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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9세 풍월주 비보랑 ~ 15세 풍월주 유신공)
 성미경  | 2009·09·03 08:28 | 조회 : 4,209
[9세 풍월주 비보랑]-------------------------------------------------------------------------------------------------------------------

<비보는 기사년(549)생이고 임인년(582)에 화랑의 주主가 되었다.>

9세 비보랑秘宝郞은 비대전군比臺殿君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실보낭주實宝郎主인데 곧 미진부공의 누이였다. 공은 설원공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함게 노래를 배웠으나 설원공에게 미치지 못하였고, 피리를 배웠으나 역시 설원공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문노에게 나아가 검을 배우고, 마침내 가장 뛰어난 제자가 되어 문노를 힘쎄 보좌하였다. 문노가 선화仙花가 되자, 그 공으로 그의 부제副弟가 되었다. 이에 이르러 9세 풍월주가 되었다. 문노의 법제를 힘써 따르고 미천한 자를 발탁하고 약한 자를 구하는 데 힘썼다. 낭도를 나누어 보내어 변방을 지키는 이들을 위로하였다. 당시 미생공은 설원공의 부제로서 오랫동안 위에 오르지 못하였다. 문노공이 이에 양위를 명하였다. 공이 또한 3년간 재위하니, 낭도들이 아까워하였다. 때는 건복建福 2년(585) 춘정월이었다.

[혼인과 자녀]
공은 노리부공弩里夫公의 딸 세진낭주細珍娘主를 아내로 맞아, 아들 세호랑細好郞을 낳았고 딸 세미細美와 세신細新을 낳았는데, 병으로 죽었다. 다시 진흥대왕의 딸 덕명공주德明公主를 아내로 맞았다. 덕명공주의 어머니는 곧 가야국 월화공주月華公主이다. 다섯 아들과 세 딸을 낳았는데 아들은 붕부朋夫ㆍ보부宝夫ㆍ석부石夫ㆍ보주宝珠ㆍ진주眞珠이고, 딸은 홍주紅珠ㆍ녹주綠珠ㆍ명주明珠였고, 서자는 유오랑柳五郞ㆍ유매柳梅ㆍ가기賈奇ㆍ수동水同 등인데, 모두 귀하게 영달하였고 명성이 있었다. 유오랑은 공의 첩 유지柳枝의 소생이다. 유지는 검술을 잘 하였고,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며 난도亂徒를 많이 모아 소요를 일으켰다. 조정에서 군사를 모아 잡으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공은 18세 나이에 그 굴을 찾아가 생포하였다. 아마 유지가 미모에다 뜻이 높아, 공의 높은 풍모를 보고 스스로 항복하였을 것이다. 공은 그 사람들을 가련하게 여려 모두 풀어 주었다. 유지는 홀로 가지 않고 말하기를 “다만 그대를 좇아 죽기를 원하고, 다른 곳으로 도망하여 살기를 원치 않는다”하였다. 마침내 첩이 되었다. 유오랑은 어머니의 풍모를 갖추어 용모가 맑고 빼어났고 … 또한 … 18살의 나이에 지명법사智明法師118)를 따라 진陳에 들어가 …을 구하고 많은 책을 가지고 와서 후진 사문들을 가르쳤으니, 그 공 또한 크다. …

[국가의 태평]
… 국가가 태평하고 곡식이 익고 백성이 배부르게 되었다. 모두 공이 …의 주主라고 생각하였다. 미생공이 취임함에 이르러 곧 봄에 가물어 곡식의 씨를 뿌리지 못하였다. 제가 반찬의 수를 줄이고 죄수를 풀어 주자 비가 왔다. 사람들이 미생공이 욕심이 많은 때문이라 생각하였다.

[대세의 아픔]
처음에 공은 동대공冬臺公의 아들 대세大世가 뛰어난 재주가 있으므로, 전방대화랑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런데 대세의 어머니는 곧 실보實宝의 손아래 누이인 골보骨宝였으니, 대세는 공의 종제가 되었다. 사람들이 불평을 하여 이루지 못하였다. 양위함에 이르러 미생공에게 부탁하여 대세에게 전방대화랑을 주었다. 얼마 안 되어 미생의 첩의 동생인 제문랑諸文郞이 그 자리를 원하여, 대세가 유화를 탐했으며 술을 마시고 행동이 거칠었다는 것으로 책임을 물어 물러나게 하였다. 대세는 이에 노하여 곧 들에 나아가 자취를 감추었다.
대세와 덕명은 같이 나이로, 몹시 그리워하여 몰래 서로 정을 통하였다. 공은 알면서 꾸짖지 않았다. 대세는 그 은혜에 감동하여 마침내 덕명과 관계를 끊었다. 스스로 모랑과 완적阮籍119)에 비교하였고, 술을 마시면 울었다. 유화들 중에 그를 사모하는 자가 많았다. 대세는 자기를 사모하는 자를 거절하지 않았다. 공은 그 아픔을 알고 가엾게 여겨 좌방(화랑)으로 삼았다. 얼마 안 되어 다시 우(방)화랑으로 삼아 장차 세상에 크게 쓰일 것임을 보여 주고, 술에 빠짐을 절제토록 권하였다. 잠시 괜찮게 되는 것 같았다. 미생공이 전방대화랑에 처음 발탁하고 나서 대세에게 권한을 주지 않았다. 대세는 본디 미생공에게 복종하지 않았는데, 이에 술을 마시고는 (미생이) 탐욕스럽고 어리석어 가뭄을 불러 왔다고 욕하였다. 공은 곧 사문沙門 담수淡水로 하여 대세를 보살피게 하고, 때때로 술을 보내어 위로하였다. 대세는 이에 발분하고 힘써 공부하여 신선의 참된 도를 터득하고자 하였다. 친우인 구칠仇漆과 더불어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갔다. 구칠 또한 공의 화랑이었다. 두 사람이 떠나가자 공의 심복 낭도들이 많이 불안해하였다.

[열선각列仙閣]
공이 힘써 달래었지만 마침내 당파가 나뉘었다. 공은 잘못이 자기에게 있다며 상선의 지위에서 물러나고자 하였다. 문노공이 허락하지 않고 “선도仙道의 우두머리는 오직 우리 두 사람인데, 그대가 만약 물러나면 무사의 씩씩한 기운을 장려할 수 없다”하며, 권하여 …에 들어가게 하였다. 공은 제문랑을 해직하였다. 얼마 안 되어 미생공 또한 어려운 것을 알고 …. 덕명의 장자인 붕부가 돌아왔다. 골보는 생각하기에 … 죄를 면제받았다. 하종공이 (풍월)주가 되자, 선정仙政을 모두 … (미)실에게 물어 결정하였다. 미실 또한 파의派議를 염려하여, 제 상선上仙과 상화上花를 회합하여 열선각列仙閣을 짓고 대의大議를 통과시켜 결단하였다. 그러므로 파의派議가 비록 많았으나 또한 무사히 지나가게 되었다. 공 또한 미실의 신臣으로 배반할 수 없었으나, 불공정하고 부도덕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다투었다. 미실이 (비보랑)공을 위로하기 위하여 공이 추천한 자를 많이 뽑았다. 보리공ㆍ서현공ㆍ용춘공 등은 모두 공이 추천한 사람들이다.

[세호랑과 선로仙路]
공의 아들 세호랑은 오랫동안 화랑으로 있었는데, 뽑히지 않았다. 공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선로仙路는 나의 가물家物이 아니다. 단지 공을 세워 백세에 이르는 것이 옳고 아비로서 명위를 더럽히는 것은 옳지 않다”하였다. 공은 끝내 세호랑을 중요한 자리에 오르지 않게 하였다. 사람들이 공을 어렵게 여겼다.
건복建福 20년(603) 8월, 고구려가 침범하여 왔다. 제가 친히 정벌하였는데, 낭도들이 많이 따랐다. 공과 세호랑이 선봉이 될 것을 청하여 한수漢水에서 맞아 싸워 크게 이겼다. 제가 공에게 보답코자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신은 어리석고 겁이 많아 한 일이 없습니다. 곧 제의 힘으로 이룬 것입니다”하였다. 제는 이에 세호랑을 발탁하여 아찬阿湌의 위를 주고, 대당大幢을 장악토록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오늘에야 비로소 나의 아들이다. 또한 너의 어머니에게도 부끄럽지 않다”하였다. 대개 세진은 늘 공에게서 검을 배워 세호랑을 가르치면서, “처는 지아비의 일을 알지 않으면 안 되고, 아들은 아버지의 업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말하였기 때문이다. 공은 죽을 때까지 검도를 버리지 않았다. 문하에서 나온 무리 중에 출세한 사람이 많아 사방으로 나아가 다스렸는데, 공은 늘 정사에 삼갈 것을 경계하였다. 공이 죽자, 모인 자가 만여 명이 되었다. 성대하고 지극하다! 공의 별전別傳이 세상에 돌아 다니는 것이 많은데, 거짓된 것이 많아 다 기록하지 않는다.120)

찬하여 말한다 : 법흥의 손이고 진흥의 사위이다. 위가 상선上仙에 이르렀고 검도劍道로 크게 떨쳤다. 무사의 기풍이 일어났고 백세의 스승이다.

세계 : 아버지는 비대 각간인데 법흥의 서자이다. 비대 각간의 어머니는 옥진궁주이다. 옥진이 영실공에게 시집갔다. 당시 법흥이 친히 길례吉禮121)를 행하였는데, 그 아름다움을 보고 …하여 총애가 더욱 두터워졌고 비대 각간을 낳았다.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로서 전군의 지위를 막고자 하였다. 비대공이 자라자 … 헐뜯는 자들이 감히 다시 말을 못 하였다. 비대공은 미진부공의 친 손아래 누이인 실보낭주를 부처副妻122)로 삼아 공을 낳았다. 실보는 곧 삼엽공주의 딸이다. 삼엽은 곧 벽화황후의 딸이고, 아버지는 곧 법흥대제이다.


[10세 풍월주 미생랑]-------------------------------------------------------------------------------------------------------------------

<미생은 경오년(550)생이고 을사년(585)에 화랑의 주가 되었다>

10세 미생랑은 미진부공의 아들이다. 공의 손위 누이는 미실궁주라고 하는데, 진흥대왕에게서 커다란 총애를 받았다. 그런 까닭에 공 또한 왕의 총애를 받았다. 왕이 여러 번 불러 입궁하여 동태자ㆍ금태자 등과 더불어 토함공에게 함께 배웠다. 얼굴이 아름답고 아양을 잘 부려 두 태자 또한 총애하였다. 만덕萬德에게 춤을 배워 그 근본을 터득하였다. 사도황후가 여러 공주들에게 이를 배우도록 하였다. 공주들이 많이 사사로이 관계를 가졌는데, 제(진흥왕)가 문초하려 한즉 후后(미실궁주)가 말하기를 “이는 우리 집의 풍류나비風流蝶123)입니다. 어찌 모름지기 문초를 하겠습니까?”하였다. 제는 또한 미실에게 빠져 있었던 까닭에 마침내 문초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도 감히 말을 못 하였다.

[낭도 미생]
미실이 공에게 명하여 사다함공의 낭도가 되었다. 당시 나이가 겨우 12살이었는데 말에 오를 수 없었다. 미진부공이 쫓아 내려 하자, 미실이 말하기를 “어찌 나의 아우를 한 번에 내칩니까?”하였다. 사다함 또한 부득이 받아들였다. 문노가 꾸짖어 “무릇 낭도가 말에 오르지 못하고 검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하루아침에 일이 생기면 어디에 쓸 것인가”하였다. 사다함이 용서를 빌며 말하기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우입니다. 얼굴이 아름답고 춤을 잘 추어 또한 여러 사람을 위로할 수 있으니, 이에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하였다. 문노가 다시 따지지 않았다. 공은 검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속으로 문노를 꺼려하여 경의를 표하지 않았으므로, 사다함이 곤란해 하였다.

[뇌물]
세종공이 (풍월주의) 대를 잇자 공을 전방화랑으로 삼아, 그 위를 전하여 미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하였다. 문노가 간하여 이룰 수 없었다. 미실은 이에 낭도들에게 뇌물을 주어 공의 지위를 일으키니, 이해에 밝은 자들이 많이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미실이 설화랑을 총애하게 되자, 공에게 그를 섬기도록 하였다. 그 까닭에 공은 부제가 되지 못하였다.

[36살 풍월주]
이에 이르러 곧 10세 풍월주가 되었는데, 공의 나이 이미 36살이었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사다함공이 열여섯 살에 (풍월)주가 되자 천하가 명예롭게 여겼는데, 내가 열세 살에 전방화랑이 되자, 천하가 더욱 명예롭게 여겨, 나이 열여섯 살 이전에 반드시 (풍월)주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어찌 서른여섯 살에 된다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하니, 미실이 말하기를 “내가 총애를 받을 때 네가 이와 같은데, 하물며 나에 대한 총애가 식으면 누가 하종夏宗을 위한 계책을 마련할까?”하였다. 이에 하종을 부(제)로 삼았다.

[화랑도의 5파]
그 때에 낭도들간에는 아직도 쟁론이 있었다. 그 하나는 귀천에 거리끼지 않고 내외에서 인재를 뽑아 등용하여 국력을 강하게 하려는 자들로, 통합원류統合元流라 불렀다. 임종林宗ㆍ대세大世ㆍ수일修日 등이 중심이었는데, 대개 문노파文弩派 중 가장 정예들이었다. 대원 신통大元神統을 받들려고 하는 자들은 곧 미실 일파美室一派인데, 하종夏宗ㆍ구륜공仇輪公 등이 중심이었다. 이것이 그 두 번째이다. 진골 정통인 자를 받들려고 하는 자들이니 곧 문노 일파로, 지소태후의 명령을 따르는 자들이다. 가장 권력이 있으며 옛 규정을 지키는 자들이다. 보리랑菩利郞ㆍ숙리부叔里夫 등이 중심이었다. 이것이 그 세 번째이다. 그렇지만 문노 또한 세종에게 충성을 바쳤기 때문에 하종과 감히 다투지 않았다. 통합파統合派는 하종이 재주가 없다고 하고, 또한 미생공에게 불복하였으나 공은 이를 진압하지 못하였다. 또 한 파가 있어 정숙태자貞肅太子를 (풍월주로) 세우고 원광圓光을 부제로 삼으려 하였는데, 이는 문노정파文弩正派와 통합파 중에서 혼성된 자들로서, 이화류二花流라 하였다. 또 한 파는 천주공天柱公을 (풍월주로) 세우고 서현랑舒玄郞124)을 부제로 삼으려 하였는데, 곧 통합파 중 가야파加耶派이다.125)

[천간성]
공은 3년 동안 (풍월주) 위에 있었는데 의론이 일치하지 않아, 상선上仙이 많이 걱정하였다. 이에 하종공에게 양위하고 물러나 천성을 길렀다. 공은 부귀하게 나고 자라 아랫사람의 마음을 몰랐다. 또 색을 좋아하고 재물을 탐한 까닭에 뭇 사람들의 신망이 크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선문仙門126)에 있어, 낭도들이 문하에서 많은 배출되었으므로 감히 배반하지 못하였다. 공은 처첩이 많았고 아들이 백 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모두 기억할 수 없었다.『미생기美生記』에 “공의 용모가 수려하고 말에 운치가 있었다”하였다. 남도南桃에 갈 때마다 유화로서 목숨을 바치기를 원하는 자가 천백을 헤아렸다. 공이 한번 눈길을 주면 따르지 않는 여자가 없었다. 당시 사람들이 공을 천간성天奸星127)이라고 하였다. 평상시에 시첩의 수가 …인데 눈썹을 그리고 아름답게 화장을 하였다. 그 향락함이 천자보다 더하였다. 진陳나라의 사신이 …상국上國에도 또한 아직 이와 같은 재상이 없다고 하였다. … 상국의 사절이 되어 그 제도를 두루 수집하여왔다. 까닭에 … 공은 어머니와 손위 누이에게 효도하기를 감히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옥배와 노비]
공의 종이 공의 옥배玉盃를 훔쳤다. 공이 막 처벌하려고 하자, 종이 담장을 넘어 도망하다가 다리를 다쳐 피를 흘렸다. 공의 어머니가 보고 공을 꾸짖으며 “노비는 수족과 같고 그릇은 가지고 노는 것이다. 어찌 물건 때문에 사람을 상하게 하느냐? 외척128)은 본래 사람들이 꺼리는 바인데, 너는 어미와 손위 누이가 왕의 총애를 받은 덕분에 천하의 재물을 가졌으면서도 사대부에게 겸손하지 않고 백성을 사랑하지 않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다”하였다. 공은 이에 마루에서 내려가 종을 풀어 주고, 친히 스스로 보살펴 친절하게 병을 고쳐 주었다. 그 후 무릇 도둑질하는 자가 있어도 모두 문제삼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그 다리를 다치게 할까 걱정이다”하였다 도둑질은 이내 그쳤다.

[어색漁色]
공은 일찍이 동태자銅太子와 더불어 여색을 탐하러漁色 다녔다. 그 때 나마奈麻 당두唐斗의 처가 아름다움이 있다고, 공에게 알려 주는 사람이 있었다. 공은 태자와 함께 밤에 그 집을 찾아가 불러서 관계辛를 맺었다. 태자가 죽고 나서, 공은 첩으로 삼고자 하여 저택에 불러들였다. 당두는 이미 미실에게 호소하여 말하기를 “아이가 있는데 아침저녁으로 어미를 찾습니다. 색공만 하는 첩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하였다. 미실이 곧 공을 꾸짖어 말하기를, “태자의 사건이 있은 후 나 또한 두려워하는데, 어찌 다른 계집이 없어서 남의 처를 뺏느냐”하였다. 공은 이에 여자를 당두에게 돌려보냈다. 여자는 공을 잊을 수 없어 혼자 스스로 도망하여 왔다. 공이 좋은 말로 위로하여 돌려보냈다.

[축재와 당두]
당두가 다시 호소할까 염려하여 여러 번 당두를 조주祖主129)에 천거하여 발탁하였다. 당두는 그 은혜를 고맙게 여겨 (아내를) 바치려 하자, 공은 “손위 누이의 명령이라 감히 그럴 수 없다”하였다. 당두가 물러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은 공이 색을 밝힌다고 말들을 하지만, 나는 공이 효도하고 우애가 있다고 생각한다”하였다. 이에 공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여, 공이 조부調府130)에 들어가자, 당두를 사부司簿로 하여 정치를 크게 바로잡았다. 제가 이에 훌륭하게 여겨 술을 내렸다. 공이 말하기를, “신의 능력이 아니라 당두의 공입니다”하였다. 제는 이에 당두에게 대나마大奈麻131)를 특별히 주고 조부의 우경右卿132)으로 삼았다.
그의 처는 공의 세 아들을 낳았다. 공은 모두 거두지 않고 당두의 아들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 당두 또한 아들로 삼을 수 없었다. 그 때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공은 오랫 동안 조부에 있으며 … 한 것은 당두의 힘이었다. 누만금의 재물을 모은 것 또한 당두의 힘이었다. … 집에서 당두와 바둑을 두었다. 당두는 바둑을 잘 주었다. 문득 … 술을 마셔 조금 취하자, 공은 흡족하여 “내가 너와 더불어 …하여 집안의 재산은 쓰기에 족하다.

[당두와 만세]
내가 너의 처와 더불어 천하와 국가를 위하여 이물을 번성케 하겠다“하였다. 대개 당두의 처가 아들을 잘 낳는 것을 말한 것이다. 당두는 이내 틈을 타서 물러나 그 처로 하여금 공에게 사랑을 받고 아양을 떨게 하였다. 그의 처남 만세萬世 또한 공으로 인하여 발탁되었다. 공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당두는 나의 자방子房133)이고 만세는 나의 진평陳平134)이다“하였다. 만세의 처제 또한 공의 첩이 되어 총애를 받았고, 노래를 잘 하였다. 공의 아들인 백생공白生公과 통하였다. 공이 백생공에게 주려고 하자, 만세는 그것은 도가 아니라고 간하였다. 공이 ”그녀와 내 아이는 나이가 서로 같아 다시 해로할 수 있으니, 나에게는 큰 기쁨이다“하였다. 마침내 주었다.

[호아령]
공은 아들이 많았는데, 아들을 사랑하는 정이 다른 사람의 배가 되었다. 비록 잘못이 있어도 나무라지 않고 그 성격에 맡길 따름이었다. 매번 명절에는 여러 아들을 거느리고 대당大堂으로 어머니를 뵈러 갔는데, 어머니가 아이들의 어미를 다 구별하기 힘들었다. 공과 닮지 않은 아이가 있으면 곧, “그 아이가 어디가 너와 닮았느냐?”하고 물었다. 공은 번번이 닮은 바를 대답하여 감싸 주었다. 그러므로 여러 아들이 공을 사모하여 따랐다. 공은 매번 출근할 대 수명의 아이를 거느리고 조부調府에 이르러 종일 그 아이들과 더불어 즐겁게 놀다가 돌아왔다. 사람들이 가리켜 말하기를 ‘호아령護兒令’이라 하였다. 그러나 한 사람의 관리도 책망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관리들 역시 좋은 재상이라고 생각하였다. 건복 26년(609)에 세상을 떠났다. 나이가 60이었다. 공의 아들 백생白生ㆍ월생月生ㆍ발생發生 등은 모두 공주의 소생이다.

찬하여 말한다 : 옥진의 손자이고 대원 신통이다. 아들이 백 명이고 낭도는 만 명이다. 풍족하고 부귀로운 아름다운 일생이다.

세계 : 아버지는 미진부이고 할아버지는 아시이고 증조는 선모善牟이다. 고조는 장이章伊인데 복호공卜好公의 서자이며 보미궁주宝美宮主 소생이다. 장이의 처는 수리首里인데 곧 미해공美海公의 딸이다. 선모의 처는 보혜宝兮인데 습보공의 딸이다. 아시의 처는 삼엽공주인데 법흥왕의 딸이다. 그 어머니는 곧 소지황후인데 벽화󰏅󰏅이다. 공의 어머니는 묘도궁주인데 곧 옥진 ….135) 옥진이 법흥의 총첩이 되어 …을 호령하였다. …136) 미생의 누이女兄 미실 또한 묘도의 딸로, 진흥의 …이 되어 천하를 30년 동안 …하였다. 공의 부귀는 이에 기초가 비롯되었다.

[묘도의 충고]
묘도는 사도의 손위 언니로 얼굴이 근엄하고 마음이 부처와 같아서 공과 공의 누이와 동생들에게 주의를 주어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하였다. 한 번은 공에게 일러 “우리 집은 대대로 색을 바치는 신하137)로, 총애와 사랑이 지극하였다. 아직 네가 누리는 부귀와 같은 것은 없었다. 너는 아직도 부러운 것이 있느냐?”하니, 공이 말하기를, “제가 숙모에 대하여는 화문和文만 못하고, 누이에 대하여는 설원만 못하고, 낭도에 대하여는 문노만 못합니다. 어찌 부러운 것이 없겠습니까”하였다. 묘도가 웃으며 말하기를 “이 세 사람 또한 너에게 부러운 것이 있다”하였다. 대개 그 부유함과 첩이 많고 자녀가 많음을 말한 것인데, 풍자하여 훈계하는 뜻을 보인 것이다. 묘도의 아버지 영실공은 법흥왕의 누이 보현공주普賢公主의 아들이다. 그 아버지는 수지공이니 곧 등흔공의 손자가 된다.


[11세 풍월주 하종]-------------------------------------------------------------------------------------------------------------------

<하종夏宗은 갑신년(564)생이고, 무신년(588)에 화랑이 되었다.>

11세 하종은 세종전군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미실궁주이다.

[묘도의 탄생]
당초에 법흥제法興帝와 영실공이 내정에서 축구蹴毬를 하고 있는데, 옥진궁주가 졸리운 눈으로 헝크러진 머리를 하고 이르러 제의 손을 이끌며 “좋은 꿈을 꾸었는데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입니다. 함께 하는 것이 옳습니다”하였다. 제가 “무슨 꿈인가?”하고 물으니, “칠색조가 가슴으로 들어왔습니다”하였다. 제가 웃으며 “7색은 섞인 것이고 새는 여자다. 빈첩嬪妾의 조짐이다. 네 지아비와 더불어 함께 하라”하였다. 옥진이 좋아하지 않으니, 제가 말하기를 “네 지아비와 나는 일체이다. 아들을 낳으면 곧 태자로 삼고, 딸을 낳으면 곧 빈嬪으로 삼을 것이다”하였다. 옥진이 이에 기뻐하며 마침내 영실과 장막 안으로 들어가 사랑을 이루었다. 과연 딸을 낳으니, 옥진은 제를 신통스럽다고 여겨 묘도墓道라 이름하였다. 묘도가 자라자 제가 약속한대로 사랑辛을 하였다. 그런데 작고 좁아幺窄 맞을 수 없었고, 또 제가 양기가 너무 강하였기 때문에 묘도는 저녁이 되면 괴로워 하였다. 이에 제가 자주 사랑하지 않았다.

[미실의 탄생]
그 때 미진부공이 어머니 삼엽공주三葉公主와 늘 궁중에 입시하여, 묘도와 전殿을 사이에 두고 머물렀다. 묘도가 바라보고 …(미진부공을) 사모하였다. 미진부공이 회랑을 지나가는 것을 틈타 … 들여서 상통하였다. 대상大相이 같이 동혈同穴138)의 …이 되기를 맹세하였다. … 왔다. 제가 죽자崩, 태후가 아시공과 가까이 하고자 하여 …을 허락하였는데, 오랫동안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하루는 옥진궁주가 꿈에 칠색조가 자기의 가슴 속에서 날아 묘도에게 들어가는 것을 보고, 놀라 일어나 이상하게 여겨 묘도의 침실에 가서 엿보았다. 그 때 묘도와 미진부공이 바야흐로 함께 사랑好을 나누는 중이었다. 옥진궁주는 이에 기뻐서 알려 주며 “너희 부부는 이제 귀녀貴女를 낳을 것이다”하였다. 과연 미실을 낳았다.

[미실의 색공色供]
용모가 절묘하여 풍만함은 옥진을 닮았고, 명랑함은 벽화를 닮았고, 아름다움은 오도吾道를 닮아서 백화百花의 영검함을 뭉쳤고, 세 가지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았다고 할 수 있었다. 옥진이 “이 나의 아이는 오도吾道를 부흥시킬만 하다”라고 말하고, 좌우에서 떠나지 않으며 교태를 부리는 방법媚道과 가무를 가르쳤다. 태후의 명으로 세종의 궁으로 들어가려 할 때 옥진이 근심하여 “내가 너를 가르친 것은 장차 너의 숙모의 잉첩이 되게 하려는 것이지, 어찌 전군을 섬기라고 한 것이겠느냐”하니, 미실이 말하기를 “빈첩嬪妾의 도는 색공色供에 있는데, 어찌 제를 받들지 못하겠습니까”하였다. 옥진은 크게 기뻐하여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족히 도를 말하니 나는 근심이 없다.”하였다. (미실은) 궁중에 이르러 태후의 아들 전군을 교태로 섬겼다. 전군은 깊이 빠져들어 기동을 못 하였다. 태후가 전군이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궁궐을 나가 집에 머물도록 명하였다. 미실은 개의하지 않고 사다함과 사통私通을 하고 부부가 되기로 약속을 하였다. 태후는 이에 전군에게 명하여 융명肜明을 아내로 맞도록 하였다. 전군이 미실을 사모하여 병이 났다. 태후는 부득이 미실을 다시 불러들였다. 마침내 하종을 낳았는데, 전군이 미실을 애지중지하여 다시는 융명을 사랑辛하지 않으므로 융명은 노하여 궁궐 밖으로 나갔다. 공이 출생한 지 얼마 안 되어, 미실은 사도思道의 명으로 태자에게 색공色供을 하여 임신을 하였다.

[잉첩 미실]
(제帝를) 사모하여 애태우는燕鸎 미실의 모습이 더욱 더 애처로웠다. 제가 후에게 말하기를, “너의 조카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미녀인데, 어찌 너의 잉첩139)이 되지 못하고 다른 데로 시집갔는가”하였다. 후는 이에 미실을 3대(부ㆍ자ㆍ손)를 모시는 자리로서 제에게 추천하였다. 제가 한 번 사랑하고 두 번 사라하고는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이에 전군에게 명하여 다시 융명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그리고 미실에게 전주殿主의 이름을 내렸는데 … 후后와 … 사랑寵함이 천하를 뒤집을 만하였다.

[문서 참결]
제가 출입할 때 반드시 동행시켰다. 황후는 … 궁과 삼주三柱의 신神이 될 것을 맹세하였다. 전주는 문장을 잘 지었다 …. 제가 조정에 나아가 업무를 볼 때, 전주가 옆에서 모셨다. 문서를 보고 참결參決하여 그것이 옳은지를 …. 조야朝野의 권세가 옥진궁으로 돌아갔다. 대원 신통이 다시 성하게 일어났다.

[사지舍知 하종]
태자의 딸이 태어나자, 제는 알지 못하고 자기의 딸로 알고 애송공주艾松公主로 봉하였다. 공은 애송의 형으로서 나이가 겨우 세 살이었는데, 사지舍知140)의 위를 내렸다. 궁중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애송의 벗이 되었다. 공은 비록 나이가 어렸으나 우애가 지극히 도타워, 공주가 울면 곧 따라서 울었다. 제가 이로 인하여 총애하였다. 반야般若가 출생하자, 공은 관위가 올라 대사大舍가 되었다. 난야蘭若가 출생하자, 관위가 올라 나마가 되었다. 수종전군壽悰殿君이 출생하자, 관위가 올라 대나마가 되었다. 이에 앞서 제는 공주 등에게 공을 형으로 부르게 하였으나, 공은 위가 낮아 감히 형으로 자청하지 않았다.

[하종전군]
이 때에 전군이 처음 태어나자, 제가 크게 좋아하여 공을 전군으로 봉하여 전주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였다. 전주는 속으로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으나 겉으로 겸양을 베풀었다. 그 때 삼호공三好公이 내질內秩141)의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는데, 따져 말하기를 “사자私子가 전군이 되는 것도 이미 참람한데, 하물며 사자私子의 아들이겠습니까”하였다. 제가 그 말이 옳다고 여겨 그만두었다. 미실은 이에 삼호三好를 불러 꾸짖어 “아재비는 나 때문에 내질을 관장하는데, 나의 아이를 방해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하니, 삼호가 웃으며 “얻을 수 없는 것을 얻는 것은 상서로운 일이 아닙니다. 급히 차며 기울어지고 서서히 이루어지면 완전합니다. 비록 전군이 아니더라도 또한 부마가 될 수 있습니다. 하필 제도를 넘어서서 뭇 사람들의 마음을 거스른 후에 가하겠습니까?” 하였다. 미실의 노여움이 여전히 풀어지지 않자, 삼호는 내질을 사직하였다.
미실은 이에 영실공의 아들 노동弩同을 천거하여 내질을 관장케 하였다. 제가 공을 봉하려는 미실의 바램을 알고, 공을 제의 가자假子로 삼아 전군의 위를 주어 미실의 마음을 위로하니, 미실은 마침내 기뻐하였다. 전군으로 봉하는 예를 수종전군의 (탄생) 77일에 행하였다. 제와 더불어 미실전주, 수종전군 및 공이 함께 수레를 타고 신궁에 이르러 예를 행하였다. 미실의 기쁨이 지극하여 제의 품 안에 엎드러지며 말하기를 “하루에 두 전군의 어미가 되었습니다”하였다. 제가 …를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짐과 더불어 한 몸인데 어찌 다만 두 전군뿐이겠는가. …가히 너의 아들이 될 수 있다.”하였다.

[어머니 미실]
이 날 밤 제는 …에서 잔치를 베풀어 … 친히 축하하고, 태자 이하 왕자, 전군142)에게 명하여 미실에게 절하고 어머니라 부르도록 하였다. 태자는 미실과 더불어 사통私通한 바 있는 까닭에 억지로 절하였다. 미실이 일어나 멈추게 하며 말하기를 “태자는 다른 전군과 같지 않은데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하였다. 제가 이에 명하여 태자에게는 일배를 허락하였다. 다른 사람은 사배하고 일어났다. 제가 몹시 기뻐 취했고, 미실도 역시 취하여 서로 이끌며 장막으로 들어가고, 태자 이하가 만세山呼를 외치고 물러갔다.

[개에 물려 죽은 동륜태자]
당시 보명궁주宝明宮主가 태자의 연모를 받았으나, 몸을 허락하려 하지 않았다. 태자는 이에 장사 수인數人과 더불어 궁의 담장을 넘어 들어갔다. 궁주가 미실과 더불어 왕의 총애를 다툴 수 없음을 알고, 감히 태자를 힘써 거부하지 않아 일이 성사되었다. 그 후 태자가 매일 밤마다 넘어 들어왔다. 이레째 밤에 태자가 아무도 거느리지 않고 혼자 들어가다가 큰 개에게 물렸다. 궁주가 안고 궁중으로 들어갔는데, 동틀 무렵 죽었다薨.

[미실의 출궁]
제가 태자의 종인들을 조사했는데, 미실과 미생의 낭도들이 많았다. 미실의 추잡한 짓이 종인들의 입에서 많이 나왔다. 제가 비로소 의심하여 큰 옥사를 일으키려 하자, 미실은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목놓아 울며 궁을 나갔다. 공 또한 전군의 위를 사퇴하였다. 사도황후가 간하여 “삼주三柱의 맹세가 있습니다. 어찌 천한 무리들의 어지러운 말로 총첩의 은혜를 빼앗고, 죽은 아들의 혼령을 아프게 하려 합니까?”하였다. 제가 이에 불문에 부치라는 조칙을 내렸다. 곧 다시 미실을 생각하고 제가 친히 거등하였다. 미실이 눈물을 흘리고 울며 왕을 붙들고 사죄하니, 제가 또한 받아들였다.
그 때 세종공이 지방으로부터 소환되었다. 제가 다시 미실을 전주로 삼고자 하였으나, 세종공에게 믿음을 잃을까 염려하여 그만두었다. 미실 또한 세종공의 지성에 감격하고 공의 부자와 단란團欒한 즐거움을 갖고자 해궁海宮143)으로 피하여 가 살았다. 공은 부모를 지극한 효도로 섬겼다. 세종공은 이에 미실과 더불어 공의 장수를 해신海神에게 빌었다. 그 때 수종 전군이 어렸기에 따라가서 해궁에 있었다. 제가 수종을 본다는 핑계로 여러 번 불렀으나, 미실은 글을 올려 자기의 죄를 늘어놓고 거절하였다.

[미실의 입궁]
제가 이에 친히 해궁에 거등하여 서로 보고 … 눈물을 흘렸다. 미실이 감동하고 다시 마음이 움직여 마침내 제와 더불어 …로 돌아갔다. 세종공을 병부 우령兵部右令144)으로 삼아 위로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 보명궁주를 …하고, 신궁을 황후궁 좌원左園에 지어 … 모궁母宮 …. 입궁하여 공주와 전군의 벗이 되었다. 그 때 미실은 세종공의 아들을 임신한 지 이미 수 개월이 되었으므로, 해산을 하고 입궁하겠다고 청하였다. 제가 허락하지 않자, 입궁하여 옥종공玉宗公을 낳고 제의 마복자摩腹子로 삼았다. 이로써 미실에 대한 총애가 다시 예전과 같아졌다. 미실은 심복들을 모두 다시 끌어모아 중요한 지위를 주었는데, 제가 모두 허락하였다. 또 세종공에게 명하여 입궁하여 살도록 하였다.

[진흥의 풍질과 미실ㆍ사도]
미실은 이에 사도황후와 함께 내정內政을 마음대로 하였고, 세종ㆍ설원ㆍ미생은 외정外政을 마음대로 하였다. 제는 풍질風疾145)로 내외의 정사를 보지 못하고, 오직 사도ㆍ미실ㆍ보명ㆍ옥리玉理ㆍ월화月華 다섯 궁주146)와 더불어 즐거움에 탐닉하였다. 정사는 모두 사도와 미실로부터 나왔다. 처음에 사도후와 더불어 미실은 삼생三生147)의 일체가 될 것을 약속하였다. 이에 이르러 제가 자못 몸이 불편하였기 때문에, 미실은 세종에게 사도의 사랑辛을 받도록 권하였다. 세종은 힘써 거절하였으나 어쩔 수 없어서 후后와 통하였다.

[진지왕의 즉위를 둘러싼 내막]
제가 붕崩하자 사도ㆍ미실ㆍ세종ㆍ미생은 비밀로 하였다. 태자가 알지 못하였다. 사도가 먼저 미실로 하여금 태자와 통하게 하고, 다른 마음을 갖지 않기로 약속하고 태자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몸소 제위帝位에 있으며 신왕148)을 통제하고, 말보末宝의 남편인 황종공荒宗公을 상대등上大等149)으로 삼아 중망衆望150)을 눌렀다. 그 때 황종공의 딸 윤궁允弓이 미실의 심복이 되었고, 윤궁의 아우 윤옥允玉은 미생의 첩이었고, 윤궁의 남동생 윤황允荒은 사도의 딸 월륜공주月輪公主를 아내로 맞았기 때문에 황종공을 추대한 것이다. 거칠부공居柒夫公151)은 나이가 많아 대등 노리부弩里夫ㆍ노동공弩同公 등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그러므로 미실은 권세를 잃지 않았다. 공에게 급찬의 위를 주었다. 공은 15살에 화랑에 들어가 역사를 토함공에게, 노래를 이화공에게, 검술을 문노에게, 춤을 미생공에게 배워 모두 그 정수精髓를 얻었다. 늘 선제先帝의 총애를 생각하여 매번 생일과 기일이 되면 낭도들을 거느리고 능침陵寢에 나아가 눈물을 흘렸는데, 비록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도 그만두지 않았다. …을 듣고 … 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사람을 잘 추천하였는데, 정情이 치우치지 않아 … 중망이 있었다.

[진골 정통과 대원 신통의 조祖와 종宗]
공의 어머니가 미실 궁주였기 때문에 공 또한 대원 신통이었다. 문노파가 불복하였기에, 미실은 화합토록 하고자 이화공의 아들 보리공菩利公을 부제로 삼았다. 보리공의 어머니는 숙명공주였기 때문에, 보리공은 진골정통이었다. 진골(정통)은 지소를 종宗으로 삼았고, 대원 신통은 사도를 종宗으로 삼았다. 진골(정통)의 조祖는 옥모玉帽로부터 출생하였고, 대원(신통)의 조祖는 보미宝美로부터 출생하였다.152) 그렇지만 양골兩骨153)이 서로 뒤섞이어, 풍월주가 되는 사람은 각기 단지 그 당시의 정황에 따라서 나왔다.

[화랑도의 붕당과 청원의 기]
바라는 바가 충족되지 않으면 비록 화합을 하나, 안으로는 서로 반목하여 붕당이 더욱 심하여졌다. 공은 비록 젊었으나 이것을 깊이 경계하였다. 골고루 사랑하는 데 힘을 다한 결과 일시적으로 성황이 나아졌으나, 주형主兄과 부제副弟가 다른 파인 까닭에 자연히 불화가 점차 드러나서 보리공을 끌어서 몰아 내려 하였다. 보리는 평소에 공에게 좋게 보였기에, 마음으로 내키지 않았으나, 압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보리가 울며 공의 인정에 호소하였다. 공은 이에 이화공을 찾아가 옳게 결단할 가르침을 청하니, 이화공은 “선도仙道는 본래 우주의 청원淸元의 기氣에서 나왔다. 시비로써 서로 다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형 모랑공이 오직 그 전부를 얻었는데 불행하게 일찍 죽었다. 나는 못나서 그 도를 다 듣지 못하였다. 너희들은 모두 권세와 지위로써 위位를 계승하였기에, 아랫사람들을 다스릴 수 없다. 나는 마음 속으로 그것을 부끄러워한다. 위位를 버리고 도를 구하여 참된 생이 되도록 하라”하였다.

[삼파의 단결]
공은 이에 위를 그만두고 도에 전념코자 하였다. 낭도들은 이화공이 스스로 풍월주가 될 계략으로써 공을 혼란시켰다고 생각하였다. 미실궁주가 걱정하였다. 이에 사도태후의 조칙으로 낭도 대회를 열고 이화공과 세종공으로 하여금 연회를 베풀어 화합시키도록 하였고, 불복하는 사람들을 많이 등용하여 진정시켰다. 이로써 가야파가 점차 다시 세력을 갖게 되어, 서현랑을 전방화랑으로 삼았는데, 이이 또한 대원 신통이었다. 이것은 이화ㆍ미실ㆍ가야 삼파가 단결한 것이다.

[삼태후의 행정과 화랑도]
그 때 궁중에는 3태후가 있어 행정을 하였고, 대왕은 어질고 효성스러워서 어른들의 명을 받들어 따랐다. 그러므로 낭도 중 승진하기를 종하하는 자들을 태후궁에 많이 붙었다. 태상태후太上太后인 사도법주思道法主154)는 미실궁주로서 법운法雲을 삼았다. 그러므로 정령政令이 미실궁에서 많이 나왔다. 그런데 법주의 딸 아양공주阿陽公主가 곧 서현의 어머니였기에 가야파의 태양이 되어 미실의 세력을 나누었다. 만호태후萬呼太后는 대왕의 어머니155)로, 더욱 상上의 총애가 있어서 진골 정통의 수주首主가 되었다. 지도태후156)가 태상太上과 만호 사이를 출입하며 문노정파文弩正派를 도왔다.
그러므로 비보랑이 지도의 아들 용춘공을 천거하여 보리공을 대신코자 하였는데, 만호태후가 들어 주지 않았다. 용춘공이 비록 (풍월주의) 위에 오르지는 못하였으나, 낭도들이 많이 귀부歸附하매, 서현랑이 말하기를 “용춘공은 선군先君의 아들인데 내가 어찌 감히 상대가 되겠는가”하였다. 그 낭도들을 사양하여 용춘공에게 넘겨 주었다. 이에 가야파가 또한 용춘공에게 돌아갔다. 역시 대원 신통이었기에 미실파가 다투지 않았다. 낭도들이 축하하여 말하기를 “좋은 사람을 얻었다”하였다. 보리공 또한 용춘공을 사랑하여 다른 무리를 규합하지 않기로 맹세하였다. 진골과 대원의 논쟁이 이에 비로소 완화되었다. 하종공이 비록 모주母主에게 효성스러웠으나 형세를 살펴서 따랐으니, 안으로는 그 논論에 찬성했으나 밖으로는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그 때 은륜공주銀輪公主가 왕의 총애를 잃었다. 은륜은 태후太后의 막내딸이었다. 태상이 대원 신통을 걱정하여 공에게 명하여 받들도록 하여 효종공孝宗公을 낳았다. 이에 앞서 공은 설원공의 딸 미모낭주美毛娘主를 아내로 맞아 아들 모종毛宗을 낳았다. 효종의 누이는 하희夏姬와 월희月姬라 하였다. 모종의 누이는 유모柔毛와 영모令毛라 하였다. 공은 검소하고 색을 삼갔으며,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윗사람을 공경하여 세종世宗의 풍모를 크게 지녔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공에게 복종하지 않던 사람도 있었으나 끝내는 귀부하였다.

[나의 증조 보리공]
3년간 재위하다가 보리공菩利公에게 양보하며 말하기를 “선대 풍월주들이 큰 성인이었는데도 오히려 3년간 재위하였는데, 내가 어찌 감히 오래 머물겠는가”하였다. 이에 보리공이 “주형主兄은 미실 원화의 아들인데, 어찌 뭇 화랑들과 더불어 같은 예로 하겠습니까”하였으나 공은 굳이 사양하였다. 보리공이 풍월주의 자리에 올랐다. 보리공은 곧 나157)의 증조부이시다. (증조는) 일찍이 나의 아버지에게 하종공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 이 같은 효자ㆍ충신은 없다”하였다.

[삼조를 섬긴 미실]
대게 미실궁주가 삼조三朝를 차례로 섬겼는데158), 형제가 핏줄이 달라 움직이면 어려움이 많았다. 은륜공주 또한 골을 믿고 방탕하였다. 공은 한결같이 세종공이 미실을 대접하는 것처럼 하고 불문에 부쳤다. 태양공주太陽公主는 은륜의 형으로, 공과 더불어 가까이 살았는데 공을 유혹함이 심하였으나, 공은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공의 청렴과 지킴이 이와 같았다고 한다.

찬하여 말한다 : 맑게 삼가고 덕을 닦아 훌륭한 명예를 지켰다. 세종의 아들이고 미실의 소생이다.
세계 : 세종조와 미생조에 자세히 보인다.


[12세 풍월주 보리공]-------------------------------------------------------------------------------------------------------------------

<보리菩利는 계사년(573)생이고 신해년(591)에 화랑주花郞主가 되었다>

12세 보리공은 이화공의 차자次子이다. 어머니는 숙명공주인데 곧 지소태후의 딸이다. 세종공과 한 배의 맏누이이다.
공주가 꿈에 황색의 신록神廘을 보고 공을 낳았다. 나면서부터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고 큰 뜻을 가졌다. 자람에 따라 맏형인 원광법사와 더불어 배움에 힘써 게으르지 않았다.

[원광과 숙명의 가르침]
원광이 일찍이 가르쳐 말하기를 “나는 부처(佛-실제는 승려)가 되고 너는 선(仙-실제는 화랑)이 되면 우리 나라를 평안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하였다.159) 공은 이에 하종공의 문하에 나아가 그 낭도에 소속되었다. 공은 하종공보다 9살이 적었는데, 감정과 생각이 서로 투합하여 같은 배에서 출생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공의 모친 숙명공주는 효성과 우애가 하늘로부터 타고 나서, 세종을 어린아이처럼 사랑했고, 세종공 또한 공주를 태후처럼 모셨다.
미실이 입궁하고 세종이 출정하자, 공주가 미실과 더불어 화합하지 않았으나, 하종공은 곧 공조의 조카인 까닭에 공주가 특별히 아들처럼 사랑하였다. 한 번은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 태종 각간苔宗角干은 곧 너의 할아버지이다. 하늘도 높다 않고 땅도 넓다 않는 대영웅이다. 너는 마땅히 신神으로 받들어야 한다”하였다. 대개 아버지에게서 배우고 어머니에게는 배우지 말라는 것을 풍자하여 가르친 것이다. 하종공은 속으로 명석한 까닭에 그 가르침을 스스로 알았으나,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한 것은 미실이 아시공과 옥진궁(주)를 호신護神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신궁의 교신상]
공이 처음에 하종공에게 속하였을 때 신궁에 따라 들어가서 법흥과 옥진의 교신상交神像160)에 절을 하는데, 옥진에게 먼저 절하고 후에 제에게 절을 하였다. 공이 옳지 않게 여겨 말하기를 “우리들이 오늘 귀한 것은 모두 선제先帝가 내려 준 것인데, 어찌 그를 뒤로 합니까”하니, 하종공이 “선제 또한 말하기를 ‘억조창생이 나를 신으로 여기는데, 나는 옥진을 신으로 여긴다’하였으며, 영실공 또한 (옥진)궁(주)에게 먼저 절하고 나서 제에게 절했다. 이것이 그 상像이다. 대개 미실이 가르친 바이다”하였다. 공이 부득이 따랐다. 그 다음에 아시공에게 절을 하였다. … 태종공苔宗公 …. 공은 또한 그 순서에 의심을 가졌으나 따지지 않았다. … 모제母弟가 어머니에게 불효하였다. 하종공이 말하기를 “돌아가 숙며에게 말을 하여 … 태종공과 더불어 옳다”하였다. 대개 양공兩公의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마음 … 이다.

[우방화랑]
그 때가 건복 2년(585)으로 공의 나이 13살이었다. 하종공이 우방대화랑이 되었다. 그러므로 공은 특별히 뛰어넘어 우방화랑이 되었다. 미생공이 부러워 말하기를 “너는 나보다 낫다”하였다. 공은 주형主兄에게 충성을 다하여 곁을 떠나거나 명을 어긴 일이 없었다. 미실 또한 칭찬하여 말하기를 “공주에게 좋은 아들이 있으니 행운이 나보다 많다”하였다. 매번 궁중에서 음식을 내리면 반드시 공을 불러 말하기를 “나의 사랑하는 조카야! 너의 형을 잘 도와라”하였다. 공주는 이에 오래된 감정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만년에는 서로 왕래하였으니 대개 공이 힘쓴 때문이다.

[만룡과 혼인]
그 때 만호태후와 (숙명)공주는 힘써 진골 정통을 도왔다. 미실이 두려워하여 애함艾含을 공과 결혼시키려 하였다. 만호가 거절하고 그의 딸 만룡낭주를 공의 적처嫡妻161)로 삼았다. 공의 나이 겨우 13살이었고 만룡은 7살이었다. 이화공이 만룡이 어리기 때문에 꺼리자, 공주는 “사도 또한 7살에 대제에게 시집갔는데, 오히려 부부의 즐거움이 있었다. 무엇 때문에 꺼리는가”하였다. 이화공은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신궁과 포석사]
이에 앞서 만호태후는 공의 씨 다른 형 포형胞兄162) 정숙태자貞肅太子를 사랑하여 만룡을 낳았다. 그런데 미실의 딸 애함艾含을 공에게 시집보내려 한다는 말을 듣고, 만호는 대원 신통이 진골정통을 빼앗을까 염려하여, 특히 만룡을 주려고 한 것이다. 이에 (만호는) 만룡을 불러 무릎에 앉히고 묻기를 “사도태후는 7살에 시집을 가서 제를 잘 모셨는데, 너 도한 능히 할 수 있느냐?”하였다. 만룡이 “지아비가 누굽니까?”하고 물었다. 공이라 대답하자, 만룡이 기뻐하며 “나의 좋은 형입니다. 시집가기를 원합니다”하였다. 태후는 이에 친히 신궁에 가서 공주례를 고하고 포사鮑祠에서 길례吉禮를 행하였다. 공은 늘 태후궁에서 만룡을 업고 놀았다. 그러므로 길례가 끝나자 만룡이 공에게 업어 줄 것을 청하자, 공이 기뻐하며 허락 하였다. 태후가 웃으며 “지난날 형매兄妹가 지금은 부처夫妻가 되었다. 처는 이와 같으면 안 된다”하니, 숙명이 “부처이자 형매입니다.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하였다. 마침내 공에게 처를 업고 태후를 뵈러 가도록 명하였다. 공과 더불어 낭주가 (태후)를 뵈러 업고 나아가니, 당시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공의 손아래 누이 화명花明은 … 하종공과 더불어 좋아하였다. 미실은 이미 공을 만룡에게 빼앗겼다. … (화)명을 하종공의 적처로 삼으려 하였는데, 만호가 들어 주지 않고 모두 (진골 정통)을 받아들였다. 미실이 좋아하지 않으니, 공이 좋은 말로 위로하기를 “비록 혼인을 하지 않았으나, 조카가 숙모를 어머니로 삼고 주형主兄이 포형胞兄입니다. 이러한 상태로 세월이 가면 어찌 또 혼인하는 날이 없겠습니까?”하였다. 미실이 기뻐하고 마음을 풀며 말하기를 “너는 진정으로 내 아들이다. 또 무슨 혼인을 하겠느냐?”하였다. 공은 양 통163)의 사이에서 이쪽 저쪽을 능히 화해시켰다.

[보리공의 득위]
미실은 이에 하종공에게 풍월주의 지위를 전하도록 권하였다. 공은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풍월주가 되었으니, 건복 9년(591) 정월이었다. 서현랑을 부제로 삼았다. 서현랑은 아양공주阿陽公主의 아들인데 영특하고 통달한 기풍이 있어, 태상태후가 사랑하였다. 하종공에게 명하여 전방화랑을 삼았다. 건복 2년(585)에 공과 더불어 우방화랑이 되었다. 건복 5년(588) 하종공이 풍월주가 되자, 공을 부제로 삼고 서현랑을 우방대화랑으로 삼아 고에게 속하도록 하였다. 이에 이르러 공이 서현랑을 부제로 삼고 용춘공을 우방대화랑으로 삼았다.

[서현과 만명의 탈출]
그 때 만룡의 형 만명萬明은 나이가 들었으나 혼인을 허락받지 못했는데, 서현랑과 사(통)을 하였다. 만호는 원래 아양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므로 노하여 불허하고, 공에게 명하여 용춘공을 서현랑에 대신하도록 하였다. 서현 또한 그 지위를 사양하여 용춘공에게 넘겨 주었다. 그러나 만명의 정과 사랑은 더욱 굳어져 몰래 서로 도망하여 만났다. 만호는 이에 만명을 가두고 서현을 만노萬弩로 내치려 하였다. 만명은 탈출하여 함께 도망하였다. 태후는 더욱 노하여 벌을 주려고 하였으나, 공과 만룡이 힘서 태후의 노여움을 풀어 무사하게 되었다.

[화랑 세습 가문]
그 때 공의 여형女兄 화명과 옥명玉明이 진평대왕을 섬겨 사랑寵을 받았으므로, 조정에서는 공을 중용하고자 하였다. 공은 나아가지 않고 말하기를 “우리 집은 화랑을 세습하는 것으로 족하다. 다시 무엇 때문에 관리가 되겠는가”하였다.

[만룡의 부도]
공이 청렴결백하며 지조를 지켰으나, 낭주는 태후의 사랑하는 딸이었기 때문에 내리는 재물이 심히 많았다. 그러므로 집안 생활이 몹시 사치스러웠다. (이에) 공이 낭주에게 일러 “내가 낭도의 우두머리君로 어찌 홀로 부귀를 누리겠는가. 나의 아내는 나의 마음을 헤아려 주기 바란다”하니, 낭주가 말하기를 “부부는 한 몸입니다. 낭군의 마음은 첩의 마음입니다. 어찌 안 될 일이 있겠습니까?”하였다. 이에 그 재물을 모두 나누어 주니, 낭도들이 우러러보기를 부모같이 하였다. 무릇 근심과 재난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공과 낭주는 함께 가서 위로하고 구호하여 주었다. 그 때 사람들이 두 성인이 순행하며 다스리는 것에 비교하였다. 낭주는 왕의 누이라는 귀한 신분으로 지어미의 도리를 다하였다. 공이 조금만 아파도 몸소 간호했으며, 음식과 의복도 친히 조리하고 손질하여 올렸는데, 반드시 공의 취향에 맞았다. 그러므로 공이 고맙게 여겨 다른 여자를 거느리지 않았고, 금슬이 비할 바 없이 좋았다.
늦게 한 아들과 한 딸을 낳았는데, 아들은 예원禮元이라 하고 딸은 보룡宝龍이라 하였으니, 곧 우리 문무왕후의 어머니이다. 서자는 보태菩太와 보호菩好이고, 서녀는 보단菩丹과 이단利丹인데, 만룡낭주의 침비枕婢 후단厚丹이 낳았다. 처음에 비대공의 딸 후만厚滿이 설원공과 통하여 후단을 낳았다. 만룡이 출생하자, 후만이 비보랑 서매庶妹로 들어와 유모乳姆가 되었다. 이 까닭에 후단이 침비가 되었다. 혼인을 하고 나서 태후가, 공은 다 자랐으나 처는 어리다는 것을 고려하여, 비婢에게 명하여 공을 모시도록 하였다. 공은 거절하고 동침親하지 않았다. 낭주가 걱정하여 후단과 더불어 뜰에 단을 쌓고 (낭주가) 속히 자라기를 빌었다.

[남도의 예]
공은 건복 8년(591) 춘정월 15일에 풍월주의 지위에 나아갔다. 낭주는 아직 겨우 13살이었다. 공은 어리다고 하여 남도南桃의 예를 미루려 하였다. (이에) 낭주가 말하기를 “군君은 낭도의 아버지인데 첩이 모도母道164)를 이루지 못하면 수치입니다”하였다. 이에 (남도의 예를) 행하고 사랑을 나누었다. 공이 기이하게 여긴 즉, 낭주가 “후비厚婢가 나에게 도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낭군이 그를 첩으로 삼기를 원합니다”하였다.

[첩의 조건]
공은 비록 그 공을 칭찬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낭주는 제에게 청하였고, 제는 공을 불러 꾸짖으며 “후단이 비록 비婢이나 비대전군의 손이고 설원 상선의 딸이다. 첩으로 삼을 수 있다”하였다.165) 공은 이에 (후단을) 사랑하여 아들을 낳았다. 공이 탄식하여 “적자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는데 서자가 먼저 나왔으니 이는 나의 잘못이다”하니, 낭주가 위로하여 “어찌 선후가 있습니까. 만약 제가 낳기를 원하면 곧 데려다 아들을 삼으면 되지 않겠습니까”하였다. 후단이 이에 그 아들을 낭주에게 바쳤고, 감히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낮이나 밤이나 낭주에게 아들이 생기도록 빌었다. 태후가 듣고 또한 궁중에서 빌고 점을 치니, 점장이가 말하기를 “낭군은 낭주를 … 때문에 출산한 겨를이 없습니다. 가히 첩이 있어 사이에 …다”하였다. 이 말을 공에게 간하니, 공이 이에 깨달았다. 이에 …에게 물었다. 예원공(을 낳자) 후단의 자녀를 돌려 주도록 명하였다. 그 때 공주 등이 모두 … 신첩臣妾이 되어 정해진 지아비가 없는데, 오직 공의 처첩은 유독 배반하지 않았다. 골인骨人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공은 3년간 풍월주의 위位에 있다가, 부제 용춘공에게 전하여 주었다. 위位는 비록 상선上仙이었으나, 몸은 불문佛門에 바쳐 백씨伯氏를 도왔다. 만룡과 후단 모두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공의 뜻을 받들었다. 만룡은 늘 같은 날 성불할 것을 기도하였는데, 과연 그 말과 같이 되었다. 공의 만년의 일은 『고승전高僧傳』166)에 나온다.

찬하여 말한다 : 보리 사문은 위화랑공의 손이고, 덕은 만룡과 화합하고 은혜는 바다나 산과 같고, 공은 불문에 높고 만세에 오직 우러러본다.

세계 : 아버지는 이화랑인데 곧 위화랑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숙명공주인데 곧 지소태후의 딸이다. 이화공은 모랑공의 처남으로 함께 지소태후를 섬겨 사랑을 받았다. 모랑공이 죽자 이화공이 모랑을 이어 태후의 사신私臣이 되었다. 숙명공주는 그 때 황후의 지위로 이화공의 아름다움에 깊이 빠져 골품骨品을 초개처럼 내버리고,167) 동혈同穴의 벗이 되기로 약속하여 손을 잡고 출궁하여 종신토록 배반하지 않는 것이 마치 랑狼과 패狽가 서로 의지하는 것 같았다.168) 평자評者 중에는 비난하는 자도 있으나, 가만히 생각하면 또한 장하지 않은가! 눈이 맞아 출궁했을 때, 제의 노여움이 혁혁하며 무거운 형벌이 앞에 있어 목숨이 털끝 같았으나, 오히려 부둥켜안고 사랑하며 굴하지 않아 우리 신국神國의 대성인 원광대법사를 낳았으니, 진실로 하늘의 뜻이다. 성대하고 지극하도다.


[13세 풍월주 용춘공]-------------------------------------------------------------------------------------------------------------------

<용춘龍春은 무술년(578)생이고 병진년(596)에 낭주朗主가 되었다>

13세 용춘공은 금륜왕金輪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지도태후인데, 곧 기오공起烏公의 딸이다. 기오공은 선혜황후의 사자私子로, 사도태후의 포매胞妹 흥도 낭주興道郎主를 아내로 맞아 지도智道를 낳았다. 지도가 처음 동태자궁에 들어갔을 때 태자가 아직 죽지 않았는데, 금태자와 더불어 사랑私을 하였다. 동태자가 죽자 총애가 더욱 도타워졌다. 금태자가 즉위하자 황후가 되어 공을 낳았다.

[용춘의 고매함]
공의 성품은 온화하고 공손하였으며 …를 좋아하였고 탐욕스럽고 방탕한 놀이에는 끼이지 않았다. 진평대왕이 그 …를 기특하게 여겨, … 공을 지도하게 하였다. 이화二花와 문노文弩의 학學을 얻어 …의 도를 잘 하였다. 공의 손위 누이인 용명공주龍明公主는 곧 진흥의 딸이다. 진평을 섬겨 총애가 있었다. 공의 처지를 열심히 도와 (풍월)주의 지위를 얻게 하였다.

[용춘의 출생]
공의 형 용수 전군龍樹殿君은 혹은 동태자의 아들이라고 하고, 혹은 금태자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그 진실은 알 수 없다. 『전군열기殿君列記』에 이르기를 “공은 곧 용수 갈문왕의 동생이다. 금륜왕이 음란함에 빠졌기 때문에 폐위되어 유궁幽宮에 3년간 살다가 죽었다崩. 공은 아직 어려 그 얼굴을 몰랐다. 지도태후가 태상태후의 명으로 다시 신왕(진평왕)을 섬기자 공은 신왕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 때문에 왕이 가엾게 여겨 총애하고 대우함이 매우 도타웠다. 자라자 곧 슬퍼하며 문노의 문하에 들어가, 비보랑을 형으로 섬기고 서제庶弟 비형랑鼻荊郞과 함께 힘써 낭도를 모았다. 그렇게 하자 대중이 따랐고 3파가 모두 추대하고자 하였으므로, 서현랑이 위를 물려 주었다”고 한다.

[골품]
그리하여 13세 (풍월주)가 되었고 호림공虎林公을 부제로 삼았다. 공은 곧 낭도의 구습舊習을 고쳤다. 한결같이 인재를 뽑는데 골품에 구애받지 않으며 말하기를, “골품이란 것은 왕위와 신위를 구별하는 것이다.169) 낭도에 골품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이 법의 원칙이다. 어찌 파로써 다스리겠는가”하였다. 무리들이 크게 화합하여 말하기를 “문노의 다스림이 다시 밝아졌다”하였다.

[신선골과 균등]
이보다 앞서 미생공은 많은 폐첩嬖妾170)이 있었다. 9부 낭두郎頭들이 모두 첩을 통하여 청탁을 하였다. 그러므로 다투어 그 딸을 바치고 청탁을 하여, 화랑과 맺어진 낭도들을 이름하여 ‘신선골新善骨’이라 하였다. 보리공이 염려하여 3파를 섞어 등용하고 그 세력을 고르게 하였는데, 이름하여 ‘균등均登’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공이 있는 자라도 만약 균등에 걸리면 진급 시키지 않았다.

[대남보]
그 때 대남보大男甫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용감하고 일을 잘 처리하였으며 급인지풍急人之風171)이 있어 무리들이 모두 우러러 보았다. 그런데 선골善骨의 품品이 없고 또한 균등의 힘이 없었다. 어떤 이가 대남보에게 권하여 “그대의 딸이 아름다운데 어찌 신주新主에게 바치고 골품을 얻지 않는가”172)하니, 대남보는 “우리 무리는 천인인데 어찌 감히 여색으로 풍월주를 미혹할 수 있는가”하였다. 공이 듣고 그 말을 기특하게 여겨 낭두별장郎頭別將을 불러 묻기를 “대남보의 재능이 낭두가 될 만 한가”하니, 답하기를 “될 만합니다. 그러나 골품이 없습니다”하였다. 또 “… 공功은 어떠한가”하고 물으니, 답하기를 “윗사람(풍월주)을 모신 같은 낭도로서 출정한 바 있는데, … 대상對上이 아직도 승진 못 했습니다. 따라서 어쩔 수 없습니다”하였다.
공이 “대상이 누구인가”하고 묻자 잡하기를 “조심보曹心甫입니다.”하였다. 공이 또 “조심보가 대남보보다 공이 큰가”하고 물으니, 답하기를 “조심보는 비록 공이 없으나 대남보의 대상입니다. 만약 대남보를 승진시키려면 반드시 먼저 조심보를 승진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3파 균등의 법입니다”하였다. 공이 웃으며 “재능이 없는 자를 재능이 있는 자의 대상으로 삼아 재능이 있는 자를 승진시키지 않는 것은 재능을 장차 썩이는 것이다. 골骨과 파派가 장차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하고는 대남보를 세 번 승진시켜 낭두郎頭로 임명하였다. (그러자) 불평하는 자들이 상선上仙을 찾아가 바로잡으려 하였다. 문노공은 “법이 점점 더 날로 새로워지고 우리들은 모두 늙었는데, 어찌 신주新主173)를 괴롭히겠는가”하였다. 이로 인하여 미생공 또한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구습이 고쳐졌다.

[대남보의 딸]
대남보의 딸은 공을 위하여 스스로 정절을 지키고 유화遊花가 되기를 거부하였다. 공이 딱하게 여겨 여러 차례 말하였으나 안 되었다. 대남보가 “한 명의 여자로 인하여 어찌 공께서 걱정하실 수 있습니까?”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내가 너를 사사롭게 대한다고 할까 염려하기 때문이다”하였다. 딸이 듣고 슬퍼하여 우물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낭두 등이 이에 머리가 땅에 닿도록 공에게 절叩頭하고 말하기를 “이같이 이르도록 만든 것은 신들의 잘못입니다”하였다. 공은 마지 못하여 거두었다. 그 날로 남보男甫를 해직하고 말하기를 “부녀가 한 사람을 섬길 수는 없다”하였다. 남보는 기뻐하며 “나를 알아 주면 충분합니다. 어찌 모름지기 지위를 논하겠습니까?”하였다.

[아이들의 노래]
제가 이를 듣고 곧 남보를 등용하여 공의 궁사지宮舍知로 임명하여 재용財用을 관장하게 하였다. 남보는 원래 부유하였는데 그 재물을 모두 기울여 공이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결사대 백 명을 모아서 공을 호위하였으나 공은 알지 못하였다. 공이 하루는 종자從者드과 더불어 미복微服으로 거리를 지나는데, 어린아이들이 노래唱하여 부르기를


     처를 바쳐 부자가 되고
     일곱 아들이 모두 말을 탄다네
     딸을 바치고 가난해져
     세 아들이 모두 베엇을 입었다네


하였다. 공이 물었으나, 종자들이 말하지 않았다.

[남보의 아들]
남보의 집에 이르자, 그 처와 세 아들이 삼을 쌓아 놓고 손으로 껍질을 벗기고 있다가 공을 보자 그것을 숨겼다. 공은 이에 종자들이 바른대로 말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였다. 종자들이 복종하여 말하기를 “당두唐斗의 일곱 아들은 모두 영달하였는데, 남보男甫의 세 아들은 모두 천한 까닭에 거리에 이 노래謠가 있습니다”하였다. 공이 오랫동안 슬퍼하다가 “이는 나의 잘못이다”하였다. 이에 그 장자 학열郝熱을 승부乘府에 천거하여 오지烏知174)를 주었고, 다시 그 두 동생을 …에 부탁하며 말하기를, “남보는 나를 위하다가 가난해졌다. 나는 장차 위를 물려 줄 것이다. 그대는 그…”라고 하였다. 호림공이 (풍월주의) 지위에 오르자, 모두 등용하여 낭두郎頭로 삼았다. 남보는 그 아들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도록 타일렀다. 세 아들은 모두 충절을 숭상하였다. 건복 20년(603) 공과 비보랑이 제를 좇아 한수漢水의 전쟁에 나갔다. 남보에게 공으로 대나마를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용수 전군]
그 때 대왕은 적자嫡子가 없어 (용춘)공의 형 용수전군龍樹殿君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 주려 하였다.175) 이에 전군이 공에게 의견을 물으니, 공이 답하기를 “대왕의 춘추가 한창 강성할 때인데, 혹시 왕위를 이으면 불행할까 염려됩니다”하였다. 전군은 이에 사양하였으나 마야황후摩耶皇后가 들어 주지 않고, 마침내 전군을 사위로 삼았으니 곧 천명공주天明公主의 남편이다.

[천명공주가 그러워한 사람]
이보다 앞서 공주는 마음 속으로 공을 사모하여 황후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남자는 용숙龍叔과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하였다. 황후가 용수龍樹로 생각하여 시집을 잘못 보냈던 것이다. 공주는 이에 공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첩이 본래 그리워한 사람은 곧 그대입니다”하니, 공이 말하기를 “가정의 법도는 장자가 귀한 것인데, 신이 어찌 감히 형과 같겠습니까"하였다. 공주는 공을 더욱 사랑하여 제에게 공의 처지를 떠받쳐 주게 하였고, 여러 차례 공의 관계官階를 승진시켜 위位가 용수공과 같게 하였다. 용수공이 공주의 뜻을 알고 공주를 공에게 양보하려 하였으나, 공이 힘써 사양하였다. 마야황후가 밤에 궁중에서 잔치를 베풀고 공을 불러 공주와 함께 묵도록 하였다. 용수공 또한 늘 병을 칭하고 공에게 공주를 모시고 공주의 마음을 위로하도록 명하였다. 공은 스스로 게으르거나 방자肆한 적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공은 대궐에서 더욱 신임을 받았다.

[낭도 등용]
호림공에게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 주게 되자, 조정에 들어가 요직에 있었는데 대사大舍 이하에 재능이 있는 낭도들을 많이 등용하였다. 이로써 낭도로 등용된 자들이 또한 공을 심히 존중하여 모두 목숨 바치기를 원하였다.

[천명과 선덕]
선덕공주善德公主가 점점 자라자 용봉의 자태와 태양의 위용176)은 왕위를 이을 만하였다. 그 때는 마야황후가 이미 죽었고崩 왕위를 이을 아들이 달리 없었다. 그러므로 대왕은 공을 마음에 두고 공주에게 그 지위를 양보하도록 권하였다.177) (천명)공주天明公主는 효심으로 순종하였다. 이에 지위를 양보하고 출궁出宮을 하였다.178) 선덕은 공이 능히 자기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여 사신私臣이 되기를 청하였다. 대왕이 이에 공에게 공주의 뜻을 받들도록 명하였다. 선덕은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감정이 풍부 하였다. 공이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고 굳이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받들게 되었는데, 과연 자식이 없어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대왕은 용수공에게 모시도록 명하였는데 또한 자식이 없었다.

[용춘과 춘추]
그 때 승만황후僧滿皇后179)가 … 아들을 낳자, 선덕의 지위를 대신하고자 하였는데 그 아들이 일찍 죽었다. 승만은 공의 형제를 미워하였다. 공은 이에 지방으로 나갔다. 고구려에 출정하여 큰 공을 세우게 되자, 승진하여 각간角干에 봉해졌다. 용수 전군이 죽기薨 전에 부인과 아들을 공에게 맡겼다. 그 아들은 곧 우리 태종太宗 황제이고, 부인은 곧 천명공주이다. 처음에 용수공은 천화공주天花公主를 아내로 맞았는데, 천명공주를 아내로 맞게 되자 천화공주를 (용춘)공에게 주었다. 아들을 낳았는데 일찍 죽었다. 선덕공주를 모시게 되자, 제가 천화공주를 백룡공白龍公에게 내려 주었다. 선덕공주가 즉위하자 공을 지아비로 삼았는데, 공은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군신群臣들이 이에 삼서三婿의 제도를 이논하여 흠반공欽飯公과 을제공乙祭公을 보좌副하도록 하였다. 공은 본디 금륜金輪이 색에 빠져 폐위된 것을 슬퍼하였고, 성품이 색을 좋아하지 않아 왕에게 아첨할 생각이 없었기에 물러날 뜻이 더욱 굳어졌다. 선덕은 이에 정사政事를 을제180)에게 맡기고 공에게 물러나 살기를 허락하였다. (물러난) 공은 천명공주를 처로 삼고, 태종을 아들로 삼았다.

[용춘의 자녀]
이에 앞서 왕명으로 호명궁昊明宮에 살며, 딸 다섯을 낳았고 달리 적자嫡子는 없었다. 그러므로 태종을 아들로 삼은 것이다. 서자는 다섯인데, 용산龍山과 용석龍石은 대씨大氏가 낳았다. 용귀龍貴는 미생공의 딸 매생梅生이 낳았다. 용주龍珠와 용릉龍凌은 비보랑공의 딸 홍주紅珠가 낳았다. 서녀는 18명이었다. 용산의 누이 용태龍泰는 태종을 섬겨 인태仁泰 각간을 낳았다. 용주의 누이 용보龍宝는 태종을 섬겨 차득車得과 마득馬得 양 공을 낳았다. 공은 청렴하고 담백하여 색을 멀리 하였는데, 자손이 저절로 창성하였다. 사람들이 덕이 있는 사람은 창성한다고 말하였다. 나머지 자손을 다 기록하지는 않지만 모두 귀하게 영달하였다.

[용춘의 만년]
공은 만년에 거문고와 바둑을 즐겼다. 천명天明〮〮〮・호명昊明 양 궁과 더불어 산궁山宮에서 술상을 차려 놓고 바둑을 두고 거문고를 탔다. 시첩 다섯이 온화한 모습으로 받들어 섬겼다. 태종은 효성을 극진히 하여 안락하게 모셨다. 태화太和181) 원년(647) 8월 세상을 떠나니薨, 수壽가 70이었다. 태종이 즉위하자 갈문왕葛文王으로 추존하였다.182) 아, 성대하다! 공의 성스러운 덕은 하늘과 같고 땅과 같아 영원히 다하지 않을 것이다.

찬하여 말한다 : 갈문왕의 덕 일월과 아울러 밝고, 삼한의 업이 힘입어 크게 이루어지도다.

세계 : 아버지는 금륜대왕이고 어머니는 지도황후이다. 금륜의 아버지는 진흥대제이고 어머니는 사도태후이다. 지도의 아버지는 기오起烏 각간이고 어머니는 흥도興道인데, 영실공의 딸이며 곧 사도태후의 포매胞妹이다. 기오의 아버지 홍기洪器가 신궁봉사神宮奉事가 되어 신궁황신神宮皇神과 통하여 선혜황후를 낳았다. 홍기의 아버지는 보기宝器이고 어머니는 수리首里이다. 보기의 아버지는 보신保身이고 어머니는 황아皇我이다. 보신의 아버지는 미해美海이고 어머니는 보미宝美이다.

[대원 신통의 대원]
보미는 대원 신통의 대원大元이다. 황아皇我는 눌지왕의 딸이고, 그 어머니는 치술공주鵄述公主인데, 실성왕의 딸이다. 제상공堤上公에게 시집을 가서 삼아三我를 낳았으나, 제상공이 장차 멀리 떠나려 하자, 장사長沙에 드러누워 오랫동안 크게 울며 일어나지 않았다.183) 왕이 불러 궁중으로 들여 색도色道로써 위로하니 마침내 황아를 낳았다. 그러므로 미해공美海公이 눌지왕에게 청하여 보신공宝信公의 배필로 삼으려 하였는데,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薨. 보미가 미해공의 말을 따를 것을 청하자 왕이 허락하였다. 그런데 보신이 어린 까닭에 황아는 왕의 총신과 더불어 음란하여 벌지伐知와 덕지德知 양 공을 낳았다. 그러므로 보기공은 실제는 양 공의 동복同腹 아우이다. 황아는 치술의 원한을 갚기 위하여 양 공에게는 무에 힘쓰도록 명령하고, 보기공에게는 의醫에 힘쓰도록 명하였다. 선혜후의 천주사가 발생하자, 보기공은 태의로서 후를 보호하여 욕을 당한 일이 없이 재난이 그쳤다. 그 까닭에 후后가 홍기를 봉사奉事로 삼아 기오공을 낳았다. 아마 홍기의 노력에 대한 보답일 것이다.


[14세 풍월주 호림공]-------------------------------------------------------------------------------------------------------------------

<호림虎林은 기해년(579)생이고 계해년(603)에 (풍월)주가 되었다.>

14세 호림공虎林公은 복승공福勝公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송화공주松花公主인데 곧 지소태후의 딸이다. 혹 말하기를 “공주의 사자私子이기 때문에 그 아버지는 잘 알 수 없다”하고, 혹은 비보랑秘宝郞의 아들이라고 한다. 공은 용력이 많고 격검을 좋아하여 일찍 문노의 문하에 들어갔다. 검소하게 지냈으며 골품으로 뽐내지 않았다. 공의 적형嫡兄 마야부인은 그 때 황후로서 총애를 받았으므로, 용춘공龍春公이 부제로 발탁하였다. 이에 이르러 공은 14세 풍월주가 되었으니 곧 진골 정통이다.

[화랑도와 불교의 융화]
공은 마음가짐이 청렴하고 곧았으며 재물을 풀어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때 사람들이 탈의지장脫衣地藏이라고 불렀다. 공은 낭도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선불仙佛184)은 하나의 도道다. 화랑 또한 불佛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미륵 선화彌勒仙花185)와 보리 사문菩利沙門 같은 분은 모두 우리들의 스승이다”하였다. 공은 곧 보리공에게 나아가 계를 받았다. 이로써 선불이 점차 서로 융화하였다.

[무림거사]
공은 처음 문노공의 딸 현강낭주玄剛娘主를 아내로 맞았으나, 일찍 죽었다. 하종공의 딸 유모낭주柔毛娘主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 때 미실 궁주의 나이가 이미 많았는데, 낭주를 매우 사랑하여 귀한 아들을 보기를 원하였다. 공에게 명하여 천부관음千部觀音을 만들어 아들을 기원하게 하였다. 이에 선종랑善宗郞을 낳았는데, 자라서 율가律家의 대성인이 되었다. 공은 부처를 숭상함이 더욱 깊어졌다. 이에 유신공에게 양위를 하고 스스로 ‘무림거사茂林居士’라 불렀다.

[칠성우]
조정의 일에 간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에 큰일이 있으면 반드시 받들어 물었다. 알천공閼川公ㆍ임종공林宗公ㆍ술종공述宗公ㆍ염장공廉長公ㆍ유신공庾信公ㆍ보종공宝宗公 등과 더불어 칠성우七星友를 이루어 남산에서 만나 놀았다.186) 통일의 기초가 공 등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성대하고 지극하도다.

찬하여 말한다 : 태후의 손이고 진골 정통의 무리이다. 복되게 불선佛仙에 들어갔으니 공이 천추에 드리웠다.

세계 : 아버지는 복승인데 산종공山宗公의 아들이다. 산종공이 법흥의 딸 사도미沙道美를 아내로 맞아 낳았다. 산종공은 곧 법흥의 이부동모제異父同母弟이다. 산종의 아버지는 비처대왕이다. 그러므로 공은 비처의 증손이다. 어머니는 송화공주이고, 그 아버지는 영실英失 각간으로, 지소태후의 계부繼父가 되어 낳았다. 따라서 공은 지소태후의 외손이 된다. 사도미의 어머니 사룡沙龍은 사량궁주沙梁宮主의 손이다.


[15세 풍월주 유신공]-------------------------------------------------------------------------------------------------------------------

15세 유신공庾信公은 서현舒玄 각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만명부인인데, 곧 만호태후의 사녀私女이다. 아버지는 숙흘종肅訖宗인데, 또한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아들이다. 처음 만명과 서현이 야합하여 임신하였는데, 태후는 서현이 대원 신통류이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만노萬弩로 도망하여 무릇 스무 달 만에 낳았는데 꿈의 상서로움이 많았다. 진평대왕은 사매私妹가 괴로움을 받자 서현공을 만노萬弩에 봉하였다. 공은 자라자 태양과 같은 위용이 있었다.187) 태후가 보고 싶어하여 돌아올 것을 허락하여 보고는 기뻐하며, “참으로 나의 손자다”하였다. 이로서 가야파가 마침내 받들었다. 호림공의 부제 보종공은 미실궁주의 막내아들인데 아버지는 설원이었다. 공이 중망衆望이 있다고 하여 그 지위를 양보하였다. 이는 대게 궁주가 태후를 위로하기 위하여 명한 것이다. 그 때 공의 나이가 15살이었는데 커다란 도량을 가지고 있어 낭도들을 능히 다스렸다.

[가야 정통]
가야파의 낭도로서 승진하기를 탐하는 자가 말하기를 “어른께서는 가야 정통으로 어찌 저를 사적으로 돌보지 않습니까”하였다. 공이 정색을 하며 “나는 곧 태후의 손자인데 네가 무슨 말을 하는가. 또한 대인은 사애私愛를 하지 않는다. 공이 있으면 비록 미천하여도 승진을 할 것이다. 어찌 공을 세우지 않는가”하였다. 낭도는 크게 부끄럽게 여기며 물러났다. 어떤 이가 고하기를 그 낭도가 장차 배반할 것이라고 하였다. 공은 “옳지 않으면서 붙는 것은 배반하는 것만 못하다. 그렇지만 그 낭도가 승진을 탐하는 기색으로 보아 반드시 공을 세울 것이다.”하였는데, 후에 과연 그렇게 되었다. 공은 이로써 능히 각도各徒를 화합하였다. (공은) 늘 도徒에게 일러 “우리 나라는 동해에 치우쳐 있어 삼한을 통할할 수 없다. 이것이 부끄럽다. 어찌 구차하게 골품과 낭도의 소속을 다투겠는가. 고구려와 백제가 평정되면 곧 나라에 외우外憂가 없을 것이니, 부귀를 누릴 수 있다. 이것을 잊으면 안 된다”하였다.

[신병의 호위]
무리가 공에게 몸을 바치기를 원하였다. (공은) 이에 지혜와 용기가 있는 낭도를 뽑아서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고, 고사高士들과 힘써 결속을 맺었으며, 중악中岳에 들어가 노인에게서 비결秘訣을 받았다. 신변에는 늘 신병神兵들이 있어 좌우에서 호위하였다. 돌아오자, 호림공이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 주겠다고 청하였다. 공은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에 15세 풍월주가 되었다. 태후가 하종공의 딸 영모令毛를 아내로 맞도록 명하여 미실궁주를 위로하려고 하였다. 영모는 곧 유모柔毛의 동생이었다. 형제가 모두 선화仙花의 아내가 되었다. 그 때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곧 건복建福 29년 임신년(612)이었다. 공이 풍월주의 위에 오르는 날 낭도들과 더불어 병장기를 만들고 궁마를 단련하였다.

[용춘ㆍ유신ㆍ춘추ㆍ문희]
용춘공이 이에 사신私臣으로 발탁하였다. 공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데 시석矢石을 피하지 않기로 맹세를 하고 따랐다. 용수공 또한 그 아들을 맡기니, 공은 크게 기뻐하며 “우리 용수공의 아들은 삼한의 주인이다”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덕공주가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용춘공은 왕의 남편皇婿이 되었다. 천명공주는 … 주가 불안하였다. 공이 용춘공을 설득하기를 “천도天道가 제 스스로 있어 …은 한때의 일로 충효에 어긋남이 있었다”하였다. 춘추공이 그렇게 여겨 곧 천명을 위로하여 용서하였다. 공이 춘추공에게 “바야흐로 지금은 비록 왕자나 전군殿君이라 하더라도 낭도가 없으면 위엄을 세울 수 없습니다”하였다. 춘추공은 이에 공의 누이 문희文姬를 아내로 맞았고 공의 부제가 되었다.

[삼한 통합]
이보다 앞서 보종공이 풍월주가 되기 전에 공에게 양보를 하였다. 따라서 대원파가 불평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공은 이에 풍월주의 위를 보종공에게 물려 주었다. 열국列國을 순행하여 뜻과 기개 있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삼한을 통합하였다. 공의 사업과 공덕은 모두 사책史冊에 있으므로 생략한다.

찬하여 말한다 : 가야의 우두머리이고 신국의 영웅이다. 삼한을 통합하여 오동五東188)의 질서를 바로잡아 통치하니 혁혁한 공명은 해와 달과 아울러 함께 할 것이다.

세계 : 아버지는 서현 각간이고 할아버지는 무력武力 각간이며, 증조는 구충대왕仇衝大王이고, 고조는 감지대왕紺知大王이다.
감지는 다섯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우리 나라의 골품骨品이 있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여 우리 나라 조정에 복종하여 따랐다. 감지왕紺知王 원년(492), 왕의 조카 납수공納水公이 우리 덕지공德知公의 딸 계황桂凰을 아내로 맞았는데, 매우 아름다웠다. 왕 또한 우리 나라 여자를 원하였는데, 왕의 어머니 방원邦媛이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에 왕의 아버지 질지대왕銍知大王이 영명하여 선정을 베풂으로써 금관金官이 잘 다스려졌다. 질지는 백흔공白欣公의 손아래 누이 통리通理를 왕후로 삼았다. 곧 미해공美海公의 딸이다. 그 어머니는 제상공堤上公의 장녀 청아靑我이다. 서로 매우 사랑하였는데 일찍 아들이 없는 것을 한으로 여겼다. 통리는 이에 백흔공의 딸 하희河喜를 데려다가 첩으로 삼았는데, 또한 딸을 낳고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얼마 안 있어 통리가 아들 선통善通을 낳으니, 질지가 크게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선통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였는데, 들에서 사냥을 하다가 비를 만나 사간沙干 김상金相의 집에 들어갔다. 좌지왕坐知王의 외손이었다. 김상의 딸 방원邦媛은 교태에 능하고 아름다웠는데, 선통을 유혹하여 상통하였다. 1년 남짓하여 딸을 낳으니, 통리가 듣고 거두어 태자비로 삼았다. 얼마 안 있어 통리와 선통이 모두 죽었다. 질지가 이에 방원을 왕후로 삼았다. 이에 앞서 방원은 질지가 크게 기뻐하여 왕후로 삼은 것이다. 방원은 …을 좋아하였다. 질지는 늙어 정치를 다스리지 않았다. (신라) 조정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책망하였다. 이 때문에 방원은 우리 나라를 원망하여 감지가 우리 나라에서 아내를 맞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감지 10년(501)에 방원이 죽었다崩.
감지왕은 이에 납수공을 보내어 청혼하였다. 조정에서는 출충出忠 각간의 딸 숙씨淑氏를 허락하여 보냈다. 감지는 그 아름다움을 좋아하여 왕후로 삼고 구충仇衝을 낳았다. 구충은 계봉桂鳳의 딸 계화桂花를 아내로 맞아 왕후로 삼고, 무력武力과 무득武得을 낳았다.189) 모두 우리 나라에 왔는데 조정에서 예로써 대접하였다. 무력은 진흥제의 딸 아양阿陽을 아내로 맞아 서현을 낳았다. 서현은 만호태후의 딸 만명을 아내로 맞아(유신)공을 낳았다. 그러므로 공은 실로 진골眞骨ㆍ대원大元ㆍ가야伽倻 3파의 자손이다.
금관가야는 수로청예왕首露靑裔王에서 비롯하였는데, 황룡국黃龍國의 여자 황옥黃玉을 아내로 맞아 거등居登을 낳았다. 거등은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을 아내로 맞아 마품馬品190)을 낳았다. 마품은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 호구好仇를 아내로 맞아 거질미居叱彌를 낳았다. 거질미는 아궁阿躬 아간의 손녀 아지阿志를 아내로 맞아 이품伊品을 낳았다. 이품은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을 아내로 맞아 좌지坐知를 낳았다. 좌지는 색을 좋아하여 각국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 왕후로 삼았는데, 우리 나라에서도 도령道寧 아찬의 딸 복수福壽를 보내어 아들 취희吹希를 낳자, 좌지가 크게 기뻐하여 정후正后로 삼았다. 금관金官에서 우리 나라 여자를 왕후로 삼는 것이 이로써 비롯하였다. 취희가 왕위에 오르자 복수는 태후로써 집정執政하여 우리 나라 사람을 많이 등용하였다. 금관인 또한 우리 나라에 많이 왔으며, 사이좋게 친한 관계가 점점 깊어졌다. 취희는 우리 나라 진사進思 각간의 딸 인덕仁德을 아내로 맞아 질지銍知를 낳았는데, 곧 공의 5세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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