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관 홈페이지:::aljago.com
.

.
정신세계 나눔터


무원종사와 애국가
 성미경  | 2007·08·29 23:58 | 조회 : 2,662
무원종사와 애국가
우성조 大兄




무원 김교헌 종사 (1868-1923)
관리가 행사 때마다 애창하는 애국가는 그 가사를 지은 작사자의 이름을 모른 체 무명씨로 되어 있다.

개천 4402(1945)년 제국주의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후 새로운 정부 구성을 위한 입법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입법위원회는 헌법을 만들고, 그 헌법에 의한 국가를 세우기 위하여, 각 군(郡)에서 한 명씩 입법위원을 선출하여 입법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당시 입법위원회 의장은 김규식(金奎植) 선생이었다. 헌법의 기초가 이루어지자, 국가(國歌)를 제정하는 문제가 나왔다. 입법위원회는 국가(國歌)로 그 동안 비밀리에 부르던 애국가로 정하였으나, 그 동안 애국가 가사는 “한얼님이 보호하사 우리 나라 만세”로 불렀고, “조선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존하세”로 불렀다. 따라서 한얼님, 보호, 조선사람, 보존하세, 이 네 구절 관계로 무려 2개월 가까이 토론을 해도 해결이 나지 않은 채 시일만 자꾸 연장되고, 중요 안건은 밀려 있고 해서, 의장인 김규식 선생이 직권으로 중재안을 내어놓았다.

「한얼님」이란 국조신(國祖神)을 말하는 것이고,「하나님」이란 기독교의 여호와신을 말하는 것인데, 다 치우고, 배달민족은 한얼의 국가민족이요, 하늘을 숭상하는 민족이니만큼 국민 각자가 자기가 제일 존경하는 신, 즉「하느님(하늘님)」이라고 하자고 했으며, 또「보호냐, 보우냐」이것도 역시 보우(保佑)로 하자,「조선사람 조선으로」이란 구절도「대한사람 대한으로」로 하자,「보전이냐, 보존이냐」도 나아간다는 뜻으로「보전하세」로 하자고 하여, 이 제안이 가결, 통과되어서 오늘날 우리가 애창하는 애국가로 결정되었다.

그 후 일부 사람은 애국가가 변절되었다고 하는 등 입법위원회에서 제정된 애국가를 5·16 군사혁명 직후까지만 해도, 외래종교인 기독교에서는「하느님」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은 자존심을 갖고「하느님」이라고 부르고, 지금은 전국민이 애국가를 애창할 때 하나님이 아닌「하느님」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면 우리의 위대한 애국가 가사는 누가, 언제, 어디서, 왜, 지었을까?
필자와 같이 일하는 단체 회원들이 알기로는 무원 김교헌 종사라고 한다. 김교헌(金敎獻) 종사님은 조선조(朝鮮朝) 개국공신인 경주 김씨 27대손인 계림군 균(?)공의 17세손 공조판서 창희공과 풍양 조씨 판관을 역임하신 희팔공의 따님 사이에서, 경기도 수원군 군포(지금의 군포)의 조부모 댁에서, 교원 교빈 교준 등 사 형제의 맏이인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 후 서울 박동택에서 성장하였다. 박동택이란 현 종로구에 있는 불교 조계종 본사 340칸 건물과 3,400평의 대지를 말하는 것인데, 조상 때 국왕인 숙종 임금으로부터 왕자궁이던 것을 하사받은 것이다. 명문거족에서 성장한 김교헌 종사는 18세에 나라에서 치르는 국시에 급제하고, 또 고종 22년에는 문과에 급제하고, 한말에는 예조참의(지금의 차관급) 대사성을 지내고, 규장각 부제학으로 승진 국조보감문헌비고 편집위원을 겸하고, 또 국조부감문헌비고위 편집간행위원의 일을 수행하고, 가선대부(종2품)까지 승진하신 분이었다.

단기 4243(1910)년 융희 4년 국력이 기울어짐을 깨닫고 구국의 일념으로 국권회복운동을 위하여 우선 대종교에 입교하고《신단실기(神檀實記)》와《신단민사(神檀民史)》를 저술하여 건국시조인 단군님과 단군선도(檀君仙道)를 연결시켜, 그 연원을 역사적으로 규명하고, 우리민족사의 전통을 체계적으로 세워 종래의 사대주의 사상을 불식하고, 민족주체사관을 정립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의 학문은 후에 제자 박은식, 신채호의 민족사학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으며, 그 후 만주 독립군의 독립투쟁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최남선, 안창호도 김교헌 종사에게 사사받았고, 그가 만주로 망명한 후 그의 서적은 대부분은 최남선 씨가 소유하고 있다가, 오늘날 그 문적은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고 있다.

대종교에 입교한 김교헌 종사는 교내, 교외의 중진사회의 유지들과 협의하고 긴밀한 연락을 취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강점하인 국내에서는 소기의 성과를 올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김교헌 종사는 다음해 1917년 대종교 남도본사를 호석 강우 선생, 석농 유근 선생 등에게 맡기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과 종교 활동을 위하여 동만주로 옮기어, 만주와 연해주 등 러시아 영토(소련과 만주 한국과의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하여 독립운동의 기반으로 삼기로 결정하고, 선조들이 숙종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박동택 3,400평의 대지와 340칸짜리를 팔았다.

그 동안 민족사와 대종교에 대한 교육을 받던 제자 최남선, 신채호, 안창호, 양기탁 등 제자들 중 수제자격인 최남선에게 자신이 작사한 애국가 가사를 주면서 “너는 국내에서 이것을 갖고 각계 각층에 퍼뜨려서 애국심을 일깨우는 독립운동을 하라”고 하였으며(당시 심부름도 하고 글도 배우던 김관호 선생 증언), 또 박달나무로 만든 팔모 판자에다가 애국가 4절을 음각한 것을 아들 정준에게 주면서 너도 이것을 가보(家寶)로 하고, 애국가도 퍼뜨려라(이 가보는 6·25 때 분실)고 한 후, 제자 양기탁 선생과 신채호 선생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 후 가족들은 당시 광주군 은주면 역삼2리(현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99칸짜리 묘막으로 이사해서 가난한 생활에 들어갔다. 김관호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박동택은 넓은 면적이라 후일 애국지사가 될 젊은 청년학자들에게 애국심과 민족정신, 민족주체성, 민족종교, 민족역사를 가르쳤으며, 그 젊은이들이 독립운동자금을 모아서 만주로 송금하고, 2차로 모금운동을 하다가 밀정의 밀고로 탄로가 나서 체포된 자도 많았다.

필자의 부친(우봉이)도 필자가 출생한지 일곱 달만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5년간 징역살이를 하셨는데, 그 어른으로부터 듣건대, 애국가를 지으신 분의 이름은 알려 주지 않고, 애국가 작사자는 경주 김씨요, 독립운동가요, 이름을 밝히면 그 작사자와 그 가족이 몰살당할 것이고, 민족종교(대종교)가 일제로부터 지리멸렬될 것이니, 그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또 민족종교가 존속되어야만 독립이 될 것인 고로, 애국가도 비밀리에 가르치고 전하나, 작사자는 극비로 돌리니 그 이름을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

필자의 부친과 김춘식, 남조병 세 분은 독립운동관계로 체포되어 각각 5년의 징역살이를 하고 나오셨다. 당시 독립운동자금을 위하여 모금활동을 하다가 붙잡히면 무조건 사형이고, 또 바른 대로 말하면 죄가 무거워지고, 또 독립운동 본부가 탄로나기 때문에 취조를 당할 때, 스스로 먹고살기 위하여 강도질을 했다고 거짓 진술을 함으로 목숨을 유지한 사람이 허다하다.

슬프다! 애국가를 작사한 분은 이국만리 만주로, 빼앗긴 나라를 찾으려고 제자인 박은식, 신채호, 양기탁 등을 데리고 떠나간 후 다시는 국내에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그분의 부탁과 지시를 받은 사람들은 애국가 가사들은 각 종교계, 즉 불교, 유교, 천주교, 천도교, 기독교 등 각계 각층에 전파하였으나 작사자의 이름을 밝힐 수 없고, 또한 전파한 사람의 이름도 밝히지 못한 채, 독립운동가요, 경주 김씨요, 후에는 우리 나라 임금이 될 사람, 임금을 시켜야 할 사람 등으로 쉬쉬하면서 입조심 말조심을 하면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한얼님이 보호하사 우리 나라 만세”하며 애국가만이 극비로 해방 때까지 전해 내려왔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에도 자기 할아버지가 애국가를 적어서 전하더라, 또는 자기 아버지가 애국가를 써서 전하더라, 심지어는 외국사람을 동원해서 우리 나라 왕실에 이미 애국가가 있었다는 등등 생각나는 대로 각자 자기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애국가의 작사자로 주장하고 있는데, 그것도 그럴싸한 것이 요즈음 같으면 복사기나 인쇄기로 단시일에 얼마든지 대량으로 찍어 낼 수 있겠지만, 당시는 그런 기구도 없고, 더구나 비밀리에 해야 할 사항으로 극비로 전하고, 극비로 필사해야 되니까, 비밀리에 쓰는 것을 본 자손은 자기 할아버지가 작사했다, 혹은 자기 아버지가 작사했다고 주장하고, 심지어는 외국사람까지 동원하여 왕실에도 애국가가 있었다고 하는 등 별별 추측이 다 나오는데, 만약 최남선 씨가 지었다면, 해방 후 그렇게도 애국가 작사자를 찾으려고 할 때 최남선 씨는 일언반구 한마디도 없었고, 또 안창호 선생이 지었다면 도산 안창호 선생이 저술한「나의 사랑 한반도야」라는 노래가사에 애국가 가사와 비슷한 말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마디도 없다.

김교헌 종사로부터 애국가 가사를 받고,「너는 이것으로 독립운동을 하라」는 지시를 받은 육당 최남선 씨는 처음에는 열성 애국자요, 대종교 교인으로서, 김교헌 종사의 수제자요, 단애종사의 제자이기도 하였지만 말년에는 변절되어 한국청년들을 학도병, 또는 징병으로 가도록 이끌었고, 심지어는 만주국 국립대학 교수직을 위임받아 발령지로 부임하면서, 단애 윤세복 종사에게 인사차 찾으니, 단애 윤세복 종사가 눈물을 흘리다 말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3천만 조선사람이 다 변절되어도 최남선 너만은 변하지 않으리라 믿었더니, 이제는 너마저 변절되어 왜놈이 되었으니, 우리 조선의 앞날은 어찌할꼬 하며 통곡을 하니, 최남선씨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돌아가고 말았다. 이것은 대구에 계신 독립운동가 이인재(李仁載) 선생의 증언이었다.

변절한 최남선 씨는 천주교로 개종하고, 애국가 작사의 내용을 알면서 한마디 증언도 하지 않고 황천길로 갔으니, 애달프기 그지없고, 해방 후 오늘까지 우리들은 왜색을 불식하자고 말만 했지, 우리 정신의 근본인 국조 단군과 민족종교를 반대하고, 외래종교 신앙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우리의 애국가는 작사자 미상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사건이 되고 말았다.

애달프다! 애국가 작사자 무원 김교헌(茂園 金敎獻) 종사는 구국의 웅지를 품고 박동택을 팔아, 제자 신채호, 양기탁 등을 데리고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의 총영수가 되어, 국권회복에 주력하면서 민족종교의 이념과 체제를 확립시켰다.《신단실기(神檀實記)》와《신단민사(神檀民史)》를 비롯한 종사연구(倧史硏究), 교사편찬(敎史編纂) 등 대종교의 이념과 진리를 밝혀 민족종교의 중흥을 이룩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조 단군의 역사를 밝혀 항일 민족독립운동에 있어서 민족적 과제를 제시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무원 김교헌 종사님은 정신적인 면에서, 만주로 망명한 재만(在滿)한국인 사회는 물론이고, 독립운동가들로 하여금 민족의 독립의식을 견지하게 하고, 항일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요, 지도적 역할로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의 대종교 포교활동은 바로 항일 민족 독립운동이요, 포교를 위한 시교당 설치는 바로 항일 독립운동의 근거지였으니, 그의 노력에 의하여 46개소에 시교당이 설치되었으며, 시교당(施敎堂)이 학교요, 학교가 바로 독립운동의 본거지였다.
또 백포 서일(白圃 徐一) 종사와 같이 대종교인으로서 항일무장의 독립운동 단체를 직접 조직케 하고, 독립군 3,700여명을 유지하는데 소요되는 막대한 군비는 박동택을 매도한 돈과 수원 고향의 토지를 매각하여 동생 교빈 씨로 하여금 갖고 오도록 하고, 또 재만 동포 및 대종교인들의 성금으로 충당하였다.

당시 재만 동포들은 밀정을 빼고는 대부분 대종교인이요, 대종교인은 독립군이요, 독립군이 민족종교인이었다. 특히 백포종사에게 무장독립운동의 이념과 지도력을 제공한 분도 무원종사였으니, 결국 성재 이시영 선생과 이회영 선생(이종찬 의원의 조부)이 사비로 운영하는 신흥무관학교 출신 독립군과 장교들의 활동에 힘입어, 세계전사상 유례없는 유명한 청산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1918년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무오독립선언서는 김교헌 종사님의 지시에 따라 조소앙 선생이 원문을 작성하고, 김교헌 종사님의 감수를 거쳐 종사님을 첫머리로 하여 윤세복, 김동삼, 신규식, 박은식, 박찬익, 김좌진, 이시영, 이상룡, 신채호, 이동녕, 조소앙, 이승만, 안창호 등 39명의 서명자 중 미국 등지에서도 독립운동의 강력한 지도자들의 서명이 들어 있다는 것을 보더라도 당시 독립운동의 중심이 대종교요, 대종교의 중심이 무원종사였음을 알 수 있다.

무원종사와 조소앙 선생이 작성한 대한독립선언서의 이념은 항일 무장투쟁인 혈전에 의한 무조건적 완전 자주 독립노선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독립운동과 항일독립전쟁은 8·15 광복 때까지 독립군과 재만한인사회, 특히 독립투쟁의 노선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같은 이념과 사상 아래서 그 동안 대종교인이 독립운동에서 10만여명이 학살되었다는 것도 그 당시의 사정을 말해 주는 것이다.

슬프다! 고국의 부모처자 다 버리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전재산을 송두리째 팔아, 만주구강으로 가서 불고가사(不顧家事) 조국광복에 몸바쳐 독립군 양성과 독립전쟁에 다 소진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뒤쫓는 수많은 일제의 밀정 놈들의 눈을 피해 가면서, 독립군 양성과 대종교 선교활동 및 민족정신 선양교육에, 교리·교사 편찬 등 눈부시게 찬란한 활동을 하셨다.

때로는 풍찬노숙도 가리지 않고 헌신하다가 보니 온몸은 동상이 걸리고, 일제의 강압은 날로 심해져 가고, 재만 10만여명의 대종교인과 독립군들이 희생되는 비보에 접하자, 그 울분과 비통함에 심기를 크게 손상한 나머지 무원종사께서는 개천 4380(1923)년 11월 18일 만주 영안현 남도 총본사 수도실 차가운 방에서,「상교 윤세복 초승 사교위임 경각부인」의 유명을 남기고, 56세를 일기로 조국독립 흥원의 웅지를 흉중에 품은 채로 조천하셨다.

우리 나라 애국가 가사 사절을 기독교 계통 소수 신도들의 주장에 의하면 애국가를 다시 고쳐야 된다는 등 별별 소리를 다하고 있는 것이 간혹 들린다. 그러나 이것은 나라를 모르고, 망본배은하고 외래 문물 숭앙에 몰두한 사대주의자요, 무위도식자들의 생각과 언사이지, 우리 나라 애국가는 글자 그대로 국가요, 애국가이다. 민족의 기상과 한배검의 홍은과 민족의 사기, 앞날의 서광을 나타낸 노래요, 국가이다. 이토록 훌륭한 애국가를 지은이를 최남선이니, 안창호이니, 양기탁이니 하면서 생각나는 대로 아전인수격으로 말하는 것은 민족의 수치라고 봐야 한다. 우리의 국가인 애국가는, 대 애국자요, 대 학자요, 민족종교의 대 지도자요, 독립운동가들을 총지휘하며 불고가사, 몸과 재산을 송두리째 바치신 민족 만세의 지도자, 고(故) 무원 김교헌 종사님이 틀림없다. 또 김교헌 종사님이 아니고서 이런 훌륭한 가사가 나올 수 없다. 이제 애국가의 작사자를 무명씨로 두지 말고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아!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40년간, 한국백성으로서 누가 굴욕과 고난, 곤욕을 겪지 않은 종교인과 백성이 있었겠는가 마는 독립군과 대종교인들과 같이 비참하지는 않았다. 고국에 남아 있던 종사의 가족들은 수원의 토지와 박동택은 팔려서 독립운동자금으로 갔고, 이사온 곳은 이사가 아니고 피난살이였고, 종사의 다음 동생인 교원 씨는 이미 요절하고, 셋째인 교빈 씨도 역삼리에 우거하고, 넷째인 교준 씨도 형님인 무원종사를 따라 만주에 독립운동과 교단업무에 종사하다가 흥업단 산하인 국내 비밀결사 조직책으로 활동하셨고, 역삼리에 계신 교빈 씨도 수원의 토지와 역삼리의 토지를 팔아서 교준을 시켜 만주로 독립운동자금을 보내는 역할을 하고 나니, 가세는 점점 기울어지고 돈은 없었으나, 독립운동가인 손님들은 자주 찾아왔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동지들이 비밀을 잘 지켜 주어서, 일제는 독립운동가의 집안인 줄은 몰랐다.

조국을 찾으려고 불고가사하고, 만주구강에서 독립군 양성으로 독립투쟁인 청산리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게 하시고, 생명을 초개같이 버리신 김교헌 종사님이시여! 우리의 애국가를 작사하시어, 우리들에게 애국심과 민족발전에 기여하도록 하신 김교헌 종사님이시여! 길이 길이 복되소서! 감히 우성조는 종사님의 명복을 빌면서, 종사님께서 애국가를 작사하신 것을 만천하에 늦으나마 밝히면서 필을 놓습니다. 용서하소서!


<참고로 대종교의 원로이신 故 김승학 대형의 유고에 실려 있는 애국가를 소개합니다.(편집자 주)>

※애국가(愛國歌)/김승학(金承學)*
一.白頭山下 三千團部 한데 모여 한배님이 建國하신 우리나라 萬歲
二.높고 둥근 白頭山은 우리 民族 氣象이며 맑고 깊은 天池물은 우리겨레 精神일세.
三.우랄山부터 對馬島까지 水陸 數萬里 우리의 선조들이 사르시던 보금자리라.
四.이 기상과 이 졍신을 모두 合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사랑하세.
후렴
無窮花 華麗한 錦繡江山
배달民族 배달나라 기리 사랑하세.


*독립운동가(1881~1965). 호는 희산. 평북 의주 출신.
1910년 만주로 건너간 후, 대종교 계열의 대한독립단을 주도, 대한민국임시정부 평북독판부 국내특파원·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사장 등을 역임하였고, 참의부의 대표로서 삼부 통합에 힘쓰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한때 정당활동에 관여하였으며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이 애국가는 故 김승학 대형의《망명객행적록(亡命客行蹟錄)》(1958)중에 수록되어 있는 가사이다.
○ 希山 金承學 大兄 敎歷












교질과 교직 날 짜 비 고
敎 秩 開天4379(1922)年 壬戌 09月 03日
開天4403(1946)年 丙戌 02月 23日
開天4403(1946)年 丙戌 04月 24日
開天4406(1949)年 己丑 01月 02日
靈戒 및 參敎 祗受
知敎
尙敎
正敎加大兄號
敎 職
(敎役)
開天4403(1946)年 丙戌 03月 06日
開天4406(1949)年 己丑 01月 02日
開天4406(1949)年 己丑 04月 26日
開天4407(1950)年 庚寅 15月 07日
開天4407(1950)年 庚寅 11月 14日
開天4412(1955)年 乙未 01月 27日
經議院 參議
典理
經議院 參議 再任
元老院 參議 轉任
西一道巡敎員 被任 不就
釜山支司 典務(9年間 視務
맑고밝음
가슴이 너무아프다는 말로는 그표현이 너무약해서 어찌할거나... 그분들 지금의 세상에 계신다면 더더 마음이 아프겠어요

13·02·25 01:46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100  자연 그리고 사랑 1  성미경 06·10·20 2130
99  사랑이나 자연이나, 자연이나 사랑이나...  성미경 06·10·20 1999
98  선조들의 멋 1  홍익인간 06·10·20 1756
97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 이야기 1  운영자1 06·10·20 2391
96  칭찬이 좋은 30가지 이유 1  홍익인간 06·11·01 1708
95  불교의 우주관  성미경 06·11·01 2377
94  세계를 놀라게한 민족의 응집력-그 놀라운 힘 아리랑!! 1  운영자1 06·11·06 2029
93  가치와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는 놀라운 힘-세계를 하나되게 하는 아리랑!! 1  운영자1 06·11·06 2324
92  민족을 하나되게 하는 놀라운 힘-아리랑 그 진정한 의미를 찾아서  운영자1 06·11·06 2375
91  사대사관, 식민사관, 반도사관의 어두운 그림자를 벗고 2  운영자1 06·11·06 2180
90  경이로운 인디언의 격언들 1  성미경 07·01·02 2506
89  나이  성미경 07·06·11 2571
88  치우천황께서 말씀하시기를.... 1  성미경 07·06·29 2554
87  3월 1일과 하나님 1  성미경 07·07·13 2512
 무원종사와 애국가 1  성미경 07·08·29 2662
85  자연수 4에 담겨진 하나님의 메시지  성미경 07·08·29 2533
84  인간에게 주어진 3가지 근본 2  성미경 07·09·06 2906
83  뜻깊고 풍성한 한가위 되시길 바랍니다.  관리자 07·09·21 2530
123456
Copyright 1999-2019 Zeroboard / skin by GGAMB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