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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근님의 "홍익인간 7만년 역사"


조선(朝鮮) 제45대 여루(余婁) 천왕(天王)의 역사
 알자고    | 2017·05·21 21:02 | 조회 : 119

조선(朝鮮) 제45대 여루(余婁) 천왕(天王)의 역사


[제(齊)나라 사절 입조]  


서기전396년 을유년(乙酉年)에 제나라의 사절(使節)이 입조(入朝)하였다.
제나라는 서기전665년경에 중국측 기록에서 영지국(永支國)이라 기록되는 단군조선의 번한(番韓) 요중(遼中) 12성(城)의 하나이던 영지성(永支城)과 영지성의 남동쪽에 위치한 고죽국(孤竹國)을 침범하고, 서기전653년에 단군조선이 소위 기자(箕子)의 나라인 기후국(箕侯國) 즉 수유국(須臾國)의 군사와 함께 연(燕)나라를 치자 연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서기전651년에 제(齊)나라 환공이 영지(永支)와 고죽(孤竹)을 치고 북진하여 지금의 내몽골 땅이 되는 구려국(句麗國) 즉 산융(山戎)을 침범하였다가 산융의 벌목작전과 모랫바람 때문에 회군하였다.
제나라는 서기전679년부터 서기전633년경까지 주나라 춘추시대의 패자였는데, 주나라 천자(天子)를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린 격이 된다.
제(齊)나라가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고죽국과 산융이라 기록되는 구려국 땅을 침범한 것은 연(燕)나라의 요청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서, 연나라는 전국시대인 서기전284년 소왕 때 한(韓), 위(魏), 조(趙), 진(秦)의 연합군과 함께 제(齊)나라를 대파할 때까지는 제나라  때문에 존속한 것이 되고 한편으로는 제나라의 속국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된다.  


[장령(長嶺)의 낭산(狼山)에 성을 쌓다]  

서기전396년 을유년(乙酉年)에 장령(長嶺)의 낭산(狼山)에 성을 쌓았다.  
장령(長嶺)이 서기전396년 당시에는 단군조선의 영역 내에 있었다는 것이 되는데, 요동(遼東) 땅이 되는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지역에 있는 긴 고개로서 당시 요수(遼水)가 되는 지금의 영정하(永定河)의 동쪽에 있다. 장령(長嶺)은 장령(長岺)과 같은 말이다.  
장령의 낭산에 성을 쌓은 것은 아마도 연나라를 대비한 것이 될 것이다. 실제로 6년째인 서기전380년에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의 서쪽 변두리 땅을 침범하였다.


[대동율령(大同律令) 공포]

서기전393년 무자년(戊子年)에 법령을 개정하여 대동율령(大同律令)이라 하여 천하에 공포하였다.
신왕종전(神王倧佺)의 시대 즉 소위 제정일치(祭政一致) 시대에는 계율(戒律)이나 율법(律法)이 곧 나라를 다스르는 법이 되는데, 단군조선 시대에는 실체적인 법규범을 만들어 공포하여 실시하였는 바, 서기전1282년에 공포된 8조금법(八條禁法)이 있으며, 이때 이르러 대동율령이 공포된 것이 된다.  
이 대동율령(大同律令)이 8조금법에서 나아가 60여개조로 확장하여 구체적으로 더 자세하게 만든 법이 될 것이다.  


[빈민 구제]  

서기전391년 경인년(庚寅年)에 큰 흉년이 들어 창고의 쌀을 다 풀어 빈민을 구제하였다.
단군조선은 백성의 삶과 행복을 최우선으로 하던 진정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시대이며, 군사력(軍事力)은 다른 나라를 정벌(征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침범하는 적(敵)을 막고 국내적으로는 난(亂)을 진압하여 백성을 평안하게 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필요악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
단군조선은 비록 대국(大國)이나 함부로 다른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라고 공자(孔子)의 7세손이 되는 위(魏)나라 출신의 공빈(孔斌)이 서기전268년경 자신이 쓴 홍사(鴻史)의 서문(序文)에서 밝히고 있기도 하다.


[감천이 솟다]  

서기전387년 갑오년(甲午年)에 감천(甘泉)이 대묘(大廟) 앞에서 솟아 나왔다.
대묘(大廟)는 선대 천왕(天王)들의 신주(神主)를 모신 종묘(宗廟)가 될 것이다.


[양생론을 바치다]

서기전385년 병신년(丙申年)에 곽태원(郭太原)이 양생론(養生論)을 저술하여 천왕께 바쳤다.
아마도 양생론은 호흡(呼吸)과 음식물(飮食物)과 관련된 양생법(養生法)을 밝힌 이론이 될 것이다.


[연나라의 침범]  

서기전380년 신축년(辛丑年)에 연(燕)나라 사람이 변두리의 군(郡)을 침범하므로 수비 장수 묘장춘(苗長春)이 이를 쳐부수었다.  
이때부터 연나라가 서서히 동침을 시작하게 되고 번조선과 큰 전쟁을 치루면서 서기전339년에는 연나라 공자(公子)인 진개(秦開)가 번조선에 서기전311년경까지 약 28년간 인질(人質)로 잡히기도 하였으며, 서기전323년에 이르러 이왕(易王) 10년이 되는 해에 왕(王)이라 칭하게 된다. 이때 번조선의 읍차(邑借)이던 기후(箕詡)가 당시 비어 있던 번조선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또한 번조선왕이라 칭하면서 보을(普乙) 천왕의 사후윤허(事後允許)를 받았다.  
이때 서쪽 변두리 군(郡)은 번조선의 서쪽 땅으로서 요서(遼西) 지역이 되는데, 시대상으로 볼 때 단군조선에서 본 요서지역은 지금의 난하(灤河) 서쪽 지역이 된다. 한편, 고대중국에서 본 요동과 요서의 구분은 여전히 대요수(大遼水)인 지금의 영정하(永定河)가 된다. 소위 요수(遼水) 즉 대요수(大遼水)는 최소한 한(漢)나라 때까지도 지금의 영정하가 된다.

서기전650년경에 지금의 영정하(永定河 : 원래의 大遼水) 서쪽이 되는 요서지역에 위치하였던 고죽국(孤竹國)이 연나라와 제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하여 그 주류와 많은 백성들이 번조선 땅으로 들어왔던 것이 되고, 이때 연나라는 수도를 안(安)에서 이(易)로 옮긴 것이 되며, 이 이(易)를 계(薊)라고도 불렀던 것이 된다.  

서기전365년에 연나라의 침공으로 단군조선의 요동(遼東)이 되는 요수에서 패수(浿水)에 걸치는 지역을 연나라에 함락당하였다가 삼조선 연합군이 복병작전 등으로 연나라와 제나라의 군사를 오도하(五道河)에서 패퇴시키고 수복하였는데, 이후 줄곧 연나라와 진나라와 한나라와의 전쟁으로 인하여 단군조선의 소위 요수(遼水)가 패수(浿水)라 불리는 지금의 난하(灤河)로 옮겨진 것인데,, 그러나 여전히 고대중국에서는 영정하를 요동과 요서의 구분으로 삼아 영정하 동쪽을 요동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서기전226년에 연나라는 진나라 군사에 패하여 요동(遼東)으로 피하였는데 이곳이 지금의 북경(北京)으로서 계(薊)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북경의 동쪽에 위치한 지금의 계(薊)는 먼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 된다.


[온천(溫泉)이 솟다]  

서기전379년 임인년(壬寅年)에 온천이 성(城) 남쪽 삼사(三舍: 90리) 쯤 되는 곳에서 새로 솟아났다.  
여기의 성(城)은 도성(都城)으로서 장당경(藏唐京)을 둘러싼 성(城)을 가리키며 그 남쪽에서 90리 떨어진 곳에 온천(溫泉)이 솟았다는 것이다.  
삼사(三舍)는, 군대(軍隊)가 하루에 가는 거리로 보는 30리(里)를 사(舍)라고 하는데서, 90리 거리가 된다. 1리(里)는 약 400미터이며 30리는 12킬로미터가 되고 90리인 삼사(三舍)는 36킬로미터가 된다.  


[정(鄭)나라 사람이 누시계(漏時計)를 바치다]

서기전377년 갑진년(甲辰年)에 정(鄭)나라 사람 누경(屢景)이 누시계(漏時計)를 가지고 입조(入朝)하였다.
누시계는 물시계가 된다.  

단군조선 전기인 서기전1846년에 자명종(自鳴鐘), 경중누기(輕重漏器)가 발명되었는 바, 경중누기와 자명종이 결합되면 자명누기(自鳴漏器)가 될 것인데, 여기 누시계처럼 생활에 필요한 기구들이 지속적으로 연구발전되어 발명되었던 것이 된다.  


[대부례(大夫禮)를 대산후(大山侯)에 봉하다]  

서기전376년 을사년(乙巳年)에 대부례(大夫禮)를 대산후(大山侯)에 임명하였다.
대부례는 직책이 대부(大夫)로서 이름이 례(禮)인 인물인지, 아니면 대부례(大夫禮)가 원래 인명인지는 불명이나, 대산후(大山侯)라는 제후(諸侯)에 봉해진 것이다. 대부(大夫)와 제후(諸侯)라는 직위를 비교해 보면 아마도 대부였던 례(禮)라는 인물이 승진하여 제후로 봉해진 것일 가능성도 있다. 이는 단군조선에서는 군후(君侯)가 되는 한(汗)의 아래 직에 대인(大人)을 두었던 반면, 고대중국은 제후(諸侯) 아래에 대부(大夫)를 두었던 것으로 볼 때, 단군조선의 대인을 여기서 대부라고 적은 것이 될 것이다.  
대부례(大夫禮)는 단군조선의 번조선(番朝鮮) 사람으로서 연(燕)나라가 도(道)에 어긋나는 짓을 하자 연나라로 건너가서 도(道)에 관하여 가르침을 주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가뭄]

서기전372년 기유년(己酉年)에 크게 가물어 초목(草木)이 말랐다.


[연나라의 요서(遼西) 침범]  

서기전365년 병진년(丙辰年)에 연(燕)나라 사람 배도(倍道)가 쳐들어와서 요서(遼西)를 함락시키고 운장(雲障)을 육박하였는데, 이에 번조선이 상장(上將) 우문언(于文言)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 하고, 진조선(眞朝鮮)과 막조선(莫朝鮮)도 역시 군대를 보내와 이를 구원하여 오더니, 복병(伏兵)을 숨겨두고 협공(夾攻)하여 연(燕)나라, 제(齊)나라의 군사를 오도하(五道河)에서 쳐부수고는 요서(遼西)의 모든 성(城)을 남김없이 되찾았다.  
여기서 요서(遼西)는 패수(浿水)라 불리는 지금의 난하(灤河) 서쪽 지역을 가리키는데, 이는 단군조선에서 패수를 기준으로 구분지어 패수 서쪽이 되는 요서(遼西)이며, 여전히 고대중국에서는 원래의 대요수(大遼水)였던 지금의 영정하(永定河)를 기준으로 요동과 요서로 구분하였던 것이 된다.
원래 요(遼)라는 말은 멀다(遠)라는 뜻이 되는데, 요중(遼中)이라는 말이 단군조선의 번한 땅 중에서 패수(浿水)의 서쪽으로 요수가 되는 영정하 부근에 걸치는 지역이 되는데, 이리하여 요(遼)라는 말은 단군조선의 수도인 아사달에서 보아 멀다라는 것이 된다. 즉 요(遼)라는 명칭은 고대중국에서 처음 만든 말이 아니라 단군조선에서 먼저 생긴 명칭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단군조선은 서기전365년경부터 요중(遼中)의 땅을 요서라 하여 요서지역을 패수의 서쪽으로 보는 반면, 요(遼)라는 지명을 그대로 차용하였던 고대중국은 서기 220년경의 한나라 때까지 원래의 요수였던 지금의 영정하를 기준으로 요동과 요서를 구분지었던 것이 된다. 이는 본국(本國)이 언어체계나 문자를 바꾸더라도, 그 언어나 문자를 그대로 차용한 나라는 오랫동안 바꾸지 못하고 유지하는 습성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가 된다.  
운장(雲障)은 패수(浿水)가 되는 지금의 난하(灤河) 바로 동쪽에 있던 번조선의 요새(要塞)로서 상하 두곳이 있어 상하운장(上下雲障)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오도하(五道河)는 다섯 갈래의 강이 있는 곳이 되는데, 단군조선에게는 요서지역이 되며 당시 연나라에게는 요동지역이 되는 곳으로서, 영정하(永定河)와 난하(灤河) 사이에 있는 강이 된다.
당시 연나라의 침공이 대대적인 것이어서 진조선(眞朝鮮)과 마조선(馬朝鮮)에서도 군사를 파견하여 막게 하였던 것이며, 복병작전(伏兵作戰) 등을 통하여 연제(燕齊)의 연합군을 격퇴시키고 단군조선의 요서(遼西)지역인 난하 서쪽 지역을 모두 회복한 것이 된다. 이때 단군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은 서기전650년경에 고죽국이 망하면서 요서지역을 내어주게 됨으로써 대요수(大遼水)인 영정하(永定河)로 삼았던 것이 된다.  


[우문언(于文言)의 추격]

서기전364년 정사년(丁巳年)에 연(燕)나라 사람이 싸움에 지고는 연운도(連雲島)에 주둔하며 배를 만들고 장차 쳐들어올 기세였으므로, 우문언이 이를 추격하여 크게 쳐부수고 그 장수를 쏘아 죽였다.  
연운도는 섬으로서 연나라의 동쪽이 되는 발해만이나, 단군조선과 국경이 되는 영정하 하류, 또는 지금의 천진(天津) 부근이 되는 옛 유수(濡水)가 되는 탁수(涿水)의 하류 지역이나, 영정하와 탁수 사이에 위치한 섬이 될 것이다.  


[송나라 사람의 입경]  

서기전362년 기미년(己未年)에 송(宋)나라 학사(學士) 오문언(吳文偃)이 입경(入京)하였다.
이때 송나라 사람인 오문언이 단군조선의 서울인 장당경 안으로 들어와 살았다는 것이 된다.
송(宋)나라는 은나라 마지막 주왕(紂王)의 서형(庶兄)이었던 미자(微子)가 주무왕(周武王)에 의하여 서기전1122년경에 봉해진 나라인데, 서기전286년에 제(齊)나라에 망하였다.
주나라 제후국인 송(宋)나라의 시조인 미자(微子)는 기자(箕子) 서여(胥餘)의 조카가 되는데,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라는 책에 서기전2267년 도산회의(塗山會議)에서 단군조선(檀君朝鮮) 태자부루(太子扶婁)가 우순(虞舜)의 사공(司空) 우(禹)에게 전수하였던 치수법(治水法)이 실려 있는 홍범구주(洪範九疇)가 실려 있다. 송미자세가의 홍범구주는 소위 상서(尙書)에 실려 있는 홍범구주와 서문과 본문의 글자가 다른 것이 있을 뿐 내용은 같다고 보면 된다.


[예기(禮記)]

서기전355년 병인년(丙寅年)에 노(魯)나라 학자 소문술(蘇文述)이 예기(禮記)를 가지고 입조(入朝)하였다.  
노(魯)나라는 주나라 시대에 산동지역의 곡부(曲阜)에 있던 제후국으로서, 서기전1100년경 주나라 초기에 주공(周公)의 아들이자 성왕(成王)의 사촌인 백금(伯禽)이 봉해진 나라이다. 노나라는 서기전249년 초(楚)나라에 망하였다.  
송나라 사람이었던 공자(孔子)의 선대는 송나라에 살다가 망하여 노나라로 들어와 살았던 것이 된다.  
역사상 곡부(曲阜)는 배달나라 제후국이던 염제신농국(炎帝神農國)의 땅에 있었던 것이 되고, 또한 이곳은 서기전2357년에 염제신농국의 후계국인 단웅국(檀熊國)의 비왕(裨王)으로서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섭정하던 곳이기도 하다. 즉, 노나라 지역은 고대중국의 내륙(內陸) 동이(東夷)지역이 되는 것이다.




조홍근 한문화사업총단 대표/천산역사연구원장/천부역(天符易)과학원장/마고족보연구원 대표/세계무궁화축제문화사업회 이사/독도 대마도 동해 만주 수호회복단 이사/천웅도 문무원 이사/광개토황비문연구원 이사/천부어문연구원 이사/산삼문화사업단 이사/한국삼협회 고문/홍익정치연구원 이사/한문화컨텐츠개발원 이사/한문화유물문화재연구원 이사/한문화사업단 이사/행운천지인 역리풍수 대표/(주)한문화개발 고문/플러스코리아타임즈 이사/춘천고조선유적지보전협의회 총괄기획위원장/천부풍수연구원 이사/풍수지리신문 편집국장/현 법무사/저서<홍익인간 7만년 역사> <마고할미로부터 7만년> <생활사주> <생활기문> <천부풍수> <천웅도와 홍익인간><우리말글과 세계언문역사>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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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3년 역사를 정립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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