왕이 죽자崩 문상蚊上에 물러나 살았다. 남모가 처음 해를 당하였을 때, 낭도들이 (원화로) 받들고자 하였으나, 태후가 허락하지 않았다. 구리지공仇利知公과 몰래 정을 통하여 토함공免含公을 낳았는데, 극히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일찍 낭적郎籍32)에 소속되었는데, 이 때 부제로 삼았다. 태후가 궁중에 불러 보고 말하기를 “이 아이는 비량숙공比梁叔公보다 못하지 않고 아름다움은 벽모碧母보다 나으니, 인재를 얻었다고 축하할 만하다”하였다. 공 또한 토함공을 심히 사랑하여 기거를 반드시 함께 하였다. 금진낭주金珍娘主가 고맙게 여겨 공을 축복하였다.

[사다함]
토함공에게는 동생 사다함공斯多含公이 있었는데, 묘량妙梁의 풍모를 크게 가지고 있어, 낭도들이 많이 따랐다. 그 때 무관랑武官郞이 있었는데, 또한 인망이 있어 사도私徒를 많이 거느렸다. 사다함공이 나이는 적으나 의義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청하여 더불어 서로 보고 크게 기뻐 말하기를 “공자公子33)는 실로 옛날의 신릉信陵과 맹상孟嘗입니다. 섬기기를 원합니다”하니, 사다함이 대답하기를 “제가 어찌 감히 거느리겠습니까?"하였다. 그래서 (무관랑은) 공에게 귀의하였다.
공은 이에 태후에게 아뢰기를 “토함의 아우 사다함은 나이가 아직 장년에 이르지 않았는데 스스로 낭도를 거느렸으니, 자못 국선國仙34)이라고 이를 만합니다”하였다. 태후가 이에 궁중에 불러 음식을 내리며 사람을 거느리는 방법을 물으니, 사다함이 말하기를 “사람 사랑하옵기를 내 몸같이 할 따름입니다. 그 사람의 좋은 점을 좋다고 하는 것뿐입니다”하였다. 태후가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왕게게 말하여, 귀당비장貴幢裨將을 삼아 궁문을 과장케 하였다. 그 낭도 천 명도 충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 무렵 비조공比助公의 아들 문노文弩 또한 호걸로, 격검擊劍을 잘하였다. 공은 사다하으로 하여금 문노에게 검을 배우게 하였다. 문노가 말하기를 “검은 곧 한 사람을 대적하는 것인데, 어찌 고귀한 사람이 알 필요가 있습니까? 하자, 공이 말하기를 ”한 사람을 대적하지 않으면 곧 어찌 능히 만인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이 아이는 호협豪俠을 좋아하니 비록 무리가 많다고는 하지만, 그 적이 없다고 할 수 없으니 네가 그를 보호하라“하였다. 문노가 이에 낭도 오백으로 따르니, 그 위세가 토함보다 컸다.
그 때 동륜공이 점차 장성하였는데, 대왕이 보익輔翊하는 사람이 없음을 염려하여, 토함으로 하여 보익하도록 하였다. 토함이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임무이다”하였다. 이에 화랑의 지위를 그 아우에게 넘겨주었다. 공은 이에 사다함을 부제로 삼았는데, 그를 사랑함이 토함과 같았다. 그때 사람들이 공이 인재를 얻었음에 축하하였다. 얼마 안 있어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사다함이 종군을 청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공은 이에 풍월주의 지위를 넘겨 주고, 토함공과 더불어 오로지 궁중에서 태자를 보양補養하는 데 힘썼다. 아! 성대하다. 공의 맑은 덕과 영화로운 이름은 만세에 끊이지 않을 것이다. 공은 숙명공주와 더불어 영흥사永興寺에 나가 살며 불도佛道에 전심하였다. 태후 또한 뒤따라 귀의하였고, 숙태자肅太子 또한 머리를 깎고 계戒를 받았다.

[원광법사]
공의 아들 원광법사圓光法師는 숙명공주 소생이다. 임신할 때 공주는 공을 사모하는 마음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어, 화가 공에게 미칠까 염려하여 자살을 하려 하였다. 갑자기 금불이 와서 고하기를 “나는 약사불藥師佛인데, 공주의 배를 빌려 머물고자 한다” 하였다. 공주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합장 배례하니, 부처가 공주를 안고 엎드러져 마치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 때 공 또한 공주를 사모하는 마음을 금치 못하고 궁중으로 침범하였는데, 공주가 바로 누워 마치 품고 있는 것을 잃은 것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까닭을 물었다. 공주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곧 부처의 원력이다”하였다. 기쁨을 나누고 원광을 낳으니, 과연 대성여래大聖如來이다.

(필사본 『화랑세기』로 연결)
…족히 증거가 된다. 당시 공보다 더한 미남자는 없었다. 건복建福35)17년(600), 원광이 신라로 돌아왔다. 공은 주위를 넘겨주고, 숙명, 새달과 더불어 제손諸孫을 거느리고 국내의 승지勝地를 두루 돌아다녔다. …하루는 조용히 공주에게 말하기를 “신은 공주와 더불어 시측侍側한 지 40년이고, 어수魚水의 낙이 지극한…까닭에 태후에 대왕을 따라 옥경玉京36)으로 가는 것이 어떻습니까?”하였다. 공주가 말하기를 “낭군이 향하는 바를 첩妾은 마땅히 따라야지요”하였다. 마침내 나란히 누워서 죽었다. 새달 역시 따랐다. 때는 건복建福 20년(603) 3월이었다. 애공사哀公寺 북쪽 지소태후 능(곁)에 장사지냈으니, 유명遺命이었다. 아! 성대하다.
공의 한 마디 말은 …백세의 사표師表이다. 공은 말이 적었고…정행淨行37)을 하였다. …송宋의 다도태후多道太后가 화랑을 많이 거느리고 여러 번 사랑辛하여 …. …가 말하기를 누이가 욕심이 많아 낭郎이 (면치 못하였다 …공은 태…. …후가)술로서 (머물게 하여 장차 …하려 하였다.…)태후는 또 …지켰다. 지금 왕…신은 마땅히 신궁神宮에서 발원하여 …그런즉 맹세하여 얻지 못하여 …궁은 무릇 17… 신에게 고하여 … 좌우 공… 지엄하게 거하여 …위에 …. 공의 일족의 …무리가 공을 다시 세우려 하였다. 공이 궁중의 뜻을 알고 마침내 …응하였다. 공의 충직함이 이와 같았다.
공의 정(처인 숙명공주는) 공의 두 아들 원광과 보리를 낳았고, 또한 공의 두 딸 화명花明과 옥명玉明을 낳았는데, 모두 진평대왕의 후궁으로 들어가 자녀를 낳았다. 원광의 아우 보리는 정숙태자貞肅太子의 딸 만룡萬龍을 아내로 맞아 예원禮元 각간을 낳았으니, 곧 나38)의 할아버지이다. 공은 또 토함공이 누이妹39) 새달塞達을 아내로 맞아 서자 7인을 낳았는데, 모두 귀하게 되었다.

찬하여 말한다 : 이화二花의 풍류(화랑도)는 신라의 청담淸談40)이라, 귀족의 자손이 공주에게 장가들고, 금불이 와서 의지하니 약서여래라. 화랑의 가문이고 법사의 친족이니, 위엄 있는 공족公族이며, 만세에 무궁하리라.

세계 : 아버지는 위화랑이고 (어머니는 준실이다) … 아버지는 … 손孫이다. … 준명俊明의 … 어머니는 자아紫我이니 곧 …. 문장을 …. 공은 그 맥을 얻었다. …


[5세 풍월주 사다함]-------------------------------------------------------------------------------------------------------------------

5세 사다함斯多含은 구리지仇利知의 아들이다. 처음 비량공比梁公이 벽화후碧花后를 그리워하여, 늘(후后의) 뒷간에 갔다. 법흥대왕이 비량공을 사랑하여 금하지 않았다. 과연 후后와 정을 통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래서 구리지라 하였다. 구리지는 아름답기가 벽화후와 같고, 담력은 비량공과 같았다. 자라서 낭도의 무사武士를 좋아하였다. 금진낭주金珍娘主와 통하여 토함ㆍ새달ㆍ사다함을 낳았다. 새달은 이화공의 첩이다.
처음에 우리 … 법흥대제 …. 위화랑 … 옥진궁주 …. 제帝가 … 이에 … 구진仇珍을 …(하고) 이윽고 다시 위화랑과 더불어 좋아하여 … 금진의 아름다움은 비록 옥진보다 못했으나… 옥진은 법흥을 섬겨 아들을 낳았다. 입종立宗의 (아들이)41) … 곧 숙흘종肅訖宗이다. 법흥이 죽었는데崩 입종 또한 죽었다薧42).

[구리지]
… 옥진 형제와 친하지 않았다. 금진은 이에 문상에 물러나 살았다. … 구리지는 낭도를 모아 금진을 원화源花로 삼고자 하였다. 이보다 앞서 구리지는 숙위두상宿衛頭上으로서 금진의 명을 전殿 아래에서 늘 받들었다. 구리지는 마음 속으로 그것을 원해, 천주사天柱寺43)에서 무릇 5년을 발원 하였는데, 금진이 비로소 홀로 살게 되었다. 구리지는 이에 날마다 가서 원화가 될 계책을 바쳤다. 금진은 나이가 또한 적었기에 명리를 탐하여 허락하였다.
구리지는 또 …. 원화라는 의협의 인물로, 낭도들과 더불어 죽음으로써 의리를 지킨다는 마음을 보이지 않으면 …. 금진이 말하기를 … 구리지… 낭주에게 … 한 것이 5년 전의 일 …의 일이다. 금진이 이에 한탄하여 말하기를 “나는 … 바라 … 무리가 받들었다…. 너의 처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족하다” 하였다. …말하기를 “네가 나에게 명령하여 …”하였다. 구리지가 말하기를 “신은 … 아직 …의 몸 … 허락합니다.”하였다. 금진이 말하기를 “네가 나의 집 … 황󰏚(黃󰏚)의 귀함으로 뒷간에서 사통을 허락하여 …” 하였다.
구리지가 말하기를 “신이 나이가 젊어 동東 … 어찌 업신여김이 이와 같은가” 하였다. 금진이 …“일찍이 가득했을 따름이다. 지난날에 너로서 … 아버지이다. 오늘은 네가 …아니다”하였다. 구리지가 이에 기뻐 말하기를 “신은 이로부터 더욱 힘써 …”하였다. 정이 무르익었다. 옥진궁주는 …서로 혼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금진은 …당하여 …. 사다함 …을 알고 장군 주령珠玲을 따라 출정하여 독산에서 죽었다.44)

[금진]
처음에 구리지에게는 용양신龍陽臣 설성薛成이 있었는데, 모습이 아름답고 교태를 잘 지어 보였다. 구리지가 출정하여 자리를 비우자, 금진과 정을 통하여 설원랑薛原郞을 낳았다. 동(륜)태자가 탄생하였을 때, 사도황후가 금진을 불러 유모乳姆45)로 삼았는데, 이로 인하여 사다함 형제도 궁중에서 자랐다. 그 때 왕의 나이가 아직 한차 때여쓴데 태후가 빈공嬪供을 허락하지 않았다. 왕도 또한 사도思道와의 정이 각별하여 아직 다른 사람을 총애하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사도는 산후 3개월간 왕과 관계를 갖지 않았다. 금진은 이에 교태를 보이자 왕은 슬라瑟羅에 갈 때 (금진을) 황후궁의 궁인宮人으로 삼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을 하였다. 황후가 그것을 알고 …, 왕이 그것을 걱정하였다. 이에 금진을 …에서 나가 살게 하였다.
…금진은 이에 설성 등, 다섯 사람을 몰래 거느렸다. …다시 불러 조하방부인朝霞房夫人46)으로 삼았다. 그 때 …그 어머니에게 간언하여 …이 없도록 …. 금진이 깨끗하지 않다고 말하였다. 왕이 이에 …하였다. 금진이 이에 울며 말하기를 “첩이 불행히도 타락하여 … 사노私奴 설성 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하였다. …설성을 나마奈麻47)로 삼아 돌려 …노奴를 따라서 상桑을 …조하방에 다시 들어가 …. …죽었다. 사다함은 이에 땔나무를 쌓아 …하고자 하였다. 금진에게 물었다. 금진은 울며 말하기를 “우두머리는 …곧 설성입니다”하였다. 왕은 그 장長을 취해 …로 삼았다. …설성은 인하여 또 사랑辛을 하였다. 이 해에 이화랑(이 풍월주가 되고) …토함을 부제로 삼았다. 제帝는 사다함 또한 …에 속하게 …. 또 제帝의 딸을 낳았으니, 이 이가 난성공주暖成公主였다. …스스로 그 도徒와 더불어 백제를 정벌하는 데 따라가 …이 있다. ?찬湌의 위位를 주고 금진을 처로 삼게 하였다. 사다함은 “오히려 …. … 색은 바로 본능입니다. 어머니는 홀로 정해진 짝이 없어야 되겠습니까?”하였다. 사다함은 말하기를 “… 않는가”하였다. 토함이 말하기를 “비록 천한 어머니의 바라는 바이나 제帝가 이미 허락하였으니 소홀히 할 수 없다”하였다. 사다함은 이에 금진이 설성에게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고, 따로 살며 사택賜宅과 본장本庄에 들어가지 않았다. 옥진궁주가 듣고 크게 칭찬하여, “이 아이는 반드시 그 아버지를 귀하게 할 것이다” 하였다.

[사다함]
나이 12살에 문노文弩를 따랐는데 격검擊劍에 능하였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아버지의 풍모가 있었다. 낭도들이 서로 일러 말하기를 “구리공의 음덕으로 받은 복이다”하였다. 사다함은 밖으로 굳세고 안으로 어질었고 우애에 독실하였다. 비록 설성에게는 거역하였으나, 어머니를 섬기는 효도는 지극하여, 금진 또한 이로써 가장 …하였다. 매번 4절節을 맞아 󰏅유택(󰏅遊宅)48)의 …에 들어가 …. …하여금 … 하였다. 제帝는 사다함이 춤을 잘 추는 것을 알고 … 금진은 짝하여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보고 사랑辛을 받고 돌아왔다. … 스스로 기뻐하여 사랑을 하지 않고 돌아왔다. … 울며 …. 금진이 묻기를 “…에 사랑…” 하였다. 사다함이 말하기를 “어머니와 더불어 임금이 짝이 되니 아들이 어찌 영광이 아닙니까?” 하였다. 숙흘종공이 장차…. …연이어 지나갔다. 금진이 바라보고 …. 사다함이 말하기를 “어머니…”하였다. …나가 숙흘종의 고삐를 잡고 말하기를 “…”라 하였다. …말하기를 “어머니는 어머니이다. 의義는 이미 끊어졌다”하였다. …. “…끊을 수 없다” 하였다. 숙흘종이 이에 들어가 금진을 보았다. …. “…끊을 수 없다”하였다. 숙흘종이 이에 들어가 금진을 보았다. …. “…어머니로서 아들에게 절하는가” 하였다. 금진 …. …모자의 정이 회복되었다. …울었다. 이로써 …  대신 사랑辛하여 딸 준영을 낳았다. 아름답기가 … 또한 사통하였다. 그러나 진종眞宗을 두려워 하여 감히 … 하지 못했다. …. …종宗이 말하기를 “고수瞽瞍의 아들 대순大舜49)… 있습니까”하였다. 이에 낭도를 거느리고 ?영(?英)을 숙흘종에게 …. 벗을 위함이 이와 같았다.

[가야 정벌]
개국開國 11년(561)…(양)화공주兩花公主가 죽었다薧. 왕위를 이은 임금 도설지50)가 야녀野女로써…월광月光과 더불어 영토를 다투어 야인野人을 많이 거느리고 왔다.51) 제帝가 태종공苔宗公에게 명하여 진압하도록 하였다. 사다함이 선봉이 될 것을 청하였으나, 제帝는 사다함이 어리기에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사다함은 사사로이 낭도를 거느리고 몰래 갔다. 금진이 설성에게 “당신은 무품無品52)인데 여러 차례 나라의 은혜를 입었다. 이때에 나의 아이를 지켜 주지 않으면 나의 남편이 아니다”하니, 설성이 “내가 원하는 바입니다”하였다. 이에 (설성은) 사다함의 휘하에 나아갔다. 야인을 대파하니 제帝가 기뻐하며 사다함을 귀당비장貴幢裨將으로 삼았다. 그 때 (사다함의) 나이가 16살이었다. 정병精兵 5천을 거느리고 전단문栴檀門으로 달려들어가 백기를 세웠다. 가야伽倻…. 그 성을 …하고 도설지와 야녀를 사로잡았다. …군이 계속하여 이르러 가야군을 대파하였다. 구九…. 공으로 전田을 내려 주자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포로로한 생구生口는 모두 풀어 주어 양인良人으로 만들었다. …대왕이 (사다함을) 더욱 중하게 여겨 알천閼川의 땅을 주었으나, 굳게 사양하고 받지 않다가, 불모지 수백 경頃53)을 택하여 …을 받으며 말하기를 “이 (정도면) 사람으로 하여금 족히 근면하게 할 수 있다. …일이 없으면 입농入農하는 것이 나의 무리들의 …이다”하였다.
그 즈음 이화공二花公은 왕의 총애를 많이 받아 낭도에 대하여 싫증이 났으므로 공을 5세 풍월주로 삼았다. 공의 포제胞弟54) 설원랑薛原郞을 부제副弟로 삼았는데 나이가 13살 이었다. … 설성이 출전하여 사다함이 …에 당하여 …하고 죽었다. 이에 이르러 무리들이 기려 말하기를, 그대의 설성은 ….

[무관랑]
공의 신하인 무관랑 또한 공이 많았는데 미천하여 보답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 공이 그것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금진낭주는 평소에 색에 빠졌다. 많이 …. 무관랑을 몰래 들였다. 무관랑은 사다함을 대하기가 어려웠는데 …. (사다함이) …위로하여 말하기를 “네가 아니라, 어머니 탓이다. 나와 더불어 …. 벗으로 … 어찌 작은 혐의를 문제 삼겠는가”하였다. 금진이 듣게 되어…. 스스로 도리를 알았다. 나에게 너그러운 것은 바로…. … 무관랑 … 함께 출입하였다. 낭도들 중에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무관랑은 도망하고자 하여 … 밤에 궁의 담宮墻을 넘다가 구지溝池55)에 떨어져 다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사다함의 죽음]
공은 애통해 하였다. 공 역시 여위고 병들어 7일만에 숨이 끊어지려 하니, 금진은 공을 품에 안고 발을 구르며 말하기를, “나 때문에 너의 마음이 상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어찌 살겠는가”하였다. 공이 서서히 눈을 뜨고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운명입니다. 내가 어찌 어머니 때문에 마음을 상하였겠습니까? 살아서 어머니의 큰 은혜를 갚을 수 없었는데, 죽어서 저 세상에서 갚겠습니다”하였다.

[미실과의 관계]
대개 공은 원래 미진부공未珍夫公의 딸 미실美室을 사모하였다. 미실 또한 공을 좋아하였으나, 태후의 명으로 세종공世宗公에게 시집을 갔다. 이로서 …발發 …심心 … 어머니에게 간하지 않았고 형을 따랐다. ≪형은 숙흘종이다≫ <청조가靑鳥歌>를 지어 …. 청조靑鳥는 미실을 가리킨다. 공은 …. …의衣… 노래를 지어 보낸 까닭이다.
공公…. 낭도들이 이화공을 풍월주로 복립할 것을 청하니, 이화공이 말하기를, “…의 사위이다. 사다함은 …. …여로 골諸骨56) 중 세종전군世宗殿君같은 이는 없다” …의 무리들이 이에 세종을 세워 풍월주로 삼았다.

찬하여 말한다 : 비량比梁이 물려 준 정기精氣이고 위화랑의 손이라. 적을 친 공이 높은데 스스로 불모지에 머물다. 청조가 산중에 있고 송백松柏이 길이 푸르도다.

세계 : 아버지는 구리지仇利知이고 할아버지는 비량比梁이며, 증조는 비지比知57)이고 고조는 비태比太이다. …미해공美海公의 딸이다. 처음에 내물왕奈勿王 …. … 후궁으로 산황山凰을 낳았다. 실성왕實聖王이 명하여 내물奈勿 …. 󰏅󰏅왕이 서자, 후궁으로 들이고, 이어 사랑하는 아우寵弟에게 내려 주었다. 실󰏅(實󰏅)…미해공 …. 혹은 말하기를 심황心凰은 실상공實相公의 딸이라고 한다. 눌지왕訥祗王이 이에 심황을 명하여 내물신궁奈勿神宮의 주主로 삼았다. 비지공은 이로서 …내물…손이다. 묘량부인妙梁夫人을 아내로 맞아 비량공을 낳았다. 묘량…왕녀이다. 또한 대원신통大元神統에서 나왔다.


[6세 풍월주 세종]-------------------------------------------------------------------------------------------------------------------

6세 세종世宗은 태종공苔宗公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지소태후只召太后이다. 진흥대왕大帝과 더불어 어머니가 같다同胞.58) 세종전군의 초명初名은 의종義宗이다. 단아한 아름다움과 멋진 풍채를 가졌다. 태후에게 효성스럽고 대왕에게 충성하였다. 대왕 또한 매우 사랑하여 말하기를 “나의 막내 아우다”하였다. 항상 곁에 있으며 (대왕을) 모시도록 하였다. 조금도 금지하고 묶어두지 않아도, 공의 타고난 바탕이 극히 좋아 잘못됨이 없었다.

[태종공]
태종공이 일찍이 일이 있어 사사로이 제帝를 찾아뵐 때, 공이 시측하였다. 태종공은 제帝에게 먼저 절하고 先拜 공에게 다음 절次拜을 하였다. 공은 황망하여 나아가 부축하며 감히 절을 받지 않았다. 제帝가 말하기를 “이 노인은 비록 중신重臣이기는 하나 나의 신하이다. …몸으로 너에게 절하지 않을 수 없다”하였다. 공이 울며 말하기를 “아버지는 …입니다. 어찌 신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덕에 대한 보답을 하고자…”하였다. 태종공이 놀라 말하기를 “태후는 신성하여 지아비 없이도 전군殿君을 신화 할 수 있다.59) 전군은 신자神子이다. 어찌 감히 신하가 아버지가 되겠는가”라 하였다. (세종은) 태종공을 안고 울며 말하기를 “일찍이 모후에게 전󰏅(殿󰏅)…나의 …를 나의 아버지라고 하셨는데,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하였다. 제帝는 “…(태후의) 신성과 예덕睿德으로 중신을 총애함으로써 나의 …이 있으니, 또한 나의 집의 경사스러운 행운이다. 늙은 신하는 어찌 반드시 피하는가. …나의 아우이다”하였다. 또한 공에게 허락하여 …에게 아버지라 부르도록 하였다. …공은 처음으로 부자의 상견례를 …왕의 은혜가 끝이 없음을 감사하였다.

[세종과 미실의 만남]
공公은 …와 더불어 …. 몇 달 전에 태후는 공경公卿의 미녀들을 택하여 궁중에 모아 두고 공이 누구에게 마음이 있는지를 보았다. 공은 미실낭주를 가장 좋아하였다. …태후는 이에 제帝에게 묻기를 “미실의 아름다움… 전군殿君을 …합니까”하였다. 제帝 또한 아름답게 여겨 “오직 어머니가 정할 바입니다. 단 …태종苔宗 노신이 알지 못해서 …”하였다. 태후 또한 그렇게 여겼다. 이에 태종을 불렀다. 미실로서 의논하여, “며느리를 얻는 데 지아비에게 의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니, 태종이 “폐하의 집안 일에 어찌 감히 말씀을 드리겠습니까?”하였다. 태후가 “이 처녀는 곧 영실英失의 손입니다. 나의 우군右君60)으로 영실은 나에게 잘못이 많았기에 꺼렸습니다. 그리하여 좋아하지 않게 되어 결정하기 어려운 바 되어 묻는 것입니다.”하니, 태종이 “영실은 (법흥의) 총신입니다. 유명遺命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지나치게 나무라서는 안 됩니다. 전군이 이미 좋아한다면 또한 황후 ≪사도≫를 위로할 수 있으니 옳지 않겠습니까?”하였다. 태후가 크게 기뻐하여 “사랑하는 지아비의 가르침이 없어다면, 나는 잘 못할 뻔했습니다”하였다. 이에 미실로 하여금 궁에 들어오게 하였다. 섬긴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공과 더불어 상통하였고, 정의情意가 얽혀 깊어졌다. 그 때 태후는 숙명공주를 사랑하여 장차(진골정)통을 잇고자 황후를 폐하려고 하였다. 황후는 곧 미실의 숙모였다. 이 같은 계책이 황후에게 누설되니, 황후는 울면서 제에게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제는 본래 황후를 사랑했기 때문에 태후의 헐뜯음을 듣지 않고 황후를 더욱 사랑하였다.
태후가 노하여 …미실을 위하여 걱정하여 태후께 나아가 간하였다. 이에 태후는 미실을 (불러들인)것을 후회했다. 이에 미실을 불러 꾸짖기를 “너로 하여 전군을 받들게 한 것은 단지 옷을 드리고 음식을 받드는 것이다. 그런데 감히 사사로이 색사色事로 전군을 … 어지럽혔으니, 죄를 용서 할 수 없다”하고 출궁을 명하였다. …진종전군眞宗殿君의 딸 융명肜明을 정비正妃61)로 삼았다. 제는 따져 ….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따라갔다. 미실이 이미 돌아와서는 슬퍼 울면서 먹지 않고 …. …일찍이 준영俊英의 일로써 미실에게 …한 바 되어 …. … 사다함과 같았다.
이에 이르러 미실은 …. “… 일찍이 지아비를 맞는 데는 마땅히 사다함과 같이 …하여야 한다. 무릇 부귀라는 것은 한때이다. 나는 …. 한때 왕자와 전군을 모두 앞에서 배견하였으나 지금은 … 이와 같다”이에 사다함공을 불러 위로하였다. 미실은 이에 정󰏅이 일어나 서로 기뻐하였다. 출정할 때에 이르러, 노래로서 보냈다. 이르기를:

         [풍랑가]62)
     바람이 불다고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
     물결이 친다고 하되 임 앞에 치지 말고
     빨리빨리 돌아오라 다시 만나 안고 보고
     아흐,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라뇨

사다함은 이에 온갖 방법으로 위로하고 갔다.
전군이 듣고 … 괴로워하였다. 태후가 전군이 상심할까 염려하여 미실을 다시 입궁시키자, 전군은 기뻐 미친 듯이 달렸다. 태후는 부득이 다시 섬기도록 명하였다. 미실은 원비元妃의 첩이 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색공色供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전군은 태후에게 청하여 미실을 전군부인殿君夫人으로 삼고, 융명은 차비次妃로 삼았다.63) 융명이 불만으로 여겨 물러나 살 뜻을 비쳤다. 미실은 전군과 더불어 정을 배반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마침내 융명을 내쫓았다.
사다함이 돌아왔을 때 미실은 이미 궁중에 들어가 전군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까닭에 사다함은 <청조가靑鳥歌>를 지어 슬퍼하였다. 내용이 몹시 구슬퍼 그 때 사람들이 다투어 서로 암송하여 전하였다. 해解64)하여 이르기를 :

         [청조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나의 콩밭에 머무는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너 나의 콩밭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다시 날아들어 구름 위로 가는가
     이미 왔으면 가지 말지 또 갈 것을 어찌하여 왔는가
     부질없이 눈물짓게 하며 마음 아프고 여위어 죽게 하는가
     나는 죽어 무슨 귀신 될까, 나는 죽어 신병되리
     (전주)에게 날아들어 보호하여 호신護神65)되어66)
     매일 아침 매일 저녁 전군 부처 보호하여
     만년 천년 오래 죽지 않게 하리

라 하였다.

죽음에 임하여 이화공二花公이 감싸안고 슬퍼하며 “그대 아우는 아직 어린데, 그대가 만약 일어나지 못하면, 누가 계승할 것인가”하였다. 이에 사다함이 “신의 누이인 미실의 남편이, 모랑공毛郞公의 고사故事에 의거하면, 또한 가능하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이에 이화공이 태후에게 정하기를 청하니, 태후가 “나의 아들은 어리고 약하다. 어찌 능히 될 수 있는가”하였다. 미실이 세종에게 권하기를 “사다함 종형≪󰏚질이다. 당시는 사람들이 서로 좋아하면 형제라 하였다. 그래서 형이라 불렀다≫이 나를 사모하다가 죽었습니다. 죽음에 임하여 한 말 한 마디를 들어 주지 않으면 장부가 아닙니다”하였다. 세종이 옳게 여기고 태후를 설득하여 허락을 얻어, 6세 풍월주가 되었다. 인하여 설화랑을 부제로 삼았다.

[미실의 꿈]
천주사天柱寺에서 사다함의 명복을 빌었는데, 그 날 밤 과연 미실이 꿈에 사다함공이 품에 들어오며 “나와 네가 부부가 되기를 원하였으니, 너의 배를 빌려 태어날 것이다”하였다. (미실이)공에게 아뢰니 공 또한 이상하게 여겼다. 바로 임신이 되어 하종공夏宗公을 낳았다. 하종공은 모습이 사다함과 심히 비슷하였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혹 사다함과 정을 통할 때에 이미 임신을 하고서 입궁하여 낳은 아들이라 하나, 그렇지 않다.

[진골 정통과 대원 신통]
세종은 금지옥엽의 귀한 왕족이었지만, 능히 사다함공의 어루만짐의 도를 이어 낭도를 많이 뽑아 당幢을 이루었고, 도의에 힘써 상하에 두루 미쳤다. 미실이 실로 대궐에 거하며 이끌어 준 것이다. 그 때 동(륜)태자가 이미 장성하였다. 태후는 (태자를) 만호공주萬呼公主와 짝지어 진골 정통을 잇고자 하였다. 사도황후는 대원 신통大元神統을 잇고자 하여 몰래 (미실과) 의논하여 “나의 아들은 좋은 아이이니, 태자와 더불어 서로 친하여 아들을 갖게 되면 곧 너를 후后로 삼을 것이다”하였다. 미실이 크게 기뻐하고 태자와 상통相通하여 임신을 하였다. (그런데) 대왕이 이를 알지 못하고 미실을 들어오게 하여 색공色供으로 모시도록 하였다. 미실은 음사陰事67)를 잘했기 때문에 총애가 날로 중하여져 황후궁 전주殿主에 발탁되었는데, 그 지위가 황후와 같았다. 미실은 사람을 시켜 세종이 밖에서 공을 세우도록 설득하였다. 세종은 이에 출정할 것을 구하였는데, 낭도들이 많이 따랐다.

[원화의 부활]
미실은 이에 설원랑으로 하여금 머물러 있으며 세종의 일을 대신토록 하였다. 총애를 믿고 방탕하여 설원랑과 그의 동생 미생과 (정을) 통했으나, 대왕은 이를 알지 못했다. 미실은 설원랑과 의논하여 “내가 너희들과 사사로운 관계를 가졌는데, 만약 낭도들의 우러러봄望을 잃는다면 곧 세상의 여론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너희들은 어찌 나를 원화로 받들지 않는가”하였다. 설원랑 등이 …. 미실은 이에 왕을 설득하여 “옛날 선제先帝들은 첩을 원화 …. 총첩寵妾을 낭도로 하여금 받들게 하여 함께 남도南桃에서 조알을 받습니다. … 첩은 폐하의 총애를 지극히 받고 있습니다. 아직 … 없습니다. 세종이 낭도를 많이 거느리고 지방에 있는데, 만약 첩이 … 변고가 있으면 첩이 원컨대 스스로 원화가 되어 낭도를 모두 거느리는 것…. … 기쁘게 여겨 세종에게 알려 풍월주를 물러나게 하고 미실을 받들어 원화로 삼았으며, 설원(랑)과 미생을 봉사랑奉事郞으로 삼고 금진을 화모花母68)로 삼았다.
이에 세종은 낭도를 모두 해산하고 돌아와서 “새 원화는 나의 옛 부인이다. 너희들은 불평하지 말고 잘 섬기도록 하라”하였다. 낭도들은 눈물을 흘리고 울며 물러가지를 못하였다. 제가 명하여 설원과 미생 두 화랑이 낭도의 많은 무리를 통솔하여 조알케 하였다. 대왕과 전주殿主는 함게 곤룡포와 면류관을 갖추어 입고 나와, 남도南桃에서 조알을 받고 잔치燕饗를 크게 베풀었다. 원화 제도는 폐한 지 29년 만에 다시 부활하였다.
이에 연호를 고쳐 대창大昌69)이라 하였다. 이 날 밤, 제와 미실은 남도의 정궁正宮에서 합환을 하였다. 낭도와 유화遊花들로 하여금 새벽까지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서로 예를 갖추지 않고 합하게 하였다. 성중의 미녀로서 나온 자가 또한 만중萬衆이었다. 등불의 밝음이 천지에 이어졌고, 환성이 사해의 물을 끓어오르게 하였다. 제와 원화가 난간에 다달아 구경을 하였다. 낭도들이 각기 한 명의 유화를 이끌고서 손뼉치고 춤추며抃舞 그 아래를 지나갔는데, 그 때마다 만세 소리가 진동하였다. 제의 기쁨이 매우 커서 원화와 함께 채전彩錢을 무리에게 던져 주며 말하기를, “저들도 각기 자웅雌雄이고 나와 너도 또한 자웅이다”하였다. 미실은 몸을 완전히 돌려 품에 파고들며 말하기를, “비록 숙모(사도)의 존귀함이라도 이 같은 즐거움은 없었을 것입니다”하였다. 대개 미실이 색이 아름답고 교태를 잘 부리는 것은 옥진玉珍의 기풍을 크게 가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사다함의 영혼이 늘 미실의 가슴 안에 있으며 좋은 계채으로 도와 주는 때문이라고 하였다.

[동(륜)태자의 죽음]
미실은 본래 동태자銅太子를 … 하였는데 정숙한 어머니가 전주로 들어가니, 제가 백 년 후 …할까 염려하여 감히 태자를 거부하지 못하고 몰래 서로 이어 만났다. 태자는 …함이 없이 구함이 더욱 심하여졌다. 미실은 심하게 많은 것이 드러날까 염려하여 미생과 의논하였다. 태자가 밖으로 나가 놀 때 유화 중 아름다운 사람을 많이 천거하였다. 󰏅자와 더불어 미생의 낭도가 날마다 밖에서 황음한 짓을 일삼았다. 홍제鴻濟 원년(572) 3월 동태자銅太子가 보명궁宝明宮의 큰 개에 물리는 일70)로 인하여 죽었다. 태자의 종인從人을 가려 보니 미실의 낭도에 속한 자가 많았다. 미실 …. 대왕 또한 새어 나온 말을 얻어들은 바로는 미실이 방탕하여 …이 없어 …. 세종이 부름을 받고 들어와, 미실이 원화에서 물러나는 것을 승인하였다. 그리고 세종을…하여 다시 하였다.
세종이 풍월주가 되었다. 미실은 이에 세종에게 권하여(말하기를 “내가”) 이미 원화를 물러났고, 전주가 그대와 함께 조용히 머물러 있기를 원하니, 그대는 어찌 다시 풍월주가 되려 하는지요? 빨리 설원랑에게 물려주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하였다. 세종은 이에 설원랑에게 풍월주의 지위를 전하여 주었다. 그 때 금태자金太子71) 또한 미실을 좋아하여 설원ㆍ미생 등과 서로 사귀어 정을 맺고 방외우方外友72)가 되었다. 미실이 비록 이미 출궁하여 깨끗하게 살 것(淨業, 즉 念佛)을 공언하였으나, 가만히 있지 않고 금태자와 더불어 후사後事를 약속하였다. 제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자제하지 못하고 미실을 다시 불러들여 의논하였다.

[진지왕의 즉위와 폐위]
제가 죽고崩 금(륜)태자가 (왕위에) 즉위하였다. 인하여 미실을 받아 들였는데 세상의 여론으로 황후로 봉하지 못하였다. (진지왕은) 또 다른 사람에게 빠져 미실을 심히 총애하지는 않았다. 미실은 그 약속을 어긴 거에 노하여 마침내 사도태후와 함께 낭도를 일으켜 (진지왕을) 폐하고 동태자의 아들 백정공白淨公을 즉위시키니, 이이가 진평대제眞平大帝이다. 제는 어리고 미실은 이미 늙었기에 스스로 후궁後宮의 일을 맡아 조정의 일을 제 마음대로 함이 많았다.

[화랑중의 화랑 세종]
세종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청렴결백한 절조를 지켰다. 비록 미실의 뜻에 따라 출장입상出將入相73)하였으나, 깨끗하여 사사로운 마음이 없었고, 크게 체모를 잃는 일이 있으면 즉시 미실에게 간언을 하는데, 눈물을 흘리며 참된 마음을 보였다. 미실 또한 감동하여 그를 중히 여겼다. 나이 들어 다시 서로 화합하였다. 아! 세종공은 태후에게 효도하고, 대왕에게 충성스러웠으며, 황후의 아들로서 미실에게 정절을 바쳤다. 스스로 그것을 일생의 일로 삼았다. 평생토록 한 사람도 책망하지 않았고, 한 소송도 그릇되게 판결하지 않았다. 진실로 화랑 중의 화랑이었다.

찬하여 말한다 : 태후의 사자私子이고 상국相國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청아하고 높은 표상은 화랑의 전형이다.

세계 : 어머니는 지소태후인데 초명初名은 식도부인息道夫人이고 법흥왕의 딸이다. 처음에 입종공立宗公에게 시집을 가서 진흥대왕 대제를 낳았다. 법흥대왕의 유명으로 영실공을 계부로 맞이하여 황하공주黃하公主를 낳았다. 영실공이 멀리하지 않았는데 …. 권신權臣들이 물리쳤다. 이에 병부령兵部令74)을 …. … 숙명공주 및 공公…. 태종苔宗의 아버지는 아진종阿珍宗이며 곧 습보공習宝公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보옥공주宝玉公主인데, …의 딸이다. 습보공은 곧 내물왕의 손자이다.75) 지소只召의 어머니는 보도황후保道皇后이며 소지왕의 딸이다. 보도의 어머니는 선혜황후善兮皇后인데 내숙공乃宿公76)의 딸이다. 선혜의 어머니는 조생부인鳥生夫人인데 눌지왕의 딸이다. 조생鳥生의 어머니는 아로阿老이고, 아로의 어머니는 내류內留이며, 내류의 어머니는 광명光明이고, 광명의 어머니는 아이혜阿爾兮이고, 아이혜의 어머니는 홍모紅帽이다. 홍모의 어머니는 옥모玉帽이다. 미추대왕味鄒大王이 광명을 황후로 삼으며 후세에 알려 말하기를 “옥모의 인통姻統77)이 아니면 곧 황후로 삼지 말라”하였다. 까닭에 세상에서 이 계통을 진골 정통78)이라 한다. 옥모부인은 곧 소문국召文國79)의 왕녀인 운모공주雲帽公主가 구도공仇道公에게 시집가서 낳은 사람이다. 옛날부터의 진골이 아니다.80)


[7세 풍월주 설화랑]-------------------------------------------------------------------------------------------------------------------

7세 설화랑薛花郞은 처음 이름이 설원랑이다. 금진낭주의 사자私子이다. 그 아버지인 설성은 낭도로서 모습이 아름답고 교태를 잘 부려 구리지의 용양신龍陽臣이 되었다. 이로 낭주娘主와 통通하여 (설원랑을) 낳았다. 풍채가 아름답고 옥적玉笛을 잘 불었으나, 출신이 한미하여 낭도들이 예속시켰다. 낭도들은 감히 여러 말을 못 하였다. 미실은 늘 진귀한 하사품을 보내 주며 설원에게 말하기를 “너의 낭도를 잘 타일러 보냈다”하였다. 설원은 이에 몇 명을 얻어 심복으로 삼았다. 7세 풍월주가 됨에 이르러 미생을 부제로 삼고, 아랫사람들에게 몸을 굽히고 재산을 풀어 주어 사람을 위로 하니, 낭도들이 모두 복종하였으나 아직 미흡함이 있었다.
미실은 이에 설원랑에게 권하여 모랑공毛郞公의 과처寡妻인 준화낭주俊華娘主를 아내로 맞도록 하였다. 낭주는 그 때 나이가 38살이었고 과부로 산 지 18년이었다. 다시 화랑을 얻어 지아비로 삼아 마침내 아들 설웅薛雄을 낳았다. 이에 여러 낭도들이 축하하여 말하기를 “위화랑공魏花郞公의 손자이다”하였다. 다시 불복하는 사람이 없었다.
설원랑은 평소 미실과 더불어 상통相通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더욱 꺼리고 삼가는 것이 없게 되었다. 준화俊華가 이를 알았으나 금할 수 없었다. 이에 앞서 준화俊華의 딸 준모俊毛가 미실을 통하여 동태자와 통通하였다. 이에 이르러 또 금태자에게 (몸을) 바치려고 하였다. 설원이 저지하며 “동태자를 섬긴 일을 성상聖上이 아는데, 또 금태자에게 바친 것을 알면 반드시 우리 부처를 좋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하니,81) 준화가 “낭군의 말이 옳습니다”하였다. 이에 준모에게 명하여 여승이 되게 하였으나, 준모는 따르지 않았다. 설원랑이 꼬여 정을 통하였는데, 1년 정도 지나 임신을 하였다. 준화가 알고 노하여 “태자에게 바치는 것을 저지하고 자기가 갖는 것은 이 무슨 도리인가”하였다. 설원랑은 이에 미실에게 구걸하였다. 미실은 미생에게 (준모를) 아내로 맞도록 하여 일이 평온하여졌다. 준모는 곧 미생에게 가모 미모美毛라는 이름의 설원랑의 딸을 낳았는데, 낭도들은 알지 못하였다.

[문노]
그 때 문노文弩 일파가 세종을 따라 지방에서 전공을 세웠는데, 위位를 얻지 못하여 설원랑에게 불복하고 일문一門을 스스로 세웠다. 이 때에 낭도들이 마침내 나뉘었다. 설원랑의 파는 정통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하였고, 문노의 파는 청의請議가 자기들에게 있다고 하며 서로 상하를 다투니, 미실이 걱정을 하여 세종에게 화합하도록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그런데 진흥대왕이 죽자崩 미실이 비록 새로운 왕(진지왕)에게 총애를 받았다고는 하나 지도부인知道夫人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지도의 아버지 기오공起烏公은 문노와 종형제간이었다. 그러므로 본래 지도는 문노를 따랐다. 이에 왕에게 권하여 문노를 국선國仙으로82) 삼고 비보랑秘宝郞을 부제로 삼았다. 문노의 낭도들은 무사武事를 좋아하였고 호탕한 기질(협기)이 많았다.

[호국선과 운상인]
설원랑의 낭도들은 향가鄕歌를 잘 하고 속세를 떠난 유람(청유)을 즐겼다. 그러므로 국인들이 문도文徒를 가리켜 ‘호국선護國仙’이라고 하였고, 설도薛徒를 가리켜 ‘운상인雲上人’이라 하였다. 골품骨品이 있는 사람들은 설도를 많이 따랐고, 초택草澤의 사람들은 문도를 많이 따랐다.83) 서로 의義를 갈고 닦음을 주로 하였다.

[진지왕의 폐위]
진지대왕眞智大王은 미실 때문에 왕위에 올랐는데84) 색을 밝혀 방탕하였다. 사도태후思道太后가 걱정을 하다가, 이에 미실과 폐위할 것을 의논하였다.85) 노리부공弩里夫公86)으로 하여금 행하도록 하였다. 노리부공은 곧 사도思道의 오빠이다. 미실의 남편인 세종과 더불어 장차 대사를 일으키려 할 때, 문노의 도徒가 불복할까 염려하여 태후의 명령으로 두 개의 도徒를 합쳐 하나로 만들었다.87) 다시 미실을 받들어 원화로 삼고 세종을 상선上仙, 문노를 아선亞仙, 설원랑과 비보랑을 좌ㆍ우봉사화랑左右奉事花郞, 미생을 전방봉사화랑前方奉事花郞으로 삼아 진정시키도록 하였다.88) 이로써 문노의 도徒는 미천한 사람으로 고관에 발탁되는 사람이 많았다. 민간(초택)의 사람과, 투항하고 귀순한 무리는 출세하는 문으로 삼았기에, 문노를 신과 같이 받들었다.89)

[국선과 풍월주]

미실은 이에 설원랑이 문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알고, 문노로써 선도仙道의 스승(어른)으로 삼는다는 명령을 내리고, 설원랑과 미생 등에게 스승으로 섬기도록 하였다. 설원랑의 도徒 중에 불평하는 자가 많았으나, 설원이 “총주(寵主-미실)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하므로 무릎을 굽혀 섬겼다. 이로써 문노의 도徒 또한 설원에게 기꺼이 복종하였다. 미실이 기뻐하며 그 위位를 문노에게 물려 주도록 하였다. (이에) 문노가 “국선國仙은 풍월주風月主보다 아래가 아니고, 또한 그대는 나의 아우인데, 어찌 스승으로 아우에게서 받을 수 있는가?”하니, 설원은 “국선이 비록 전 왕이 설치한 것이지만 풍월의 정통은 아니다. 또 세종전군이 왕자의 귀함으로 오히려 사다함공의 뒤를 이었으니, 하물며 내가 사형(師兄-문노)을 받들어 섬긴 것은 미실의 명이 있었던 까닭인데, 지금 미실궁주가 다시 양위를 명하므로 감히 거역할 수 없다”하였다. 문노가 “궁주가 이미 명령했는데, 신臣 또한 어찌 거역할 수 있겠는가?”하고 뒤를 이었다.

[도맥과 통맥]
화랑의 법에는 후계자가 전주에게 하배下拜를 올리고 칭신稱臣을 한다. 양위하는 날 미실과 더불어 세종이 수레를 같이 타고 이르렀다. 설원랑이 옷을 갖추어 입고, 인부印簿와 검장劒仗을 받들어 미실과 세종에게 바치고, 미실에게 선배先拜하고 세종에게 차배次拜를 하고 물러나 섰다. 이 때 세종이 미실에게 묻기를 “문노는 설원에게 도맥道脉으로는 스승이고 통맥通脉은 아우인데, 어느 자리에 앉아 마땅한가?”하였다.90) 미실이 “설원은 나의 총신이고 또 정통의 형이며, 문노는 비록 스승이나 정도가 아닙니다. 어찌 절을 하지 않을 것입니까?”하였다. 세종이 이에 설원에게 명하며 미실의 옆에 앉도록 하였다. 문노가 옷을 갖추고 무릎으로 걸어 나아가서, 미실에게 먼저 절하고, 다음에 세종에게 절하고, 다음에 설원에게 절하고는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자질이 없다”고 사양하였다. 미실이 이에 인부印符를 주며 “네 형을 욕되게 하지 말라”하였다. 문노가 …을 받았다. … 이에 부서簿書91)를 주며 말하기를 “네 …을 욕되게 하지 말라”하였다. … 설원은 이에 검장劒仗을 주었다. 이에 이르러 미실이(天ㆍ地ㆍ人의) 삼재지법三才之法을 처음으로 행하였다. 그 이후 문노는 설원에게 하배를 하고 칭신을 하였다.
미실이 듣고 기뻐하며 설원에게 “내가 너로 하여금 먼저 굽히게 한 것은 오늘이 있기 때문이다”하니, 설원이 절하여 감사드리며 말하기를 “신의 머리카락 하나와 살갗 하나도 총주寵主의 소유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하였다.

[문노도의 불평]
문노는 국선으로 화랑의 우두머리가 된 까닭에 선화仙花92)라 하였다. 문노의 도徒에 불평하는 자가 있어 문노에게 일러 “선화가 먼저 사師가 되었다가 후에 제弟가 된 것은 궁주가 팔아 먹은 것이 아닙니까?”하니, 문노가 꾸짖어 말하기를 “궁주는 전군이 받드는 바이다. 어찌 감히 말이 있을 수 있는가?”하였다. 이에 그 도徒는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대개 문노의 뜻은 미실을 위한 것이 아니고 세종을 위한 것이었다. 세종이 미실을 지극히 받들고 섬기면서도 오히려 모자람이 있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문노는 굽히지 않을 수 없었다.
설원은 양위를 하고 미실을 따라 영흥사로 갔다. (설원은) 거느린 낭도手徒를 택하여 미실이 출입하는 것을 호위하며 사신두상私臣頭上이 되었다. 후에 미륵선화彌勒仙花라는 이름을 더하였다. 미실에게 끝까지 처음과 같이 한 자는 설원이고, 세종에게 끝까지 처음과 같이 한 자는 문노였다. 성하고 지극하다.

[미실과 설원랑의 죽음]
공은 건원建元 14년(549)에 나서 건복建福 23년(606) 7월에 죽었다卒.93) 그 때 미실궁주가 이상한 병奇疾에 걸려 여러 달 동안 일어나지 못하였다. 공이 밤낮으로 옆에서 모셨다. 미실의 병을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밤에는 반드시 기도하였다. 마침내 그 병을 대신하였다. 미실이 일어나서 슬퍼하여 자신의 속옷을 함께 넣어 장사를 지내며, “나도 또한 오래지 않아 그대를 따라 하늘에 갈 것이다”하였다. 그 때 나이가 58세였다.

[설원랑의 자녀]
공은 5명의 아들과 7명의 딸이 있었다. 정궁부인正宮夫人 준화낭주俊華娘主는 장자인 웅雄, 차자인 잉피仍皮, 적녀嫡女인 정금낭주淨金娘主를 낳고 죽었다. 미실궁주가 개원낭주開元娘主를 아내로 맞도록 명하여 아들 충죽忠竹과 선죽善竹을 낳았고, 딸 개󰏅(開󰏅)와 개천開川, 선월善月, 양월良月 6명을 낳았다. 미실궁주 …. … 보종전군宝宗殿君은 공의 소생으로 되었다. 난󰏅(蘭󰏅)…. 양약공주兩若公主는 곧 나의 조모祖母이시다. 잉피仍皮 … 원효元曉의 할아버지이다. 설씨薛氏는 이 때에 크게 창성하였다.94) … 보다 앞섰다.

찬하여 말한다 : 미실의 신하이고 선화仙花의 시작이다. 불문佛門에 의탁하여 그 아름다움을 더하였다. 훌륭하도다! 깨끗한 이름은 청사에 길이 남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인 충성은 하늘의 복을 열었다.

세계 : 아버지는 설성공이며, 그 출신을 알지 못한다. 그 선조는 고야촌장高耶村長 호진공虎珍公의 후손이다.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從母姓.95) 어머니는 빼어난 미녀로서 일찍이 남도南桃에서 유화遊花로 있었는데, 우연히 좋은 낭도를 만나 상통相通을 하여 잉태를 하였는데, 그대로 서로 헤어졌다. 공이 자라자 화랑의 놀이를 좋아하여, 매일 냇가에서 아이들과 화랑의 놀이를 익혔다. 구리공이 지나다가 그것을 보고 그 아이의 생김새를 기특하게 여겨 불러 그 집을 물었더니, 곧 한 작은 민가96)였다.
그 어머니는 천복賤服을 입고 보리를 찧고 있었다. 맨발을 손으로 가리며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구리공이 가까이 가서 위로하며 그 남편에 대하여 물었다. 목이 메여 울며 말을 하지 못하고 눈물만 절구공이를 적시었다. 한참 후에 “첩은 나이 16살에 유화로서 좋은 낭도를 만나 한번 관계를 가져 이 아이를 낳았습니다. 관계를 가질 때 그 낭도가 말하기를, 부모에게 물어서 결혼을 하는데, 다만 출정을 하면 3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들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려 하였습니다. 첩은 따르지 않고 무릇 14년 동안 믿음을 지켰습니다. 부모 또한 죽고, 모자가 서로 의지하고 있을 뿐입니다”하였다.
구리공이 “너는 아직 나이가 적은데 어찌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지 않고 스스로 고생을 하는가?”하니, 그 어미가 말하기를 “30살 된 여자가 가면 장차 어디로 가겠습니까? 오직 아이가 자라는 것을 기다릴 뿐입니다”하였다. 구리공이 다시 “너를 보니 천한 옷은 비록 더럽지만 얼굴이 수려하며 살결이 부드럽고 희니 더러운 곳에 있을 인물이 아니고, 마치 먼지더미에 있는 백옥과 같아서 도리어 사랑할 만하다. 네가 말한 좋은 낭도는 그 아름다움이 나와 비교하여 어떤가?” 하니, 어미가 말하기를 “귀인께서는 농담하지 마십시오. 첩의 추함이 어찌 감히 고귀한 분을 평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좋은 낭도라는 사람 역시 평범한 낭도에 불과하니 …. 귀인과 비교하여 만 분의 일이라도 되겠습니까?” 하였다.
구리공이 “나는 … 그 좋은 낭도인즉 그 낭도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내가 마땅히 …”라 하니, …“귀하신 분이 어찌 농담을 하십니까? 첩은 이것이 무엇 … 그 낭도가 살았다면 반드시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지 않은 것이 오래된 것은 정征에서 죽은 것입니다. 첩은 기다리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됩니다”하였다.
구리공이 …말하기를 “오늘은 곧 너의 길일이다. 보리밥을 지어 올 수 있는가?”하니, 어미가 기뻐 말하기를 “천한 음식을 받들어 올리기에 부족하지만, 감히 명과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였다. 이에 (공이) 한상에서 야채로 된 음식을 다 먹고 말하기를 “우리 부인吾婦의 음식이 심히 맛있다”하였다. 마침내 이끌어 사랑을 하려 하니, 어미가 간하여 멈추게 하며 “첩은 몸을 깨끗이 한 지 14년이 되었습니다. 마을의 젊은이들이 범하고자 하였는데, 첩의 의지와 기개를 굴복시키기 어려워 서로 경계하여 보호하여 준 까닭에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하루아침에 그것을 그르치면 마을의 무뢰한 자들이 당연히 …이르면 내일 어떤 놈의 소유가 될지 모릅니다. 이와 같이 되면 모자의 관계는 끊어집니다. 귀한 분이 비록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감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불쌍히 여겨 용서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하였다.
(이에) 구리공이 웃으며 “나는 곧 비량공比梁公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를 첩으로 삼는데 감히 누가 너를 범하겠는가?”하니, 어미가 크게 놀라 “뜻하지 않게 오늘 이같은 큰 경사가 있습니다. 첩은 감히 여러 말을 않겠습니다. 바라건대 우리 어르신 스스로 좋을 대로 하십시오”하였다. 곧 목욕을 하고 사랑을 받았다. 구리공은 새로운 집을 짓고, 그 향鄕을 봉하여 주었다. 향인들이 영광스럽게 여겼는데, 그 향을 ‘대행大幸’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리하여 설성공은 구리공의 신하의 지위를 얻었다. 구리공은 그 출신이 한미한 것을 염려하여 급간 설우휘薛優暉의 가문에 소속시켜 벼슬길을 열고 󰏅지(󰏅知)97)로 발탁하였다.
구리공이 금진낭주와 통通하게 되자, 설성공은 그 사이에서 명을 받들었다. 금진낭주가 그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몰래 통하였다. 구리공이 전쟁에서 죽자, 곧 더불어 함께 살아 공을 낳았다. 설성공의 어머니 또한 구리공의 서자 3인을 낳았다.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금진의 아버지는 위화랑이고 어머니는 오도낭주吾道娘主이다. 오도의 어머니는 선혜황후이고, 아버지는 묘심랑妙心郞인데 곧 천주공天柱公의 아들이다. 얼굴이 아름답고 색사色事98)를 잘 하여 후궁들과 더불어 상통相通을 많이 하였다. 선혜황후가 복을 빌러 절을 찾아 법에 따라 약속하여 … 삼생三生 …. 묘심妙心이 복주伏誅99)되었다. 선혜황후는 진골 정통으로 … 제주祭主로 삼았다. 묘심랑이 …에서 먼저 나오고 …. 남해왕의 종자從子100)의 후손이다.


[8세 풍월주 문노]-------------------------------------------------------------------------------------------------------------------

[가야국의 문화공주 또는 야국왕의 공녀]
8세 문노文弩는 비조부공比助夫公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가야국 문화공주文華公主다. 혹은 문화공주는 야국왕野國王이 바친 여자貢女라고 한다.101) 『호조공기好助公記』에는 ‘북국왕녀北國王女’라고 되어 있는데, 문노는 스스로 가야가 외조라고 말하였으니, 북국은 가야의 북국일 것이다. 법흥대제가 가야를 나누어 남ㆍ북으로 하였는데,102) 이뇌異腦를 북국 왕으로 삼고 양화공주兩花公主로 처를 삼았으며, 청명靑明을 남국 왕으로 삼았다. 얼마 되지 않아 이뇌의 숙부인 찬실贊失이 이뇌를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 때 호조공好助公이 가야에 사신으로 가서 책망하였다. 이보다 앞서 찬실은 야국 왕의 사위가 되었는데, 문화공주는 생각건대 틀림없이 찬실의 딸일 것이다. 처음 호조공의 첩이 되었는데, 비조부공과 더불어 몰래 통하여 공을 낳았다.

[가야의 외손]
공은 어려서부터 격검을 잘 하였고 의기義氣를 좋아하였다. 가야가 반기를 들자, 사다함이 동행을 청하였다. 문노가 말하기를 “어찌 어미의 아들로서 외조外祖의 백성들을 괴롭히겠는가”하였다. 마침내 가지 않았다. 나라 사람 중에 비난하는 자가 있자, 사다함이 “나의 스승은 의인義人이다”하였다. 가야에 들어가자 함부로 죽이지 말도록 주의를 주어 그 뜻에 보답하였다. 세종이 (풍월주의 지위를) 잇자, 그 낭도가 그에게 속하였다. 앞서 호조공이 가야의 일을 잘 하여 자주 사신을 갔다. 비조공比助公 역시 (그 뒤를) 이었는데, 공을 세워 청화공주靑華公主의 딸 청진공주靑珍公主에게 장가들었다. 청진공주가 법흥제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비조공은 요직에 발탁되었다. 그 권세가 일곱 총신과 더불어 막상막하였다. 비조공은 형세를 잘 엿보아 몰래 영실공英失公을 따랐으며 신하로서 섬겼다. 건원建元103) 2년 (537) 제가 장차 영실공을 부군副君으로 삼아 왕위를 넘겨주려 하였는데, 따르지 않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비조공을 병부령兵部令으로 삼아 군대를 통솔하게 하였다. 총신 중에 옳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소태후가 정권을 장악하자 비조공을 물리치고 등용하지 않았다. 비조공은 이에 영실공과 더불어 물러나 머무는 곳에서 … 바둑 따위를 두며 답답한 마음을 달랬다. (문노)공은 스스로 …이 되어 가야파 일도一徒를 모아 …을 이루었다. … 자가 배척하고 비난하였다.

[불신지신不臣之臣]
옥진궁주가 …을 근심하여 … 화랑에게 보호하게 하였다. 이화공이 공을 사다함의 스승으로 삼고 낭도로 하여금 공경하여 받들도록 하였다. 지소태후가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이화공이 “천자에게 아직도 신하 노릇을 하지 않는 신하가 있는데,104) 하물며 선도는 지조가 굳고 인격이 결백하고 기품이 높으니 한 가지 법으로 규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신의 별파유군別派遊軍105)입니다”하였다.
개국開國 4년(554), 공이 17세에 무력武力을 따라 백제를 쳤다. 공이 있었는데 보답을 받지 못하였으나 개의치 않았다. 5년(555) 북한北漢에 나가 고구려를 쳤다. 7년 국원에 나가 북가야를 쳤다. 모두 공이 있었으나, 보답을 받지 못하였다. 부하 중 불평하는 자가 있으면, 위로하여 “대저 상벌이라는 것은 소인의 일이다. 그대들은 이미 나를 우두머리로 삼았는데, 어찌 나의 마음으로 그대들의 마음을 삼지 않는가”하였다.
세종이 6세 (풍월주)가 되자, 친히 집으로 찾아와 “나는 감히 그대를 신하로 삼을 수 없소. 청컨대 나의 형이 되어 나를 도와주시오”하였다. 말이 심히 간절하여, 공이 이에 굽혀 섬겼다. 세종은 이에 (진흥)제에게 말씀을 드려 이르기를 “비조부의 아들 문노는 고구려와 백제를 치는 데 여러 번 공이 있었으나, 어미로 인하여 영달하지 못하였으니,106) 나라를 위하여 아까운 일입니다”하였다. (진흥)제가 이에 급찬級湌의 위位를 내렸는데, 받지 않았다.
낭도 중에 금천金闡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백운白雲과 제후際厚를 위하여 사사로이 사람을 죽였다. 조정에서 벌주려고 하자, 세종공이 이르기를 “의리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상은 가하나 벌은 불가하다”하였다. 이에 작爵을 주어 기렸다. 이로써 공의 낭도들이 많이 세종공에게 귀의하였다.
사도황후 역시 이름을 듣고 몰래 도우며, 이끌어 자기 편을 삼았다. 세종공이 출정하자, 북한산에 따라가 고구려병을 여러 차례 무찔렀다. 미실 궁주가 불러서 봉사奉事로 삼으려 하였으나, 승낙하지 않았다. 진지眞智가 즉위하자 지도황후가 일을 꾸미고 발탁하여 일길찬一吉湌을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

[진지의 폐위와 8세 풍월주]
세종이 사도의 밀조密詔를 받고 장차 진지를 폐위시키려 하며 공을 불러 묻기를 “… 위에는 발탁하여 등용한 은혜와 또한 황후와 더불어 근친이 되어 … 조詔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하니, 공이 말하기를 “신은 … 명으로 …할 뿐입니다. 어찌 감히 사사로운 정을 돌아보겠습니까?”하였다. 진지가 폐위됨에 이르러, 공으로 아찬阿湌으로 진급했고, 비로소 미실에게 총애를 받아 선화의 위位를 얻게 되니 곧 8세 풍월주였다.

[통일 대업]
공은 용맹을 좋아하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아랫사람 사랑하기를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했으며, 청탁에 구애되지 않고, 자기에게 귀의하는 자는 모두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므로 명성이 크게 떨쳤고, 낭도들이 죽음으로써 충성을 바치기를 원했다. 사풍士風이 이로써 일어나 꽃피었다. 통일 대업이 공으로부터 싹트지 않음이 없었다.107)

[낭도 부곡]
공의 때에 낭도의 부곡部曲을 두었다. 좌우 봉사랑左右奉事郞을 좌우 대화랑左右大花郞으로 만들고 전방 봉사랑前方奉事郞 전방 대화랑前方大花郞으로 만들어서 각기 3부部의 낭도를 거느리게 하였다. 또 진골화랑眞骨花郞, 귀방 화랑貴方花郞, 별방 화랑別方花郞, 별문 화랑別門花郞을 두었고, 12ㆍ3 살의 빼어난 진골眞骨108) 및 대족大族109)의 자제로서 속하기를 원하는 자로써 이를 삼았다. 좌화랑左花郞 2인, 우화랑右花郞 2인을 두었으며 각기 소화랑小花郞 3인, 묘화랑妙花郞 7인을 거느렸다. 좌삼부左三部는 도의道義ㆍ문사文事ㆍ무사武事를 맡았고, 우삼부右三部는 현묘玄妙ㆍ악사樂事ㆍ예사藝事를 맡았으며, 전삼부前三部는 유화遊花ㆍ제사祭事ㆍ공사供事를 맡았다. 이에 제도가 찬연히 갖추어졌다.

[문노의 아내 윤궁]
3년간 재위하고 비보랑에게 전하였다. 공은 오랫 동안 아내를 맞지 않았다. 국선國仙이 됨에 이르러 윤궁낭주를 받들어 내원內援으로 삼았다. 윤궁은 황종공(거칠부)의 딸이다. 그 어미는 곧 미진부공의 친누이였으니, 미실궁주와는 종형제간이 되었다. 함께 동륜태자를 섬겨 윤실공주를 낳았다. 과부로 5년을 살았다. 홍제鴻濟 5년(576) 10월 공이 지도황후의 명으로 국선이 되고, 윤공을 받들어 선모仙母로 삼았다.
이에 앞서 공이 세종공을 모시고 출정했다가 돌아왔다. 세종공은 공이 아내를 맞지 않은 것을 근심하였다. 미실이 “나의 동생인 윤공이 이 사람에게 어울리는데, 지위가 낮은 것이 걱정이다”하였다. 윤공이 이 사람에게 어울리는데, 지위가 낮은 것이 걱정이다“하였다. 윤궁이 듣고 말하기를 ”그 사람이 좋다면 어찌 위품位品110)을 논하겠는가?“하였다. 공 또한 듣고 기뻐하였다. 공의 부제 비보랑 또한 윤궁과 종형제였는데, 공을 위하여 공을 계부繼夫로 맞이하도록 힘써 윤궁에게 권하였다. …”내가 비록 뜻이 있으나 다섯 가지 의롭지 못한 것을 어찌할 것인가. 비보(랑) …. 문노는 위가 낮다. 그러므로 윤실과 더불어 자子 …를 꿇고 …. 나의 마음은 사철 내내 만족하지만, 지위가 낮으면 진종전군이 삼대의 영석榮席에서 나를 총애하니, 지금 늙어 … 사랑할 만한 것이 없으나, 누차 사람을 시켜 나를 부르는데, 정군貞君을 거절하고 다른 데로 가는 것이 세 번째 불의다. 압지가 재상의 신분으로 나를 마땅히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시집보내려는데, 거부하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네 번째 불의다. 금태자가 형군(동륜태자)의 총애를 이으려는데, 거부하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다섯 번째 불의다. 이 다섯 가지를 풀면 나는 문노에게 갈 것이다“하였다.
비보가 돌아와 공에게 말하니, 공은 “낭주의 말이 옳다. 나는 기다릴 것이다”하였다. 이 때에 진종眞宗이 이미 세상을 떠나자 사절四節의 의리가 끊어졌다. 공이 장차 크게 기용되려 하자 윤궁의 뜻이 자못 기울었다. 이에 공과 더불어 미실의 궁에서 서로 보았다. 공이 “우리 낭주가 아니면 선모仙母는 없으니, 내가 국선에 나아가지 못합니다”하니, 윤궁이 말하기를 “내가 군君을 그리워한지 오래 되어 창자가 이미 끊어졌습니다. 비록 골骨을 더럽힌다고 해도 할 수 있는데, 하물며 선모의 귀함입니까?”하였다. 공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나에게 국선이 영예롭다고 하나, 나는 스스로 선모의 영예를 가집니다”하였다. 윤궁은 이에 공에게 몸을 허락해 3자와 3녀를 낳았다. 대강大綱ㆍ충강充剛ㆍ금강金剛이라 하였다.

[윤궁의 충고]
윤궁은 밖으로는 비록 선모仙母였으나, 안으로는 실제로 부인이 되어 공의 일을 힘써 도왔다. 공이 평소에 미실과 맞지 않았다. (이에) 윤궁이 간하기를 “군君은 세종전군의 신하인데, 미실궁주를 반대함은 옳지 않습니다. 전군殿君이 궁주를 자기 목숨처럼 여기는 것은 군君이 나를 목숨처럼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군의 낭도가 만약 군을 옳다고 하고 나를 그르다고 하면 군은 어떻겠습니까?”하니, 공이 말하기를 “선모는 궁주와 같이 잘못이 없으니 낭도들이 어찌 비난하겠습니까?”하였다. 윤궁이 이에 힘써 미실의 잘못을 감싸며 말하기를 “사람이 모두 장단과 과실이 있는 것은 형세가 부득이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군이 오랫동안 전쟁터시석矢石에 있어서, 오직 강철 같은 심장만을 법으로 삼고 처자의 즐거움이 없는 것은 세상과 통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군의 아들을 가졌는데, 군이 한 마음으로 뜻을 굳게 지키고 권문에 거스른다면 이 뱃속의 아이는 장차 어떤 처지에 있겠습니까. … 아이의 좋은 아버지로서 나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하였다

[대사大私와 공公]
공이 탄식하며 “… 의지와 기개로 선모를 받드는데, 선모는 세상일로 나를 감싸는 것 … 손은 사사로움입니다. 정이 사사로이 행해지게 되면 의리가 감추어지게 되고, … 그렇지만 나의 선모가 신臣에게 허락한 뜻은 가히 죽음으로써 맹세한 것입니다. 차라리 … 무리를 … 할지언정 선모를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사사로운 인정에 끌려야 하겠소?”하니, 윤궁은 웃으며 말하기를 “저이 아니면 군과 내가 어찌 색사色事로써 서로 범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의義는 정情에서 나오고 정은 지志에서 나오니, 세 가지는 서로 반대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큰 정은 의가 되고 큰 사사로움은 공公이 된다고 했습니다. 만약 무리에게 사사롭지 않으면 무리를 거둘 방법이 없습니다. 군은 어찌 일찍이 사사로움이 없겠습니까. 군과 더불어 동침한 밤에 나는 대철우大鐵牛 꿈을 꾸었는데, 반드시 호랑이 새끼를 낳을 것입니다. 그대의 영웅스러움으로써 어찌 좋은 씨앗이 없으면 되겠습니까. 대중 또한 사람의 자식입니다. 남의 자식은 소중하게 여기고 자기 자식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의가 아닙니다. 자기를 손상시켜 명예를 좋아하는 것은 역시 사사로움에서 나옵니다. 군과 더불어 내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정의 순수함입니다. 무리들이 군에게 의지하는 것은 정이 섞인 것입니다. 청컨대 내 아이의 좋은 아버지가 되어 나의 말을 들어 주십시오”하였다.
공이 크게 깨달아서 말하기를 “선모는 진실로 성인입니다. 신은 어리석을 뿐입니다”하였다. 이에 정이 더욱 두터워졌다. 공은 굽혀 미실을 섬기고 설원을 받아들여 주었다.

[문노의 자녀]
과연 대강을 낳았는데 후에 재상에 이르렀다. 충강 역시 높은 지위에 이르렀다. 금강은 가장 귀하게 되어 백성과 신하로서는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다.111) (윤강允剛)ㆍ현강玄剛ㆍ신강信剛은 모두 귀한 집안에 시집가서 영화롭고 귀하게 되었다. 윤궁의 말이 과연 들어맞았다.

[득골품得骨品]
공은 대강을 낳고 나서 사사로운 정의 진실됨을 더욱 크게 느끼고, 모든 일을 번번이 윤궁에게 물어서 행하였다. 혹 옳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초년의 기상이 없어졌다”하면 공은 듣고 웃으며, “나도 지난날 전군이 궁주의 말을 듣고 따르는 것을 보고 흉을 보았는데, 내가 스스로 그렇게 되고 보니 알겠구나. 너희들 또한 스스로 당하면 알 것이다”하고 마음에 두지 않았다. 공이 (진지왕을) 폐립하는 데 참여한 공으로 선화仙花가 되기에 이르렀다. 모두 윤궁의 내조가 많았다. 관위官位가 이찬에 이르러 비로소 골품을 얻으니,112) 윤궁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지아비가 될 날이 멀지 않습니다”하였다. 미실이 과연 제에게 청하자, 조詔를 내려 윤궁을 공의 정처正妻로 삼았다.

[포석사와 혼인]
진평대왕과 세종전군이 친히 포석사鮑石祠113)에 나아가 크게 …, 그리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오늘 비로소 낭군이 되었으니 …의 귀함이 어찌 가히 이 경사에 미치겠습니까”하니, 윤궁이 말하기를 “첩의 몸은 … 이에 같은 골의 남편으로 갖게 되었으니, 결혼식을 해야 합니다. 어제 이전에 낭군은 첩의 신하였으므로 첩을 따르는 것이 많았으나, 오늘 이후 첩은 낭군의 처로써 마땅히 낭군의 명을 따라야 합니다”하였다. 마침내 감히 다시 공과 다투지 않고 공의 명령을 힘써 따랐다. 검소하고 무리를 사랑하여, 손으로 직접 옷을 만들어 낭도에게 주었다. 공이 종양을 앓았는데 입으로 빨아서 낳게 하였다.

[영웅과 주색]
공은 풍월주로서, 유화遊花로 인하여 더럽혀진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집에 있으며 마음이 허락하고 조용한 모습이 마침 물수리와 원앙 같았다. 양위함에 이르러 공은 윤궁과 더불어 늘 수레를 같이 타고 야외로 나가 노닐고 돌아왔다. 공은 본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윤궁이 일찍이 공에게 “첩이 듣건대 영웅은 주색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낭군은 술을 안 마시고 색을 절제하니 첩이 속으로는 부끄러워합니다”하였다. 공이 웃으며 “색을 좋아하면 그대가 질투를 할 것이며, 술을 좋아하면 그대의 일이 많아 질 것이다”하였다. 윤궁이 “장부는 마땅히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지, 어찌 한 여자를 염두에 두겠습니까. 잠자지를 모시는 첩이 있으면 저의 일을 대신하게 되니, 기쁜 일이지 투기할 일이 아닙니다. 지아비를 위하여 일이 많은 것은 처의 영광입니다. 행하기를 청합니다”하였다. 공은 이에 술을 조금씩 마시고 침첩枕妾 한 명을 두었으나, 난잡한 적이 없었다.
젊어서 지극히 방정하고 빈틈이 없었는데, 윤궁을 처로 맞이한 후로 시비를 가리기보다는 화목함을 더 좋아하는 사람으로 변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부인이 남자를 이렇게 변화시켰다고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부부를 말할 때는 반드시 공의 부처를 들며 말하기를 “지아비를 택하는 데는 마땅히 문선화文仙花와 같아야 하고, 처를 얻는 데는 마땅히 윤낭주와 같아야 한다”하였다.

[사기士氣의 으뜸]
포석사에 화상을 모셨다. 유신이 삼한을 통합하고 나서 공을 사기士氣의 으뜸宗主으로 삼았다. 각간으로 추증追贈하고,114) 신궁의 선단仙壇115)에서 대제를 행하였다.116) 성대하고 지극하도다! 공은 건복建福 23년(606)에 세상을 떠났으며, 나이가 69세였다. 낭주는 이 해에 공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선仙이 되었다. 공보다 10살이 적었다.117)

찬하여 말한다 : 가야의 외손이고 사기의 으뜸으로, 선의 꽃이 되니 우리 나라의 위엄을 떨치다.

세계 : 아버지는 비조부比助夫이고, 할아버지는 호조好助이며, 증조는 비지比知이다. 호조의 어머니는 곧 등흔공登欣公의 누이인 조리助里이다. 또한 …이 되다. 선혜황후는 묘심의 일로 폐하여 살게 되고 군君…. …감과 상통하여 비조부와 양화공주를 낳았다. 비조부 또한 호조공의 첩 문화공주文華公主와 통하여 공을 낳았다. 문화공주는 북국 왕北國王의 딸이다. 또는 야국왕野國王의 딸이라고 한다. 역사 기록에 그 세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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