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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달나무숲 - 서울 | 경기도 | 강화도



서울 석촌동(石村洞) 피라미드

답사 : 단기4340(서기2007)년 7월


이번 답사지는 피라미드 고분군이다.
사전 정보에 따르면 백제 초기 고분군이라고는 하지만
삼국의 장례문화는 단군문화가 원류라고 보아야 한다.
결과적으로 피라미드식 고분은 고인돌과 함께 단군시대의 문화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올 2월에 답사하였던 울산 울주군 웅촌면 은현리 적석총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이미 중국땅 만주에도 수많은 피라미드들이 중국 공안당국에 의해 철저하게 비밀에 붙혀져 있다.
중국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하루 빨리 연구되어지고 공개되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피라미드에 대한 주목할 만한 사실은 북한의 단군릉 역시 피라미드로 조성되어 있다.
북한이 아무 생각없이 단군릉을 피라미드로 조성해 놓지는 않았으리라.
최근 한민족 역사에 커다란 전환점으로 기록될 남북정상회담도
10월3일 단군릉에서 개최되었다는 것이다.
어찌 상징적이고 형식적인 일이라고만 취부해 버릴 수 있는 일인가?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라 흘려버릴 수 있는 일인가?
단군은 우리 민족이 화합할 수 있는 핵심이고 상생의 바탕인 것이다.
그러한 한민족 피라미드의 역사적 배경을 바탕에 깔고 답사를 시작한다.



입구 안내판

모두 입구에 설치된 안내판을 살펴보느라
여념이 없다. 석촌동 지명의 한자도
돌석(石)자와 마을촌(村)자다.
예로부터 돌이 많은 지역이라 이곳에 이러한
귀중한 문화유적이 조성된 것일까?
아마도 근거없는 추측은 아니리라.

잠시 살펴보면....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
(石村洞 百濟初期 積石塚)
지정번호 : 사적 제243호
시대 : 백제 초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 248외
이 돌무지무덤(적석총)은 백제가 서기 475년
웅진(공주)으로 도읍지를 옮기기 전까지
도읍지였던 이곳 한강 유역에 만든 백제 초기
고분군이다. 백제 초기의 매장 풍습과 함께
당시의 문화, 정치, 사회 등에 관한 흔적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이곳 석천동
일대의 낮은 대지 위에는 1916년 당시
돌무지 무덤 23기, 흙무덤 66기 등 모두
89기의 고분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무덤은
개발로 인하여 거의 다 없어지고 1987년
복원할 당시에는 석촌동 적석총 제 3호분과
제 4호분의 2기 ]밖에 남아있지 않았으며,
발굴 결과 내원외방형적석총(內圓外方形積石塚)
흔적이 확인되었다.
이곳 고분군에는 제 3호분과 같이 왕릉처럼
보이는 것이 있는 반면, 소형 움무덤(토광묘)과
같이 일반관리나 서민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섞여 있어, 시기를 달리하며 많은 무덤들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석촌동 고분군 전경

입구를 들어와서 보니 꽤나 넓은 지역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한가로이 한여름의 오후를
즐기는듯 그늘에서 조용하게 독서를 즐기는
이가 있는가 하면 산책을 즐기는 가족도 보인다.
그리고 학생들이 봉사활동을 나왔는지
땀을 흘리며 고분 주변의 잔디를 깍아내고
마무리 작업을 하는 학생들의 진지한 모습이 아름답다.
고분군의 주변 풍경을 둘러보고 있자니
고대 무덤들이 있는 곳이라기 보다는
시민 공원과 같은 평온한 느낌이 든다.







제3호 적석총積石塚

석촌동 제3호 토광묘이다.
안내판에 의하면...
제3호 토광묘는 표토밑 70cm에서 드러났고
평면은 네모서리가 둥그스럼한 장방향이며
장축은 동북에서 서남으로 두었다.
벽면은 수직이고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은
바닥의 북서쪽 모서리에 회청색 목짧은
단지 1개가 놓여 있었다.
묘광의 크기는 208cm, 너비 58cm,
길이 26cm이다.
이 모형 토광묘는 원형토광묘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하여 원형토광묘에 방수시설을
하고 그 바로 위 50cm되는 곳에
원형 그대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 형식의 토광묘는
이 지역에서 3기가 드러났다.






제2호 적석총積石塚

석촌동 제 2호분이다.
안내판에 의하면...
제2호분은 복원 정비하기 이전에는
길이 약25m, 너비 약 20m, 높이 3~4m
크기의 봉우리 모양을 이루고 남아있던
것으로서 봉우리 모양의 분구 기저부 주위에는
민가가 들어서고 돌담이 둘러 있었으며
파괴된 분구 위에는 약 10~30cm 두께로
흙이 덮여 있었다.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제2호분의 분구 축성은
제1단의 바깥둘레에 1m 정도 높이로
포갠 돌을 쌓고 그 내부에 진흙을 다져
채웠으며 제2단은 제1단의 적석 가장자리에서
얼마쯤 안쪽으로 들어가서 포갠 돌을 쌓은
다음에 다시 그 내부에 진흙을 다져 채우고
제3단은 제1,2단과 같은 방법으로 축성하고서
정상 부에서는 둥그렇게 흙을 덮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제1단의 동,서,남쪽 면에는
지탱석이 각각 1개씩 남아 있었다.
내부구조의 확인에 있어 동북 1/4구역과
서북 1/4구역의 일부만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전모는 알 수가 없고
다만 동북1/4구역의 바닥에 자갈과
막돌 조각이 섞여 깔려있었음이 확인 되었으며
깔린 돌 사이에는 붉은 갈색 연질 토기핀이
흩어져 있었다.
복원 정비된 제2호분의 크기는 제1단은
길이 동서 16.40m, 남북 16.50m,
높이 90cm, 단의 너비 2m이며, 제2단은
길이 동서 12.50m, 남북 12.60m,
높이 90cm, 단의 너비 2m이며, 제3단은
길이 동서 8.50m, 남북 8.60m,
높이 70cm, 단의 너비는 정상 부에
흙이 덮여 있어 확실하지 않으며
전체 높이는 3.50m이다.
그리고 제1단 바닥 서북쪽에서는 장축을
동북~서남 방향으로 둔 목관 토광묘 1기가
드러났는데 크기는 길이 2.50m, 북쪽너비
60cm, 중앙너비 40cm, 남쪽너비 65cm,
깊이 10~15cm이다.
이러한 구조 형식의 적석총은 분구, 내부 구조
등 고분 전체를 돌을 쌓아 축조한 고구려 식의
전형적 적석총이 변하여 백제화 된 것으로
보인다.




내원외방형 적석총內圓外方形積石塚

석촌동 내원외방형 적석총이다.
안내판에 의하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오래 전에 분구,
내부 구조, 기단부 등이 파괴되어 흙이 덮이고
그 위에 민가가 들어서 고분의 원형은
밝힐 수 없으나 발굴 조사에 의하여
고분 기단부의 모서리와 서,북쪽의
석축 기단 일부를 찾아냈다.
찾아낸 고분 기단부의 석축 부분을
바탕으로 하여 복원 정비하니 안쪽은
지름 길이 40m의 원형을 이루고
바깥쪽은 변 길이 16m의 방형이 되었다.
이로서 이 적석총의 기단부의 모양은
내원외방형이라고 보게된다.
그리고 안쪽 원형 석축 바닥에서는
적석토광묘 2기와 석곽묘 3기가 드러났는데
이러한 적석 토광묘와 석곽묘 위에
이 적석총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본 고분에는 상부가 평면 원형이고
하부가 평면 방형인 상원하방분(上圓下方墳)
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평면의 모양은
이 적석총의 기단평면 모양과 흡사하다.









제1호 적석총積石塚

석촌동 제 1호분이다.
안내판에 의하면...
일찍이 파괴된 고분 위에 흙이 덮이고
민가가 들어서 상부구조는 알 수 없으나,
발굴 조사에서 드러난 적석 상태에 의하여
2기의 고분이 합쳐져 이루어진
쌍분(雙墳)으로 보인다.
즉 동서 9.9m, 남북 8.9m, 크기의 북분과
동서 9.6m, 남북9.8m 크기의 남분이 합쳐진
것인데 합침에 있어 남,북분 사이가 3.7m
떨어지고 그 사이는 진흙으로 메워졌으며
남, 북분 서쪽 기단 부는 너비 3.2m의
적석단으로 이어졌다.
내부 구조는 남분에서만 확인되었는데
길이 20cm~30cm 크기의 포갠돌로
네 벽을 쌓고 바닥에 10cm 안팎의 포갠
돌 조각, 자갈 등을 깐 석곽 4개가 있었다.
4개의 석곽 중 중앙에 가장 큰 것이 장축을
동서 방향으로 하고 놓였으며 작은 석곽 3개는
북쪽 적석벽에 잇대어 동서 방향으로
1열을 이루고 놓여 있었다.
가장 큰 중앙의 석곽은 길이 약 2.5m
너비 약 2.3m이고 1호 소형석곽은
길이 약 1.8m, 너비 1.2m, 2호 소형석곽은
길이 1.6m, 너비 1.4m, 3호 소형석곽은
길이 1,2m, 너비 1.0m이다.
그리고 평면모양이 이 적석총과 거의 같은
것으로는 고구려의 적석총인 중국 길림성
환인현(桓仁縣) 고력묘자촌(高力墓子村)
제15호분, 평안북도 송암리(松岩里)
제45호분등이 있다.



제5호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과
토광묘土壙墓

분구(墳丘)를 흙으로 쌓은 봉토분(封土墳)
으로서 유존 상태가 양호하고 또 이 일대에서
남아있는 유일한 봉토분이므로 보존하기
위하여 분구 일부만 발굴 조사하고
내부 구조는 확인하지 않았다.
분구는 내부 구조 위에 흙을 다져 쌓아 덮고
그 위에 강돌과 막돌을 섞어 한벌 깐 다음에
다시 그 위에 흙을 엷게 덮은
즙석분구(葺石墳丘)이다.
이와 흡사한 즙석 분구의 봉토분인
가락동(可樂洞) 제1,2호분이 이 고분에서
동북쪽으로 약 10m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2기의 고분은 1969년의
발굴 조사에서 그 내부 구조가 확인되었는데
가락동 제 1호분은 토광(土壙) 안에
목관(木棺)을 안치한 목관토광묘 형식이었고
제 2호분은 토광 안에 목관을 안치한
목관토광묘(木棺土壙墓) 형식의 것과
옹관묘(甕棺墓) 형식의 것이 함께 묻힌
구조 형식의 고분이었다. 가까이에 있고
거의 같은 시기인 백제 전기 2기의 고분으로
미루어 석촌동 제 5호분도 그 내부 구조는
목관토광묘 형식의 것으로 추측케 된다.
분구의 현재 크기는 지름 17m, 높이 3m 인
원형봉토분이다.


이번 석촌동 피라미드군을 답사하면서
삶과 죽음이 별도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느껴진다.
몸을 가진 것과 가지지 않은 것의 차이,
자율적으로 율려를 행할 수 있느냐와 그럴수 없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먼저 살다간 죽은이들의 안식처가 집단으로 존재하고 있는 이 곳에서
가족과 함께 평화롭게 산책을 하는 모습, 자리를 깔아 놓고 책을 읽고 있는 모습,
돌잡이가 아슬아슬 걸음마를 하는 모습, 장애인이 휠체어를 이곳 저곳으로 움직이며
연습하는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삶과 죽음의 공존을 보는 듯하다.
거기에 바람과 햇살, 여유롭게 흘러가는 구름이 함께 어우러져 시간의 존재를 잠시 잊게한다.
누가 그랬던가? 삶과 죽음은 다른 세계가 아니라 그냥 차원이 다를뿐이라고....

참으로 묘한 감정이 든다.
평화로움, 그윽함, 자유로움, 그리고 상생.....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우주 공간의 하나인 지구에서
삶을 사는 우리가 상생하여 흐르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오늘 따라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커다란 철학이 한 없이 크게 느껴진다.



서울 석촌동(石村洞) 피라미드 가는 길

서울시 송파구 3번 국도 --> 백제고분로가 만나는 교차지점 : 지하차도 위에 위치
(석촌호수를 가로질러 백제고분로를 만나기 직전 --> 골목으로 우회전 :찾기 쉬움)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 248외

※ 편의상 차량으로 이동하시는 것을 기준으로 가는 길을 설명합니다.



서울 석촌동(石村洞) 피라미드 참고자료

날카로운 예각(銳角)과 둔각(鈍角)들이 서로 겨루기라도 하듯이 제멋대로 지평선을 넘나들면서 만들어내는 그 몽롱하고 어지러운 모습이 곧 대도시로서 본연(本然)의 자세인 마냥 별 스스럼없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서울은 역시 서울이다. 잠실(蠶室) 지하철역에서 남쪽으로 석촌호수를 지나쳐 오른쪽 '백제고분로 (百濟古墳路)'로 접어들면 어두컴컴한 네모진 굴이 아가리를 커다랗게 벌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보통 '굴다리'라고도 부르는 그 지하차도 위에는 주인공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고대(古代)의 유적(遺蹟)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 곳 한강변(漢江邊)의 잠실(蠶室)은 '누에나루'라는 지명(地名)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과거에는 뽕나무 밭이 있었던 곳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약 3Km 내의 지역은 대부분 나즈막한 언덕으로 형성된 하안대지(河岸臺地)로서, 북쪽에는 한강(漢江)과 남쪽과 서쪽에는 탄천(炭川)이라는 하천(河川)이 둘러싸고 있으며, 서쪽에는 북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몽촌토성(夢村土城)과 함께 성내천(城內川)이 토성의 주변을 돌아서 흘러가는 곳으로, 육상 통로는 남서쪽의 가락동(可樂洞) 이외에는 전혀 없는 선사시대(先史時代)의 요새(要塞)로서는 아주 적합한 지형을 갖추고 있다. 두드러진 산 하나 제대로 없는 이 넓은 대지에 수많은 돌무지가 산재하여 이른바 '돌마리' 또는 '돌마을(石村)'이라고 부르던 지역이다.
주변에 비하여 약간 도톰하게 솟아있는 언덕(해발 20m)에 피라미드형 돌무지가 남북으로 늘어서 있는데, 과거에는 이곳이 주택지(住宅地)로서 돌무지 위에나 옆에 수많은 집들이 들어서 있던 곳이다. 일제시대(日帝時代)의 조사로는 무려 89기가 있었다고 하며, 근대(近代)에 들어서는 다섯 개의 돌무지가 산처럼 쌓여있다고 해서 '오봉산(五峰山)'이라고 부르던 곳이다. 강남(江南) 지역이 급속도로 개발되던 1980년대 초, 이 지역은 발전이라는 명분(名分) 아래 하루가 다르게 파괴가 계속되었는데, 이를 보다못한 뜻있는 인사(人士)들이 보호운동을 벌여 간신히 더 이상의 파괴를 막았으며, 비록 불완전하지만 최대한도로 복원(復元)에 힘을 기울여 현재의 모습이나마 보존하게 되었다. 1974년에 일차로 부분적인 발굴을 하였고, 1983, 1984년에 제한적으로 발굴이 있었으며,(1) 1985년 그 대부분이 토지보상비(土地補償費)로 들어갔을 519억원의 정부 예산(豫算)이 책정(策定)되면서 1991년까지 정비(整備)와 복원(復元)을 마치게 되었다. 현재 볼 수 있는 유적으로는 3기(基)의 계단식 적석총(階段式 積石塚, 돌각담무덤, pyramid)과 내원외방형(內圓外方形) 1기를 포함한 2기의 돌바닥, 1기의 원형(圓形) 봉토분(封土墳) 그리고 여기에서 발견된 십여기의 토광묘(土壙墓) 가운데 2기가 복원(復元)되어 있다.

제3호 積石塚 :
돌무지 모두 강돌이 아닌 깬돌과 막돌을 계단식으로 쌓은 것인데, 그 가운데 가장 커다란 것이 오른쪽 사진에서 보이는 3호분으로 밑바닥의 규모가 동서 51.5m, 남북 50.3m로서 대략 90Cm~1m 정도의 높이로 3단을 올렸다. 단(段)과 단 사이의 윗면 너비는 4.7m이며, 3단의 중앙에는 언덕 위에 돌이 대충 쌓여있는 모습으로 과거대로 남겨 놓아서 전체의 높이는 대략 4.5m 이다. 좌향(坐向)은 정남북(正南北)이라 하여도 상관없을 정도로 동서면(東西面)이 정북에서 10도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동쪽 제1단에서 약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 1.4m x 40Cm x 40Cm 정도의 판석(板石)들이 제1단과 평행하여 가로, 세로로 모두 6개 놓여져 있으며, 북서쪽 모서리에도 2개의 버팀돌 판석(板石)이 놓여져 있다.
복원(復元) 전(前)에는 대략 동서 55.5m, 남북 43.7m에 높이 4.5m이었으며, 제1단의 동쪽 벽에 길죽한 버팀돌이 2개 넘어진 채 발견되었다. 제3단까지는 추적(追跡)하여 확인할 수 있었으며, 오른쪽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제3단의 서남쪽에서 3단에 바닥을 두고있는 석곽(石槨)이 발견되었다. 크기는 2m x 1.5m에 깊이 80Cm로서 부곽(副槨)으로 판단되며 주곽(主槨)은 파괴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는 3단 가장자리에서 약 5m 안쪽까지 평평하게 돌을 깔아 놓아서 이 부곽(副槨)을 확인할 수 없으며, 버팀돌도 제1단에서 떨어져 있다.
이곳 석촌동 유적지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를 보여주고있는 제3호 적석총은 지금의 상태를 말하자면 사실 피라미드라고 부르기 곤란하다. 그저 넓은 면적을 돌로 반듯하게 쌓아올린 3층 석단(石壇)에 불과하며, 중앙에 어지럽게 쌓여진 돌 무더기들은 그저 잔돌들이 무더기로 남아있는 돌산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돌무더기가 어쩌면 원래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복원(復元) 전의 상황을 그저 한두장의 흑백 사진으로 참고할 수밖에 없는 필자로서는 그나마 남아있는 돌무더기들이 무척 고마울 따름이고, 이를 통하여 좀더 확실한 자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1단의 한쪽 길이가 대략 50여m이며, 단의 높이가 다른 피라미드와 마찬가지이고, 그 위에 다른 피라미드에서 볼 수 있는 단의 너비에 비하여 두배 이상의 엄청넓은 4.7m의 간격을 두고 제2단, 제3단이 연속으로 세워져 있다. 전체 높이가 다른 소형의 것과 커다란 차이없는 4.3m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넓은 기단의 너비를 보여주고 있어 마치 거대한 건물의 기단(基壇)을 연상케 한다. 즉 이러한 단의 높이와 너비는 왠만한 건물(建物) 유적지(遺蹟址)에서 조차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으로서 단(壇)의 이곳저곳에 주춧돌만 있으면 영락없이 건물터가 될 수 있는 상황이다. 비록 제1단의 가장자리가 큼직한 돌로 둘러져있기는 해도 막상 기둥이 세워질 수 있는 3단에는 양손으로 간단하게 들어 나를수 있는 대략 30여Cm 안팎의 크기의 막돌이거나 깬돌이 대부분으로, 돌들만이 대충 엉성하게 쌓여져있으며 게다가 이 3단에서 석곽(石槨)이 발견되어서 건물터라고 하기에는 여러 면에서 매우 적합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제3호분은 내부를 발굴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 내부 구조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제2호분의 축조방법과 같은 방법이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꼭대기의 돌무더기 사이사이에서 보이는 흙은 누군가 일부러 돌무더기 위에 흙을 갖다 놓지 않는 한 하등 생길 이유가 없으므로, 여기에서 보이는 적석총의 조성방법이 2호, 4호분의 복원 상태처럼 계단식(階段式) 적석(積石)이 기본이고 그 중앙에 둥그런 형태의 중심체(中心體) 즉 반구형(半球形) 봉토분(封土墳)을 얹은 구조를 추구하였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전체를 모두 계단 형식으로 만들었을 가능성도 배제(排除)못할 만큼 철저하게 파괴되어 쑥밭이 된 지금의 상태에서는 전혀 알 수 없다.
여기에 사용된 돌들은 지금이라도 약간의 타격을 가하면 금방 부스러질 정도로 매우 약해져 있는 상태이며 이러한 암질(岩質)의 상태는 초기(初期) 상태(狀態)에 비하여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된다. 이 지역은 바위산이 없는 하안지대(河岸地帶)로서 대부분의 돌은 지하(地下)의 풍화(風化)된 암반(巖盤)에서 채취(採取)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며, 기껏해야 언덕이나 강가에서 볼 수 있는 풍화(風化)된 암반(巖盤)에서 간단하게 절취(截取)할 수 있는 정도의 돌들이다. 이런 점에서 꼭대기 지표면에서 보여지는 흙은 내부의 진흙이 드러난 것이 아니라 꼭대기의 돌들이 잘게 부수어져 생긴 것 같으며, 이러한 붕괴(崩壞)가 상당히 오래 전부터 계속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다가 과거에 집과 나무들이 이 곳에 올라서면서부터 파괴(破壞)는 급속도(急速度)로 가속(加速)되었으라 충분히 짐작된다. 즉 지금 볼 수 있는 전체 모양과 높이는 원래와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특히 단(壇)의 높이와 너비는 구조물의 균형(均衡)과 국내외(國內外)에 산재(散在)하고 있는 적석총의 구조로 미루어 본래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지 않을까 생각된다.

제4호 積石塚 :
북쪽에서 두 번째에 위치하고 있으며, 3호분에서 남쪽으로 약 45여m 떨어져 있는 4호분은 제1단의 길이가 17.2m인 정사각형 평면(平面)이며, 1단과 3단은 40~50Cm, 2단은 1m 정도의 높이로 쌓은 것으로 각 단의 윗면 너비는 모두 2m이며, 네변이 9.1m로서 정사각형 평면의 3단에는 원형(圓形 또는 半球形) 봉토분(封土墳)이 올려져 있어 전체 높이는 모두하여 약 2.7m이다. 좌향(坐向)은 3호분과 같으며, 70Cm x 1m x 15Cm 안팎의 길죽한 화강암(花崗岩) 판석(板石) 다섯 개가 동쪽의 제2단 옆면에 기대어 세워져 있으며, 북동쪽에도 하나 세워져 있다.
발굴 당시에 따르면, 처음에는 제1단을 24m의 방형(方形)으로 생각하였으나, 복원(復元) 공사(工事)를 하면서 제1단의 기단(基壇) 판석(板石)이라 생각하였던 것이 그렇지 않다고 판명(判明)되어 처음 조사보고(調査報告)의 제2단을 제1단으로 하게되었다. 그리하여 복원 전에는 제1단의 평면이 17m인 정방형(正方形)으로 전체 높이 2m에 3단으로 보게 되었으며, 발굴하면서 안에는 진흙이 쌓여있고 그 바깥이 돌로 덮여진 독특한 구조물임을 알게되었다. 즉 8.7m x 8.7m x 1m 정도의 진흙 입방체(立方體) 바깥을 각 변(邊) 4m 정도의 두께로 석축(石築)을 2단으로 감싼 것이다. 그런 다음 점토(粘土) 윗면을 바닥으로 하여 제3단을 쌓았는데, 바깥크기는 각 변이 9.2m이며, 안쪽은 4.6m 평방(平方), 높이 1m의 석벽(石壁)으로서, 2.3m 정도의 두께의 벽으로 이루어진 천장(天障, 天井)없는 석실(石室)을 만들었다. 그 남벽(南壁) 중앙에는 너비 1.7m, 길이 2.36m의 널길(연道) 같은 시설을 하고 이 제3단 윗면을 흙으로 얕게 덮은 것으로 그 구조는 고구려(高句麗)의 거주지(居住地)이었던 환인(桓仁) 고력묘자촌(高力墓子村) 제11호분과 아주 비슷하다.
다른 피라미드에 비하여 유별난 점이라면 제2단의 높이가 제1단과 제3단에 비하여 두배 정도로 높은 것으로 전체적으로 불안정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비록 단의 윗면 너비가 2m로 통일되어 있지만 제3단에서부터 3단의 높이, 2단의 너비와 2단의 높이, 1단의 너비와 1단의 높이의 길이가 대략 50Cm, 2m, 1m, 2m, 50Cm로서 2단에 감실(龕室)이나 석곽(石槨)과 같은 특별한 설치가 없는 한, 별 의미없는 비례이며, 만약에 2단 윗면에서부터 계속 균형잡힌 비례로 단을 거듭하여 올라갔다고 한다면 제1단을 기단(基壇)으로 보아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4호분은 전혀 엉뚱하게도 제1단과 제2단의 윗면 너비가 똑같으며, 제2단이 다른 단에 비하여 높기 때문에 지금의 복원(復元) 상태로 미루어 보건데, 쉽사리 붕괴(崩壞)할 것을 축조(築造) 당시에 미리 짐작하여 버팀돌(支撑石)을 받쳐 놓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발굴조사(發掘調査)에 따르면 2단까지는 특별한 시설이 없이 진흙과 석벽으로만 구성되어 있어 더더구나 이같은 불균형의 이유를 알 수 없다. 만약 내부(內部)의 진흙 덩어리가 붕괴될 것에 대비하여 버팀돌을 세웠다면 우선 제1단부터 높이고 제1단의 벽에 버팀돌을 세우는 것이 누가 생각하더라도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쉽게 무너질 수 있는 단을 쌓았으며, 위 아래 단의 높이에 비하여 두배인 1m 높이가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복원 전의 상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끔 충분히 고려(考慮)하여 이같이 복원하였으리라 짐작은 되지만 여기에 대한 의문(疑問)은 계속 남는 것이다.

제2호 積石塚 :
고분군(古墳群)에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으며, 4호분에서 동남쪽으로 약 40m 거리에 자리잡고 있는 2호분(墳)은 제1단의 동서 길이가 16.4m, 남북 길이가 16.5m이며, 높이는 제1단이 90Cm, 2단이 90Cm, 3단이 70Cm로서 각 단의 윗면 너비는 2m이다. 3단의 동서 길이는 8.5m, 남북 길이는 8.6m이며 3단 위에 다시 원형 봉토분이 올려져 있어 전체 높이는 약 3.5m이다. 현지 안내판에는 동, 서, 남쪽의 1단에 각각 하나씩의 버팀돌이 남아있었다고 하나 현재 동쪽 1단에는 2개의 돌이 그리고 서쪽 1단에는 1개의 돌이 비스듬히 기대져 있으며, 특이하게도 적석총의 좌향(坐向)이 30도(또는 남서 210도)로서 다른 돌무지와는 차이가 있다.
제2호분은 복원(復元) 정비(整備)하기 이전에는 길이 약 25m, 너비 약 20m, 높이 3~4m 크기의 돌무지가 봉우리 모양으로 남아있던 것으로서 꼭대기에는 집이 들어서서 돌담이 돌려져 있었으며 약 10~30Cm 두께로 흙이 덮여 있었다. 발굴 조사는 동북 1/4 구역과 서북 1/4 구역의 일부만 하였는데, 이에 의하면 동북 1/4 구역의 바닥에는 자갈과 막돌 조각이 섞여서 깔려있었으며, 깔린 돌 사이에는 붉은 갈색의 질이 무른 토기(土器)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제1단의 바닥 서북쪽에는 동북, 서남 방향을 장축(長軸)으로 하여 길이 2.5m에 너비 40Cm~65Cm, 깊이 10Cm~15Cm의 목관토광묘(木棺土壙墓) 1기가 드러났다. 돌을 쌓은 방법은 제1단의 바깥둘레에 1m 정도 높이로 돌을 쌓은 다음에 다시 그 내부에 진흙을 다져 채우고 제1단의 적석(積石) 가장자리에서 얼마쯤 안쪽으로 들어가서 다시 제1단과 같은 방법으로 제2단과 제3단을 쌓아 올렸으며 꼭대기에는 둥그렇게 흙을 덮을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서 피라미드형이라고 할 수 있는 적석총 가운데 가장 균형잡힌 제2호분은 각 단의 높이가 90Cm로서 3단이 층층으로 올려진 계단식 피라미드의 전형(典型)을 보여주는 듯 보인다. 그러나 피라미드가 자리하고 있는 좌향(坐向)이 제3호, 제4호분과는 너무 다르다. 좌향이 다르다는 말은 곧 축조 시기가 다르거나, 매우 특별난 상황으로 인하여 동일계열(同一系列)의 부족(部族)이지만 출신지(出身地)가 다른 주인공들이 같은 사회, 거의 같은 시기에 매장(埋葬)되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제2호분과 비슷한 좌향을 보여주는 유적은 쌍분(雙墳)으로 여겨지는 제1호분 뿐이다. 그리고 2호분의 밑바닥 가장자리에는 동북, 서남향을 장축(長軸)으로 하는 목관토광묘(木棺土壙墓)가 발견되었다. 이 점이 분명 2호분을 복원할 때 참고(參考)가 되었을 것이며, 그렇다면 여기의 적석총 가운데 가장 정확한 좌향(坐向)과 모양으로 복원된 셈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이곳을 조감(鳥瞰)하여 볼 때는 오히려 이 제2호분이 좌향을 잘못잡지 않았나 생각될 정도로 눈에 거슬리며, 가장 커다란 제3호분의 꼭대기에서 보았을 때, 마치 제3호분을 거역(拒逆)이라도 하듯이 비스듬한 방향으로 놓여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제1호 적석총積石塚과 내원외방형 묘단內圓外方形 基壇 :
오른쪽에서 두번째 사진에서 보이는 깐돌들은 적석총의 바닥으로서 파괴된지 오래되어 흙이 덮이고 집이 들어서 상부 구조는 알 수 없었으나 발굴하면서 적석(積石) 상태가 드러난 것이다. 9.9m x 8.9m의 북분(北墳)과 9.6m x 9.8m의 남분(南墳) 2기가 합쳐져 있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남분에서만 내부 구조를 확인하게 되었다. 길이 20~30Cm 크기의 포갠돌로 네벽을 쌓고 바닥에는 10Cm 안팎의 포갠돌 조각과 자갈 등을 깐 석곽(石槨) 4개가 발견되었다. 그 중 중앙의 가장 큰 것은 장축을 동서 방향으로 하고 작은 석곽 3개는 북쪽 석벽(石壁)에 잇대어 동서 방향으로 1열을 이루고 놓여 있었다. 크기는 길이와 너비가 각각 2.5m x 2.3m, 1.8m x 1.2m, 1.6m x 1.4m로서 이와 비슷한 평면 모양의 적석총은 중국(中國) 길림성(吉林省, jilin) 환인현(桓仁縣, huanren) 고력묘자촌(高力墓子村) 제15호분과 평안북도 (平安北道) 소암리(梳岩里) 제45호분 등이 있다고 한다.
이 제1호분과 거의 붙어서 동북쪽 모서리에서는 서남 모서리 부분과 서쪽, 북쪽의 모서리가 남아있는 색다른 모양의 밑바닥(위의 오른쪽 끝 사진)을 찾게 되었는데, 16m의 네모진 밑바닥(基壇) 안에 지름 11.4m의 원형(圓形) 석축(石築)이 있었으며, 그 밑에서 적석(積石) 토광묘(土壙墓) 2기와 석곽묘(石槨墓) 3기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평면(平面)의 모양은 일본에서 발견된 상원하방분(上圓下方墳)의 평면과 비슷하다고 한다. 이 밑바닥의 좌향은 제3호, 제4호 적석총과 마찬가지로 정북(正北)에 가까운 북향 7도로서 제1호 적석총 밑바닥하고는 약간 좌향(坐向)이 다르다.

제5호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과 토광묘土壙墓 :
원형 봉토분은 지름 17m, 높이 3m의 크기로서 제1호 적석총 밑바닥에서 남쪽으로 약 20m 거리에 위치하는데, 이곳을 정비(整備)할 때에 일부만 발굴하여 조사하고 내부 구조는 확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이 원형 봉토분이 유일하지만 북동쪽으로 10m 거리에서는 네모난 모양의 방대형(方臺形) 봉토분(封土墳)이 있었다고 한다.
적석총과 고분이 늘어선 장축(長軸)의 동쪽, 서쪽 주변에는 현재 2기의 토광묘(土壙墓)가 원래의 토광묘 위에 시멘트(cement)로 만든 모형(模型)이 복원이 되어있다. 제2호 토광묘는 직사각형으로 그 장축(長軸)이 동남동에서 서북서로 놓여져 있었으며, 규모는 223Cm x 76Cm x 21Cm이다. 제3호 토광묘는 그 크기가 208Cm x 58Cm x 26Cm로서 지표면에서 70Cm 아래에 있었고, 네모서리가 둥근 직사각형이며, 장축(長軸)은 동북에서 서남으로 두었다. 이러한 토광묘에서는 회백색(灰白色)과 회청색(灰靑色)의 목짧은 단지가 발견되었으며, 적석총의 바닥보다 아래층에서 발견되기에 층위적(層位的)으로 적석총보다 앞서 조성(造成)된 것으로 여기고 있다.

可樂洞 제1호, 제2호 方臺形 封土墳 :
제1호분은 높이 1.89m, 길이 약 14m이었으며, 제2호분은 높이 약 2.2m에 길이 12m~15m 정도이었다. 1969년에 발굴 조사를 하여 그 내부 구조를 알 수 있었는데, 제1호분은 토광(土壙) 안에 목관(木棺)을 안치(安置)한 목관토광묘(木棺土壙墓) 형식이었으며, 제2호분은 토광(土壙) 안에 3개의 목관(木棺)과 함께 1개의 옹관(甕棺)이 함께 묻혀 있었다. 그 위에는 황색 진흙을 덮었으며 그 위에는 석회(石灰)와 진흙을 섞은 흙을 덮고 다시 그 위에 갈색 진흙을 덮은 다음에, 즙석(葺石, 집석)이라 하여 표면의 흙이 빗물에 흘러가지 않게끔 포갠돌과 냇돌을 섞어 봉토분 전면(全面)에 깔고서 검은 갈색의 진흙을 덮었다. 여기의 원형봉토분이 가락동 고분과 가까이 있어 같은 형식의 것으로 추정(推定)하고 있다.

-이하 내용은 원시예술 홈페이지를 참조바랍니다.-
<자료 출처 : 원시예술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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