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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대와 장승 & 벅수


'장승'이란 무엇인가? [황준구의 '장승문화'이야기]
 알자고    | 2023·02·24 00:11 | 조회 :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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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준구 

    1946년에 태어나, '홍익대학'과 '산업미술대학원'에서 '광고 디자인'을 전공하였고, '선경그룹'과 '현대중공업'에서 근무하였다.

     2000년,'정년퇴직'을 하고, 지금은<'장승''벅수''솟대'>를 공부하고 있다.

    https://blog.naver.com/9339june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가 '장승'長丞이라고 부르고 있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과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은 본래 '장승'이 아닌, '벅수'法首다.  '벅수'와 '장승'長栍은 서로의 역할이 완벽하게 다른 것이었다.  '삼국시대'의 '역참’驛站’과 관련된 ‘장승'은 '수호신'이 아닌, '역참길'(驛路)을 안내하는 기능의 '길라잡이' 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나라(乘輿司)에서 만들어 세우고, 나라(察訪)에서 관리한 단순한 '이정표'였다.  '개화기'때, ‘갑오개혁'으로 '역참제도'는 폐지(1895) 되었고, '장승'은 모두 자연 소멸하였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일제강점기' 때의 '조선총독부' 놈들은, 우리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기능의 '벅수'를 '미신'迷信의 '문화'로 취급하여 업신여겼다.  그들은 우리 땅에서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는 '장승'(이정표)을 다시 찾아내어 '벅수'(수호신)와 강제로 합쳤고, 1912년, "장승이 '표준말'이다" 라고 지정指定하여, 공표公表를 하였다.  "언문철자법통일안"諺文綴字法統一案이라는 것이다.  철저하게 따지자면, 지금의 '장승'이라는 표현은, '일본말'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우리 '백성'들은 지금도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장승'이라고 부르며 살아가고 있다.  '문화재청'(행정부)과 '민속학자'들의 '무능력'이 문제다.   그러나 '장승'이라는 왜곡된 '수수께끼'는 2015년이 되어서야, 그래픽 디자이너 '황 준구'(77)에 의해 ‘궁금증’은 확실하게 풀렸다.



     

    <사진 1> 1415년(太宗, 15년)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이 되는,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죽장리 ‘고방실’ 마을의 ‘장승배기’ 옛 터에서 발견된 '조선시대'의 '역참제도' 때 '길라잡이'(이정표)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고방실’ 마을을 지나는 옛 '유곡도'幽谷道의 돌‘장승’長栍이다.  ‘장승’에서 ‘사람’의 얼굴 모습(人面)이 나타나기 200여 년 전에 만들어 진, 작은 ’장승’(小堠)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장승’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돌’장승’이며, '장승’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리석은 우리의 ‘행정부’와 '박사'학위를 가진 '학자'(학예사)들은 ‘장승’으로 인정하지를 않고, ‘이정표석’이라는 ‘일제강점기’ 때 '쪽발이'들의 표현을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사진, 2019년 황 준구)


    '장승'의 '가슴'에 쓰여있는 글귀(銘文)는 ‘府治西十里 坊名古方松’  이곳은 ‘고방실' 마을이며, ‘선산도호부’는 '서쪽'으로 10리에 위치하여 있다 라는 내용이 적혀있는 작은'장승'이다.  '우리나라'에는 오직 하나 만? 남아있는, 현재의 '위치'가 확실하게 표현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실려있는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장승'이다.   크기는 121cm이고, 너비는 47cm, 두께는 18cm다.  하지만 '문화재청'과 '경북도청' 그리고 '구미시청'의 ‘문화재' 담당자들은, 흔해 빠진 '이정표석'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행길가의 '쓰레기장'에 그냥 내버려 두고(放置) 있다.  배짱 좋은 우리 '공무원'들이 늘상 하고 있는 고유한 업무다.   그들은 '장승'이라는 나의 주장을 '재미'있는 '추리'推理다 라고 하며 비아냥 거렸다. (‘장승’의 뿌리, 고방실, 돌’장승’ 검색, 참고).


    <사진 2> 1764년 '갑신년'甲申年의 큰 '물난리'(洪水) 때, '덕진면 묘동방’(합천군 청덕면 모리)의 '작은장승'(小堠)은, '강'과 '바다'를 거쳐 '일본'으로 떠내려 간 이후에, '시마네현'의 바닷가에서 발견 되었다.  '일본'의 옛 책, '호고일록'好古日錄(1796)에는 '계패'界牌로 표현된 '장승'의 길이는 190cm이고 넓이는 약 19cm이며 '소나무'로 만들어 졌다.  '얼굴'이 표현된 길이는 41cm이고, 일곱 '글자'로 된 큰'글씨'의 길이는 63cm이며, 아래의 작은 글씨 여덟 '글자'의 길이는 약 63cm 정도 된다.라고 기록하였다.  지금 '일본'에는 여러점(基)의 우리 옛'장승'을 보존하여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이 되지만, 공개는 하지 않고 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들은 '일제강점기'때, 우리의 '벅수 문화'를 '미신'迷信의 '문화'로 업신여기고, '벅수'를 '장승'으로 왜곡하고 변질시켜서 강제로 교육을 시킨 '범죄자'들이다.


    <사진 3, 4>  ‘역참제도’ 때인 1883년, '독일'의 외교관 "막스 폰 브란트" Max von Brant(1835-1920)가, '인천'의 만수동 '장승배기'에서 남몰래 훔쳐서 ‘독일’로 가져 간 인천 만수동 ‘별리고개’(星峴)의 큰’장승'(大堠)으로 "베를린 민족학 박물관"에 기증된 것이다.  '장승'의 가슴에 쓰인 내용은 "自仁川官門 十里地名星峴 西距濟物浦二十里 東北距京城六十里". 이곳은 '인천'의 '관문'에서 10리 못 미쳐에 위치한 '별리고개'(성현)이며, 서쪽으로 20리에는 '제물포'가 있고, 동북쪽으로 60리는 '서울'이다 라는 내용이 꼼꼼하게 적혀 있다.  '크기'는 229cm이며, 이 세상에 오직 1개(基)만 남아 있어, 공개가 되고 있는 완벽한 나무'장승'으로 '보물급'의 큰’장승’이다.


    '장승'長栍이라는 것은, '신라' 21대 '소지왕'炤知王이 설치(487) 한, '역참'驛站의 한 부문으로  ‘나라’의 '역참길'(驛路)을 합리적으로 관리 하고 다스리기 위해 '관로’나 '국도' 만을 전문으로 안내를 하는 기능의 '돈대'墩臺('흙'과 '돌'로 쌓은 '팻말')를 만들어 세웠었고, '조선시대'에는 좀 더 발전하여 '돈대'를 ‘댱승' 또는 ‘후’堠 (댱승,후/ 돈대,후)라고 표현 하였다.  '장승'은 '역참길'의 5리里 또는 10리마다 촘촘하게 '나라'(乘輿司)에서 세우고, '나라'(察訪)에서 관리 하였으며,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역할의 '벅수’法首('天下大將軍' ‘地下大(女)將軍')와는 서로의 역할(기능)이 완벽하게 다른 것이다. ('장승'과 '벅수'가 서로 다른 이유. 검색 참조).


    '장승'의 가슴에는,  ‘현재’의 '위치'와, 이웃 마을의 '이름'과 ‘거리'距離, 그리고 '방향'을 꼼꼼하게 기록하여 세웠고, '중국'에서 '길'을 따라 들어오는 '유행병'과 잡스러운 '귀신'들을 막아내기 위해, '치우'蚩尤 또는 '중국'의 전설 속에 표현된, '황제'(王)나 '장수'將帥들의 무서운 표정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조각’을 하여, '역참길'의 가장자리에  세워 놓고, 우리 '조상'들은, 이것을 '후'堠 또는 '장승'長栍이라 하였다.  주로, '후'堠라 쓰고, '댱승'(쟝승)으로 읽었다.  '장승'이 세워진 '곳'을 '장승'이 박혀있는 땅이라 하여 '장승배기'(장승백이)라고 하였다.


    '조선'의 법전法典 ‘경국대전’經國大典 1485년 (성종 16년, 보물, 제1521호)卷之六 "工典"의 '橋路'에는 ‘外方道路每十里立小堠三十里立大堠置驛 堠刻里 數地名’으로 ‘역참길’(驛路)의 10리에는 ‘소후’小堠(작은 ‘장승’)를 세우고, 30리에는 ‘대후’大堠(큰 ‘장승’)를 세워서, ‘역참’驛站('말'馬을 바꾸어 탈 수있는 ‘원’院 또는 '역'驛과 ‘숙박시설’(酒幕)이 있는 '곳'(지역)임을 알린다.라고 기록하였다.  


    1670년(현종,11년), 반계 ‘유형원’柳馨遠(1622-1673)이 쓴 ‘반계수록’磻溪隨錄에도 ‘후’堠(장승)에는 이수里數와 지명地名을 확실하게 새기며, ‘이정’을 표시하는 원칙은 ”凡官路 每十里立小堠三十里立大堠堠刻某雰距幾里地名某南西北同”으로 ‘역참길’의 10리에는 ‘작은장승’을 세우고, 30리에는 ‘큰 장승’을 세우며, 어느 부,목,군,현,으로 부터, 동,서,남,북의 어떤 방향으로 몇 리에 위치하고 있는 곳이며, 현재의 ‘장소’(위치)를 정확하게 새긴다. 라고 기록하였다.


    '정조대왕' 13년(1789) '이의봉'李義鳳이 쓴 '고금석림'古今釋林(辭書)의 내용에는, '댱승'은 우리의 것이며 '역참길'(驛路)의 10리里나 5리에 '나무'로 만든 '사람'의 모습을 세우고 '몸'의 가운데에는 '지명'地名과 '리수'里數를 썼다.  이것을 '댱승'이라 한다.  '한어'漢語(中國語)로는 '土地老兒'(토디나우), (’길’의 주인)라고 한다 라고 기록하였다.  '土地老兒'를 '쟝승'이라고 표현을 한 우리의 '훈민정음'으로 기록된 '몽어유해’蒙語類解(1768)와 '역어유해’譯語類解(1775)에는 '댱승'과 '쟝승'이 함께 쓰여져 있어 '장승'이 '우리말'(韓語)이라는 것을 뜻하고 있다.


    '프랑스'에 있는 '동양어학교'에는 우리나라에서 훔쳐 간 '훈민정음'으로 쓰여진 "뎡니의궤"整理儀軌가 있다.  ‘정조대왕'이 1797년 "정사년원행길"에 우승지右承旨 '이익운'李益運에게 '안녕리'安寧里에 "현륭원"으로 가는 '길'을 알리는 '장승'長栍을 세우라 라는 어명御命을 내린 기록이 담겨져 있다.  '임금’의 명령(御命)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장승'이다.  '조선시대'의 '수원땅'은 온통 '장승배기'였다.


    ‘이규경’李圭景(1788-1863)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1850?) 라는 ‘백과사전’에는 ‘長栍’의 ‘栍'字는 ‘音’(소리)은 ‘生’이고, 잘못 된 ‘음’이 ‘承’이다.  ‘길라잡이’인 ‘木人’은 ‘長栍’이고, 사실과는 다르게 표현된 ‘사투리’는 ‘長承(丞)이다.라고 기록하였다.  ‘栍’字는 ‘중국’이 만든 글자(漢文)가 아니고, ‘조선’이 만든 ‘韓’字로 ‘쟝승·생’자로 읽는다.


    '일제강점기' 때의 조선총독부 놈들은 우리 '마을'을 지켜주는 ’天下大將軍’과 ‘地下大(女)將軍’이라는, '수호신’ 기능의 '벅수'法首를 '망령'된 '신앙'(迷信)으로 취급하여 쓸모(가치)를 깎아 내렸고,  '갑오개혁' 때 '역참제도'가 폐지(1895)되어, 우리 땅에서 이미 완벽하게 사라지고 없는 '길라잡이' 기능의 '장승'을 다시 찾아내어, '벅수'에 강제로 포함을 시켰다.  그리고 '장승'으로 쓰고 부르도록 '표준말'로 지정하여, 아예 '쐐기'를 박아 버렸다.  '조선총독부'의 '학무국' 놈들은 철저하게 교육을 시켰으며, 지금도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가 '벅수'를 '장승'이라고 부른다.  '장승'이란 표현은, '쪽발이'들이 재창조하여 만든 '일본말'이다. (1933년, '조선총독부'의 '諺文綴字法'통일안 확정, 공표 참고)


    지금, '장승'과 관련되어 널리 알려진 뜬 소문들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학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변질'된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장승'의 실제모습을  한 번도 본적이 없고 만져 보지도 못한 '장승'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장승'전문가들 끼리 모여, 장승제, 장승축제, 장승문화, 장승명인, 장승예술, 장승쟁이, 불교장승보존회, 한국장승진흥회, 장승학교 등으로 '이름'을 짓고, 모두들 '장승'의 명인(大家), 혹은 '장승'의 '전문가'라고 일컫는  '장승명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그 누가 봐도  웃기는 옹졸한 짓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장승'이란 것은 지금으로 부터 140여 년 전의 '개화기'때, 우리 땅에서 '임무'를 끝마치고 소멸된  '역참제도' 때의 '길라잡이’(이정표) 였을 뿐이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의 ‘조선총독부’ 놈들은  ‘고려시대’ 때, '절집'(寺剎)에서 '일반백성'(庶民)들을 상대로 하여 운영을 하였던 '이자利子돈놀이'이며 '사채업'(高利貸金)의 한 종류로  ‘장생고’長生庫(長生錢,長生布)와  ‘절집’의 경계를 표시 하였던 말뚝(푯말) 역할의 ‘장생표주’長生標柱(國長生,皇長生)가 ‘장승’의 뿌리(由來)다 라는 뚱딴지 같은 억지를 부렸다. 


    우리 '민속학자' 1세대들은  이에 한마디 '반론'(변명)도 하지를 못하였고, 그들의 생떼(억지)를 그대로 받아 들여  지금도 그들이 쓴 '책'과 '논문' 그리고  모든 ‘백과사전’과 '교과서'에는 ‘장생고’(私債業)와 '장생표주'(‘말뚝’)를 ‘장승’의 ‘유래’(根本) 라고 기록을 하고,  '보물'寶物로 지정을 하여 관리하고 있다.  참으로 한심하고 기절할 노릇이다.  근본 원인은 '일본'에서 공부를 한 우리 '민속학자,1세대'들이 소갈머리 없이  '일본학자'들의 '책'과 '논문'을 반박하거나 '논설'없이 그대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지금의 우리는 그 누구도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장승'이라는 실제의 모습(實體)을 본 '사람'이 없다.  지금 우리 땅에는 '장승'의 '실제모습'(實物)은 물론, '장승'에 관한 옛 '그림'(기록)이 한 점도  남겨진 것이 없고, 오직 '한시'漢詩 몇 구절과, '판소리’ 타령속의 ‘노랫말’ 몇 가락 만이 남아 있어 전傅해 지고 있을 뿐이다.   우리 ‘조상’들은 '장승'이나 '벅수'를 새로 만들어 세운 이후에는, 그 자리에서 완벽하게 썩고, 넘어져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을 때 까지, 그냥 내버려 두는 뿌리 깊은 전통 때문에 지금까지 온전하게 남겨진 '장승'이라는 '실제'의 모습을 우리 '땅'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선산땅' 고방실 '장승배기'의 돌'장승’을  ‘문화재청’에서는 ‘장승’이 아닌, ‘이정표석’?으로 기록하고 있다.  너무나 한심寒心하여 기氣가 막힌다.  '이정표석'이 왜? '장승배기' 옛 터에서 발견이 되었을까?


    옛 '장승'들의 '사진자료'는 '벅수'와 ‘장승’을 공부하고 있는, '황 준구'(77, '그래픽 디자이너')가 2015년 외국의 '유물자료'를 뒤져  그들의 '박물관도록’에 기록된 '개화기'때 우리나라에서 ‘도둑질’하여 남몰래 훔쳐서 가져간 '장승'의 '사진'들을 찾아내어 옮겨온 것 이외에는 별다른 '자료'가 없다.  그리고 선산읍 '고방실'의 돌'장승'도 우리 '문화재청'과 '학자'(학예사) 그리고 모든 '백과사전'에는 '이정표석'里程標石 이라고 '일제강점기' 때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만, 옛 돌'장승'의 실제모습(實體)('사람'의 '얼굴'모습(人面)이 나타나기 ‘이전’以前)이라는 것을, "경국대전"의 내용과 서로 비교하여  '장승'으로 인정認定을 하여 알렸다.  하지만 우리 '문화재청'과 '민속학자'들은 '입'을 욱다물고 만 있을 뿐  아무런 반응이 없다.  옛 '조선총독부' 놈들을 연상시킨다.  ('장승'의 뿌리, 고방실 '장승배기' 돌장승. 검색 참고).


    '일본'을 제외 한 '외국'의 '박물관'들이 가지고 있는 '장승'은  모두 4개(基)로  '유럽'의 유명 '박물관'에서 만, 전시되고 있는 큰’장승' 1개와 작은’장승' 3개 만 남아있어 보존保存이 되고 있다.   큰'장승' 1개는 독일의 '베를린 민족학 박물관'에 있고, 작은'장승'들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민속 박물관'과 네덜란드 '라이덴 국립 민속박물관'  그리고 ‘독일’의 '라이프치히 그라시 민속박물관'에 각각 1개씩 총 4개(基)의 '장승'이 존재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도둑질’의 천재로 알려진 이웃 나라 '일본'은 침묵하고 있다.  (유럽 '박물관' 소유의,- '조선' 장승, 검색 참고).


    '개화기'(1876- 1910) 때 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天下大將軍'과 '地下大(女)將軍'이라는 이름(銘文)을 가진 '수호신' 역할의 '벅수'法首들은, 세계 여러나라의 '박물관'에 두루두루 나누어져  '전시'되고 있다.   하지만  '벅수’를 ‘장승'(장성)으로 표현을 하고있는, 실제의 '전시품'(法首)들은 모두가 볼썽 사나운 '품바’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입' 찢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는, '이빨' 빠진 흉물들 뿐이다.  그들은  우리 '조상'의 모습이다 라고 억지를 부리며 우긴다.  창피하다.


    지금 '장승?전문가'로 행세行世를 하고 있는 대부분의 '민속공예가?'들과 우리 '행정부'와 '국립민속박물관' 심지어 '초등학교'의 '교과서'와 모든 '백과사전' 그리고 '언론'에서 마저도 '天下大將軍'과 '地下女將軍'이라는 '벅수'를 '장승'으로 표현하고 '장승제사'까지 지내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립민속박물관'과 각 ’대학’의 '민속학자'(교수)와 '미술평론가'들은 '벅수'를 '장승'으로 알고 있는 지극히 잘못된 상식을 가지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 뿐이다.  그들이 쓴 '책'과 '논문'에는 '벅수'가 몽땅 '장승'으로 만 표현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때의 찌꺼기를 부끄러움 없이, 아직도 사용을 하고 있는 '친일파'들 이며 '소갈머리' 없는 불쌍한 '학자'들 이다.


    그들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공부를 한 이른바 1세대 '민속학자'들의 ‘제자’들 이며, 계보가 또렷하다.  그들이 주로 쓰는 '말'과 ‘글’들이 그들이 쓴 '책'과 '논문'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민속학'을 가르치고 있는 '대학교'의 석사학위 '논문'들을 살펴보면,  ‘제목’은 '장승'에 관한 연구 '논문’이지만, 실재의 내용에는 '장승'에 관한 ‘글’은 단 한 줄도 없다.  오직 '벅수'를 '장승'으로 표현을 하고, 별여 놓아(列擧)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논문'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때의 쓰레기다.


    '장승'에 관한 고찰, '장승'의 미학 또는 '장승'의 양상이라는 제목으로  우리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기능의 '벅수'(天下大將軍, 地下女將軍)에 관한 '이야기' 만을 늘어놓은  이러한 '논문'을 통과시켜 준 "논문 심사위원"들은 과연 '교수'의 자격이 있는 사람들 인지? 근본적인 ‘지식’을 의심하여 본다.


    우리가 우리 ’민속문화’의 '뿌리' 라고 하는 '수호신' 기능의 '벅수'法首와 '역참제도' 때 '역참길'(驛路)을 전문으로 '안내'를 하였던 '길라잡이' 기능의 옛 '장승'長栍을 서로 나눔하지 못하고 이대로 계속하여 살아 간다면, 우리 '후손'들 에게 정말로 남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는 것이 된다.  '장승'과 '벅수'는 확실하게 서로 나눔이 되어져야 한다.


    ‘국립민속박물관’이 1988년 부터 1997년 까지 10년 동안 전국의 '전통마을'과 '당산'을 조사하여 발행 한 “OO지방 장승, 솟대 신앙”이라는 여덟 권의 ‘책’에는 우리 땅의 모든 ‘벅수’(수호신)는 ‘장승’으로 만 엄격하게 표현 되어있다.  ‘일제강점기’ 때의 표현을 아직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총독부’ 놈들이 ‘벅수’를 왜곡하고 변질시켜서 강제로 ‘장승’이 되었다. 라는 것을 그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다.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기관'을 우리는 ‘국립'國立이라고 한다.  어느 나라의 '국립'인가?. 정말로 한심하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장승'연구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김두하’金斗河(1911-1996)는 그의 책 벅수와 장승(集文堂,1990)에서  ‘벅수’와 ‘장승’을 명쾌하게 서로 '나눔'하지를 못하였고,  ‘장승’이 ‘표준말’이다 라고 아리송하게 얼버무리며  ‘조선총독부’의 편便을 들었다.  그리고  '역참길’(驛路) 만을 안내하는 기능을 가진 '역참제도' 때의 ‘장승’을 ‘노표장승’路標長栍 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벅수’와 ‘장승'을 서로 혼돈混沌하게 하였다.  


    ’장승’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민속학자’가 또 한 명 있었다.  ‘한국민속학’의 ‘개척자’로 평가를 받고있는 ‘임동권’任東權(1926-2012) 박사는 “대장군 신앙의 연구”(1999, 민속원) 라는 그의 책 서문序文(6page)에 정월 대보름날 ‘장승배기’의 ‘대장군’大將軍 주변에 ‘금줄’을 치거나 ‘황토’를 뿌리고, 마을 공동의 ‘동제'洞祭로 엄숙하게 ‘장승제’를 지낸다 라는 표현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였다.  ‘장승배기’에 ‘장승’이 아닌 ‘대장군’(수호신)을 세웠다 라는 표현은 '장승배기'가 아닌, ‘서낭당’(堂山)을 뜻하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읽고 그냥 울었다.


    '장승'이란 것은? '관로'와 ‘국도’(驛路) 만을 전문으로 '안내'를 하던 단순 기능의 '길라잡이'였다.  ‘조선시대’의 ‘법전’法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기록 되어있다.   그리고 우리 '마을'과 '성문' '절집'을 지켜주는 '수호신' 역할의 '天下大將軍'과 '地下大(女)將軍'은 '장승'이 아니고, '벅수'法首라고 부르고 써야 올바른 표현이 된다.  '불교'의 '화엄경'華嚴經에는 '벅수’가 '벅수보살'法首菩薩로 그려져 있다.  1520년에 쓴 ‘태백일사’太白逸史라는 ‘상고시대’의 ‘역사책’에는 '단군할아버지'를 '선인법수'仙人法首로 표현을 하였고, 전라도 부안땅 ‘내소사’의 역사책 ‘來蘇寺誌’에는 1770년, ‘내소사’ 어귀의 ‘서낭당’에 ‘法守’(法首)를 세웠다 라는 기록이 있다.  ‘조계산 선암사’仙巖寺의 석가모니 후불탱화.(1780)를 소개한 글귀(畵記)에도 ‘法首萻薩’과 西方法首萻薩’이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벅수'는 결코 '장승'이 아니다.   


    그리고 '장승'은 우리 '백성'들 모두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를 못한 '벼슬아치’와 ‘양반네'들 만의 '전용물'이었을 뿐이다.  '벅수'도 마찬가지 였다.  ‘조선시대’의 우리 ‘백성’들은 99%가 ‘까막눈이’(文盲者)이었기 때문이다.  (‘까막눈이’들의 땅에,  ‘장승’과 ‘벅수’를 세운 뜻은, 검색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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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등록_한국기원 9219년·배달개천 5919년·단기43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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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지  '장승'과 '벅수'가 서로 다른 이유 [참한역사신문 - 황준구의 '장승문화'이야기]
    공지  도대체 '벅수'가 뭐야? [참한역사신문 - 황준구의 '장승문화'이야기 ]
    공지  '장승'이란 무엇인가? [황준구의 '장승문화'이야기]
    공지  솟대와 장승에 대하여
    55  제천 능강 솟대문화원의 솟대
    제천 능강 솟대문화원의 솟대
     알자고
    19·12·10
    조회 : 749
    54  순천만자연생태공원의 솟대
    순천만자연생태공원의 솟대
     알자고
    18·11·24
    조회 : 723
    53  전남 순천 낙안읍성 민속마을 장승
    전남 순천 낙안읍성 민속마을 장승
     알자고
    18·11·24
    조회 : 526
    52  전남 순천 낙안읍성 민속마을 솟대
    전남 순천 낙안읍성 민속마을 솟대
     알자고
    18·11·24
    조회 : 575
    51  갓바위 가는 길에서 만난 솟대들
    경산시 명마산 글자바위 찾아가면서 대구 갓바위를 지나치며 만난 장승과 솟대들이다. 경상북도 경산시 명마산 글자...
     알자고
    17·03·25
    조회 : 1272
    50  갓바위 장승
    경산시 명마산 글자바위 찾아가면서 대구 갓바위를 지나치며 만난 장승들이다. 경상북도 경산시 명마산 글자바위 답사...
     알자고
    17·03·25
    조회 : 689
    49  갓바위 장승
    경산시 명마산 글자바위 찾아가면서 대구 갓바위를 지나치며 만난 장승들이다. 경상북도 경산시 명마산 글자바위 답...
     알자고
    17·03·25
    조회 : 689
    48  용담서해안로 방사탑
    제주를 여행하보니 이러한 방사탑이 해안가에 많이 설치되어 있더군요. 육지에서는 솟대의 개념을 제주에서는 방사탑이 그 ...
     관리자
    13·07·29
    조회 : 1184
    47  제주 동글동글 돌솟대
    제주에서 하룻밤 묵었던 모텔에서 특별한 공간을 조성해 놓았더군요. 동글동글한 돌들로 특이한 솟대를 쌓았기에 한 컷 했...
     관리자
    13·07·29
    조회 : 1336
    46  제주 솟대 박물관의 솟대들
    제주 솟대 박물관의 외부에 설치된 솟대들입니다.박물관장님과 차를 마시면서 우리 역사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참 좋은 시...
     관리자
    11·12·24
    조회 : 2145
    45  제주 솟대 박물관의 솟대들
    제주 솟대 박물관의 솟대들입니다.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사진으로 모두 담지를 못했네요...^^자세한 사항은 답사...
     관리자
    11·12·24
    조회 : 2025
    44  제주 솟대 박물관
    제주도 솟대 박물관 입니다.작품성 있는 솟대들을 많이 접할 수 있습니다.제주 여행하실 때 꼭 들러 보세요....^^자세한 사...
     관리자
    11·12·24
    조회 : 1529
    43  태백산 성황당 장승
    태백산 성황당 장승
     운영자1
    10·12·10
    조회 : 2200
    42  성불암 솟대
    성불암 입구에 세워진 솟대입니다. 다른곳과는 달리 솟대에 고래가 있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솟대에도 음,...
     성미경
    10·04·04
    조회 : 2265
    41  하동 구제봉 장승
    개인적으로 청암장의 웃음이 마음에 든다.....ㅎㅎㅎ
     운영자1
    10·01·28
    조회 : 2030
    40  하동 구제봉 장승
    지리산 삼성궁으로 가던 길에 만나게 된 장승 군락이다. 장승들의 표정이 모두 각각인데, 모두 재미있다. 천하대장...
     운영자1
    10·01·28
    조회 : 2029
    39  마이산 석탑군
    전북 진안군 마이산 석탑군
     운영자1
    09·09·24
    조회 : 1819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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