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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답사 : 단기4340(서기2007)년 3월

긴 겨울에서 빠져나와 기지개라도 켜듯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길을 나섯다.
이번 답사지는 선사시대 암각화가 세겨진 곳으로 향한다.
선사유적이라 해서 예전에는 원시시대로만 여기고 미개하다는 관념이 많았다.
그런데 거기에 우리의 정신철학인 홍익철학, 천손문화를 개입시키면 엄청난 반전이 일어난다.
자연과 더불어 인간의 존엄함을 널리 알리고 문명화한 그 때 그 시대의 법과 생활체계는
지금의 물질문명시대를 사는 현세인들이 본받아야 할 의식인 것이다.




입구에 다달아...

휴일이라 그런지 주차장에 차들이 많다.
주변에 서원도 있고, 여러 고가(古家)들이
오밀 조밀 모여있는 풍경이 꽤 조용한 분위기이다.
차에 내려 주변 경관을 살펴보니 그 빼어난
절경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태극을 이루며 힘있게 굽이쳐 흐르는 강이 인상깊다.




반구대 암각화 현장

강을 따라 약2km정도 걸어서 가다 보니
장관이 펼쳐진다.
휴일이라 같이 동행하던 관광객들이
아이들 손을 잡고 넓게 펼쳐진 강가를 향한다.
마치 거대한 병풍처럼 웅장하게 둘러쳐진
암벽과 넓게 늘어선 진흙 강바닥, 발길이
절로 아래로 향한다.


설치된 안내판에 의하면...

울산 대곡리 반구대암각화
국보 제285호
이것은 암벽 경사면(10m x 3m)에
290여 점의 물상들이 새겨져 있는
선사시대의 암각화이다.
강바닥 보다 높은 암반 위에 새겨져 있어서
원래는 물에 잠기지 않았으나 주변에
사연댐이 건설 되면서부터 댐속에 잠겨
가뭄 때가 아니면 볼 수 없게 되었다.
암각화는 여러가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인물상, 동물상, 기타 배 같은
물상들로 크게 나눌수 있다.
인물상은 탈을 쓴 가면, 물짐승을 잡는
사냥꾼, 배를 타고 고기잡이 하는 어부
등이며, 동물상은 사슴, 호랑이, 멧돼지,
고래 등이고, 물상은 이 짐승들을 잡는
배, 그물, 덫 등이다.
이 조각(그림)들은 바위면을 쪼아가는
기법으로 조각한 것인데 선과 점으로
단순 순박하게 새겼지만,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과 역동감을 느낄 수
있어서 자연주의 양식에서 추상주의 양식
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적인 특징을 보여
주고 있는 신석기 후기 내지 청동기시대의
사냥미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다.
따라서 이 조각(그림)은 울산지역에서
고기잡이와 사냥에 종사하던 수렵어로인
들이 사냥의 풍성과 다산을 기원해서
만든 일종의 종교적인 선사미술의 대표 작품이다.


안내판의 내용에 따르면 우리는
엄청나게 운이 좋았다.
암각화들이 물에 잠겨있지 않아 최대한
가까이 가서 보니, 어떤 그림은 육안으로
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형상들이 많이 퇴색되어 있었다.
아마도 사연댐으로 인해서 서서히 훼손이
진행된 듯하다.
어쩌면 세계문화유산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국보를 어쩌면 이렇게 훼손시킨다는 말인가?
꼭 물길이 이쪽으로 향해야 했었을까?
과거의 흔적은 한번 없어지면 다시는
접할 수가 없다.
사람의 삶과 죽음과도 같은 것인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가는길


언양시외버스터미널⇔두동, 두서방면 ※버스번호 : 308, 318 (반구대 입구 하차)


대곡리 암각화(大谷里 岩刻畵)
반구대에서 약 2Km 하류로 강을 따라 내려가면 강 건너편에 거대한 절벽이 나타난다. 깍아지를듯한 절벽 아래인지라 강물은 깊은 웅덩이를 이루고 있어, 봄, 여름, 가을이면 물이 가득차니 건너가지 못하고, 그렇다고 배를 빌릴 수도 빌려주지도 않는 곳이라 건너편에서 희뿌연 절벽을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다. 겨울에 강물이 얼면 간신히 살얼음을 딛고 건너갈 수가 있으며, 그것도 겨울 가뭄이 한창 때인 2월에나 가능하다. 필자도 네차례 답사(踏査) 가운데 딱 한번 가까이서 촬영(撮影)과 조사(調査)를 할 정도이었다. 그것도 자식들과 동행하다보니 아들 녀석이 엄동설한(嚴冬雪寒)에 물웅덩이에 빠져 한겨울에 강에서 목욕을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오른쪽 사진에서 흰선으로 네모지게 쳐놓은 부분이 암각화 소재 위치이다. '건너각단'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절벽에 비하면 아주 조그맣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거의 190여점의 다양한 그림들이 촘촘히 새겨져 있다. 암각화의 전체 면적이 너비 약 10m이며, 높이 약 3m에 달하는지라 왠만한 사람들은 그저 천장에 새겨진 그림보듯이 하늘높이 고개를 쳐들고서야 간신히 수천년된 선사인들의 그림을 볼 수 있다. 암각화 아래에는 사람들이 서있을 수 있는 발판이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평평한 바닥이면 그나마 좋겠는데, 약 10도에서 30도 정도의 경사(傾斜)를 이루는 매끈한 바닥이라 오래 서있기조차 불편하다. 여기의 행정지명은 울산시(蔚山市) 언양면(彦陽面) 대곡리(大谷里)로서 이 암각화의 거대한 규모와 양식 등은 한반도에서만이 아니라 전세계에서도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만큼 연구적 가치가 상당한 선사시대 문화재이다. 1970년 12월에 동국대학교(東國大學校) 박물관(博物館)의 문명대(文明大)에 의하여 최초로 발견되고 조사되었다.

1966년 현대중공업(現代重工業)에서는 울산(蔚山) 시민의 식용수(食用水)를 조달(調達)하고자 태화강(太和江)의 지류(支流)인 대곡천(大谷川) 하류(下流)에 사연댐(泗淵dam)을 건설하게 되었다. 그 이후 세군데의 암각이 자리잡은 대곡리 계곡은 수시로 물이 차는 호수(湖水)지역이 되었으며, 그렇기에 댐이 건설된 이후 여기 암각화는 급속도로 파괴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明白)한 사실이다. 그리고 셰일 이암층(泥岩層)이 식용수를 조달하는 댐의 지층으로서는 적합하지 않다는 전문가들의 말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그룹(HyunDai Group)에서는 이미 수년전부터 댐의 높이를 더 높이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곳 반구마을 주민들과 문화재 보호단체에서는 반대를 하고 있으나 그것이 어느정도 실효를 거둘지는 미지수이다. 사진에서 보이는 흰선과 띄들은 댐에 물이 가득차있을 때의 물이 차있었던 자국들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문화 수준이 겨우 이 정도뿐이 안된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대표적인 문화재(文化財) 파괴(破壞) 현장이다.

암각화를 처음 대하면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오른쪽 사진과 같이 화면의 왼쪽 위의 고래들과 거북이 그리고 그 꼭대기에 있는 사람의 형상이다. 이 사람은 전체 화면에서도 가장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런 만큼 가장 쉽게 눈에 뜨인다. 이 사람은 성기(性器)가 달려있는 것으로 보아 남자의 형상이 분명하며, 이 남자는 오른쪽의 여러 동물들을 바라보면서 두팔을 얼굴까지 들어서 마치 예(禮)를 취하는 듯한 모습으로 서있다. 왼쪽에는 같은 자세의 사람 등을 표현하려다 그만둔 듯한 선이 그어져 있다. 그 아래는 거북이 세 마리와 새끼 밴 고래 (또는 어미 고래 등에 업힌 새끼 고래)를 시작으로 하여, 물을 뿜어대는 고래도 있으며, 작살에 꽂힌 고래, 흰수염고래, 돌고래 등등, 고래 종류의 대부분이 이곳저곳에 크고 작게 새겨져 있다. 그 모습들은 주로 위나 옆에서 보여지는 모양이며, 대부분의 자세가 곧게 늘어서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작살이 있는 고래 오른편의 모양은 중국 한대(漢代)에 사용된 '노(弩)'의 모양과 비슷하다는 견해도 있다.

이 부분에서 특이한 모양은 보통 울타리를 표현했다고 생각하는 네가닥으로 얼기설기 그물처럼 그어논 타원형(타圓形)의 동심원(同心圓)과 그 아래 14, 15 가닥으로 그어논 한자(漢字)의 '책(冊)'모양의 선(線)이다. 분명 서로 다른 용도의 울타리를 표현하였다고 생각되는데, 하나는 '닫혀진 울타리'이고, 다른 하나는 양끝이 '열려진 울타리'라는 점이다. 또한 '열려진 울타리'는 위와 아래의 선의 개수가 다르다. 이는 중간이나 다른 부분에서 보여지는 또다른 울타리도 마찬가지로서 분명 수평(水平)으로 그어진 선을 경계로 하여 위와 아래를 달리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윗부분과 아랫부분의 재료(材料)나 개수(個數)가 다르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즉, 그 아래 좁다랗게 그어진 평행선을 이 '열린 울타리'와 연관지어 생각한다면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바다로 흘러가는 좁은 수로(水路)에서 가운데 한 군데만 열어 놓은 '열린 울타리'를 쳐놓고 바다에서부터 몰이를 하면 그 안에 적당한 크기의 물고기를 가둘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위와 아래 선의 개수(個數)가 다른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동심원의 울타리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들짐승을 가두어 놓는 '닫힌 울타리'로 생각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선사시대 암각화의 제작기법을 크게 구분하여 보면, 우선 쪼으기 또는 쪼아파기(pecking)와 그어파기(engraving), 갈아파기(grinding)로 나눌 수 있다. 그중 유라시아(Eurasia) 북반구(北半球)에 집중되어 나타나는 투시기법(透視技法)인 일명 렌트겐(X-ray)방법은 대상의 내부를 선과 동그라미로 채우는 방법으로서 쪼아파기와 그어파기의 방법으로 제작된다. 그러나 여기의 암각(岩刻)에서는 주로 면쪼으기(面刻)와 선쪼으기(線刻)식으로 동물의 가죽 무늬 또는 단순한 문양을 묘사한 것으로 보여진다. 오른쪽 사진에서도 왼쪽 끝에 있는 고래의 모양을 우선 쪼아파기로 윤곽선(輪郭線)를 만들고 그 다음에 아래부분부터 쪼아파기로 면(面)을 만들다 중지(中止)한 것으로 보인다. 그 옆의 호랑이는 줄무늬를 쪼아파기로 선을 만들었으며, 그 오른쪽에는 이곳의 암각화 가운데 색다른 표현으로서 동물의 외곽선(外郭線)을 이중(二重)으로 묘사(描寫)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세 마리가 위에서부터 나란히 늘어서 있으며, 그 오른쪽에도 한마리가 보인다. 이것들은 머리, 등, 배, 꼬리는 이중선(二重線)으로, 그리고 다리는 짝이 모여진 모양으로 하면서 삼중선(三重線)으로 묘사하였다. 그리고 몸체는 마치 육류(肉類)의 부위(部位)를 구분(區分)하여 놓은 듯이 무질서(無秩序)하게 구획(區劃)지어져 있다. 어찌 보면 갈비뼈를 표현한 듯이 보이지만 갈비뼈와는 관계없는 것이 더 많으며, 특이하게도 다리가 가지런하게 모여져있다는 점이 다른 동물들의 묘사와는 차이가 있다.

화면 오른쪽 위의 배 모양 아래에는 둥근 곡선으로 이중선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아래 부분에는 멧돼지와 사슴, 고래 사이에 이중선(二重線)이 둥글게 그려져 있다. 이 모양은 뱀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꼭대기에 있는 뱀은 그 굵기와 크기가 배 이상으로 매우 확대된 크기를 갖고 있다. 암벽의 균열부분과 겹쳐져 있기에 확실한 모양은 알 수 없지만, 사선의 균열부분과 비슷한 사선(斜線) 방향으로 새겨져 있어, 기어오르는 모양을 표현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또한 암각화의 오른편 꼭대기에는 사람이나 매우 용맹한 맹수(猛獸)들이 새겨져 있기에 이 뱀은 사람들에게 아주 위협적인 존재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화면의 왼편에서는 사람과 함께 거북이들이 그려져 있어, 이 당시 사람과 거북이의 특별한 관계를 의미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즉, 화면 오른편과 왼편은 둘로 나누어지며, 각기 다른 의미에서 암각 작업이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굳이 이를 말하자면 왼편은 개인적인 삶, 즉 우두머리의 인생이나 그와 관련된 동물들이며, 오른편은 사회적인 삶, 즉 대중(大衆)들의 인생이나 활동 모습에 촛점을 두고 그와 관련된 동물들을 표현하였다고 생각된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우두머리는 거북이와 같은 장수(長壽), 그리고 대중들은 뱀과 같은 다산(多産)과 풍요(豊饒), 또는 협동심을 의미하지 않았을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오른쪽 꼭대기에서나 화면 중간중간에는 사진과 같이 둥그런 활모양의 호(弧)를 새겨놓고, 그 위에 작대기를 촘촘하게 여러번 새겼다. 네다리가 없다는 점에서 어떤 동물에 대한 표현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여러 고래들 주변에 새겨져 있으며 크기는 각양각색이다. 또한 긴 작대기가 없어 울타리 표현과도 다르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들이 줄지어 배에 타고있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역사시대(歷史時代)인 신라(新羅)의 배 모양은 천전리 암각화의 아랫부분에서 볼 수 있는 바, 배 밑면이 평탄하고 양끝이 부드럽게 곡선으로 처리된 모양이며, '노'와 '돛'이 그려져 있는 모습이다. 이런 점에서 둥그런 활 모양은 파도를 헤쳐나가기 좋은 곡선(曲線)이자 그 기능적(機能的) 형태(形態)로서, 사람이 팔을 굽히고 있는 모양도 활 모양인 것에 견주어 비록 실제로 둥그런 형태는 아니더라도 둥근 움직임으로 꺾어진 배이었다는 것을 내포(內包)한다. 또한 역사시대의 배 도안(圖案)에는 '노'가 표현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노(櫓)'가 전혀 없다.

여기에서 표현된 짐승들의 문양(紋樣)은 크게 구별하여 줄무늬와 점무늬로 구분할 수 있다. 줄무늬는 특히 호랑이나 고래, 또는 멧돼지 모양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앞서 말하였던 렌트겐 식의 기법도 여기에 포함된다. 점무늬는 표범이나, 독수리로 여겨지는 정체모를 두다리 동물에게 표현되어 있다. 점을 새긴 순서는 독수리의 경우는 위에서 아래로 새기거나 또는 표범의 경우, 무작위(無作爲)로 단순하게 내부를 채우려는 듯이 점을 새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고래의 몸체는 조그만 점을 수없이 빽빽하게 두드려서 넓적한 평면을 만들었으며, 이는 어찌 보면 온몸이 단일색인 동물의 표면을 표현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특이한 사항은 바로 이렇게 전체를 쪼으면서도 그 중간에 다른 물체, 즉 작살로 여겨지는 화살표 모양이나 고래 등에 업힌 새끼고래의 모양을 그대로 놔두어서 하나의 형태에 다른 형태를 삽입(揷入)하여 이중으로 표현하였다는 점이 매우 독창적이며, 또한 표현기법이 매우 발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울타리에 갇힌 짐승들을 표현할 때도 단순하게 개념적(槪念的)인 차원으로 조감도(鳥瞰圖)처럼 표현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3차원(次元)에서 보여지는 울타리 속의 짐승을 그대로 표현하였다. 이런 점에서 이 암각화의 제작자는 표현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專門家)이었으며, 그것도 매우 세련된 형태 감각을 소유한 자로서, 이미 여기 만이 아니라 타지역에서도 이와같은 암각화를 남겨 놓았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오른쪽 사진은 암각화면의 오른쪽 윗부분을 탁본한 것이다. 여기에는 다양한 동물들이 각기 다른 기법으로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장 꼭대기에 홀쭉한 고양이과 동물의 모양에서부터, 비스듬히 그려진 호랑이, 살이 통통하게 오른 암사슴, 뿔이 거창하게 달린 숫사슴, 족제비와 멧돼지 등등이 렌트겐 기법과 단일면(單一面)으로 새겨져 있다. 호랑이 표현 중 두마리는 암벽의 사선방향의 균열 부분과 인접하여 사선 방향으로 새겨 놓았는데, 이는 나무나 암벽을 타고 올라간다는 의미가 아닐까 여겨진다. 이 부분에서는 주로 뭍에 사는 동물을 주로 새겼으며, 나름대로 육지를 연상하고 이 부분에 집중하여 놓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새겨진 기법을 보면 전체 화면의 왼쪽 위의 부분과 마찬가지여서 윗부분의 모든 모양들은 모두 한 사람에 의하여 새겨진 것이거나 또는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단일면(單一面)과 렌트겐 기법이 혼용(混用)된 이유는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對象)이 각기 다른 무늬로 되어 있다는 것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즉 이중(二重) 외곽선(外郭線)이 아닌 단순한 외곽선으로 처리된 렌트겐 기법의 동물들은 동물의 해부(解剖)된 모습이 아니라 단지 가죽의 무늬나 문신(文身)과 같은 의미로서 이렇게 묘사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이는 아프리카 원주민이나 동남아시아 원주민들의 문신습관(文身習慣)에서도 볼 수 있듯이 상대방에게 두려움을 주거나 공포(恐怖)의 대상으로 부각시키면서, 죽음을 초월한 용맹(勇猛)을 지니고자 일부러 문신을 한다. 그런 점에서 여기에 렌트겐 기법으로 새겨진 동물들은 그만큼 수렵(狩獵)을 생계수단(生計手段)으로 하는 원시인들에게 공포스러운 대상(對象)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렌트겐 기법이나 무늬를 새긴 짐승들은 모두 한결같이 육식(肉食)을 위주(爲主)로 하는 흉포스러운 맹수(猛獸)들로 볼 수 있다. 그중 특히 인간들에게 위험한 대상은 비록 물고기 즉, 상어나 거대한 고래와 같은 어류(魚類)라 하더라도 줄무늬로 표현하였으며, 줄무늬나 점무늬를 포함한 모든 무늬들을 상대방에게 공포를 주는 특별난 효과로 여겼으리라 생각된다. 이를 통하여 앞서 말했던 이중 외곽선의 렌트겐 기법은 그러한 공포 대상의 가죽(外皮)이 매우 두꺼워서 쉽게 죽지 않는다거나 또는 창칼이 쉽사리 가죽을 뚫지못한다는 표현이 아닐까 생각된다.

암각화의 윗부분은 일반 사람의 키에 비하여 월등히 높기 때문에 훼손되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아랫부분은 동네 어린애조차 손이 닿을 수 있기 때문에 쉽사리 조각이 가능하다. 그것도 이 암벽의 암질이 이암(泥岩)인 관계로 왠만한 쇠꼬챙이면 쉽사리 쪼으기가 가능해 진다. 그러므로 아랫부분은 상당부분이 훼손(毁損)되거나 후대(後代)에 덧그려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선 윗부분과 비슷한 양식의 그림을 원래의 그림으로 생각하여 보면, 대부분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화면 오른쪽 아래에는 좀 색다른 모양이 하나있다. 바로 삼각형의 뽀족한 얼굴로서 두눈과 코, 입의 윤곽이 매우 뚜렸하다. 그러나 이마나 머리부분이 생략되어 있어, 가면(假面)을 표현하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모양이다. 선사인(先史人)들이 표현한 것치곤 매우 현대적인 감각이며, 오히려 큐비즘(Cubism)의 표현양식과도 일맥상통하고 그만큼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가면 모습과도 닮아있다. 너무나 절묘한 우연의 일치라서 상당한 의심이 가지만 새겨진 선의 굵기나 제작기법이 윗부분과 비슷하여 본래의 그림으로 생각하고자 한다. 여하튼 이 가면은 원시인(原始人)들의 특별난 우상(偶像)이나 두려운 신적(神的)인 대상(對象)으로 여길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이 암각화의 제작자(製作者)의 모습, 또는 이렇게 덧새긴 후대(後代)의 모방자(模倣者)의 표식(標識)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의심이 가는 것은 한둘이 아니다. 가면(假面)의 왼쪽에는 이중으로 네모가 그려져 있다. 이 암각화의 어느 곳에도 네모진 모양은 없는데, 유독 여기에만 네모가 그려져 있다. 대부분 동물들로 화면을 채워놓았는데, 오로지 이 부분 만이 분명한 형태를 갖고 있으면서도 뜻모를 추상적(抽象的)인 모양이다. 또한 동물의 형태를 만들다 중지한 것도 생각하여 볼 수 있지만, 고래를 표현하다 중지한 부분을 통하여 볼 때는, 우선 외곽 형태를 만들고 그 다음에 내부 표현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 네모 모양은 후대에 분명한 형태 감각으로 덧새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화면 왼쪽 아래에는 팔과 다리를 곧게 뻗친 사람의 모양이 그려져 있다. 이것만큼은 도저히 이 암각화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여기에서 표현된 동물이나 사람의 팔 다리는 나란하게 올린 모습으로 표현되었거나 또는 'S'자형으로 한팔은 올리고 다른 한팔은 내린 모습을 보여준다. 즉 이러한 모습은 당시 원시인(原始人)들의 공통적인 표현방식으로 팔다리의 동작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수평으로 뻗은 팔다리와 다시 이어서 방사형(放射形)으로 크게 내뻗은 손가락 표현은 팔다리의 동작보다 손가락의 동작이 매우 중요시되는 현대 어린이들의 표현방식인 것이다.

또한 왼쪽 아래편에서 보여지는 고래가 물을 뿜어대는 도안(圖案)은 상당히 현대적인 감각으로 고래의 모든 움직임을 자세히 알고있는 도안이다. 즉 나비 더듬이 모양의 대칭나선(對稱螺線)은 현대에서도 분수(噴水)의 모양을 나타낼 때 종종 쓰이는 표현(表現)이며, 더군다나 고래의 몸체가 'S'자형으로 굽어져 있다. 고래의 동작을 강하게 표현하므로서 실제로 고래가 물 속에서 유영(遊泳)하고 있는 순간을 포착(捕捉)하였으며, 고래가 수면(水面)으로 올라와서 숨을 쉬면서 물을 내뿜는 순간을 매우 자세하게 표현하였다. 이는 다른 동물들의 수렵(狩獵)과 어로(漁撈) 상황과는 다른 것으로 과히 현대적인 관찰에 의하여 표현된 현대적인 도안이라 해도 무방(無妨)할 것이다.

마치 선사시대(先史時代)의 동물원(動物園)을 묘사한듯한 여러 수많은 동물들이 이곳저곳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그 상당 부분이 풍화(風化)와 침식(浸蝕)에 의하여 마모(磨耗)되었기 때문에 보다 정확하게 형태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도 막상 현지에서 직접 본다하더라도 대부분의 형태는 알기 어려우며, 단지 탁본(拓本)을 통해야 간신히 이런저런 형태들을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보고 선사인(先史人)들의 책(冊)의 일종으로서, 짐승들에 관한 지식과 사냥방법, 분배법칙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고 하며,(정동찬) 또는 단순하게 사냥미술의 일종으로 수렵(狩獵)하는 모습을 그렸다는 사람도 있다. 또는 탈이라는 형상을 통하여 제의적(祭儀的)인 종교(宗敎) 입문식(入門式)이라는 의미(意味)로 생각하기도 하며,(황용훈) 또한 생(生)의 번식(繁殖)을 기리는 마음에서 수렵 대상과 사냥 노획물(虜獲物)을 표현했다고 하며, 재생(再生)과 풍요(豊饒)를 위한 종교적(宗敎的) 제의(祭儀) 장소와 결과물로 보기도 한다.(임장혁, 임세권)

이들 대부분은 여기 대곡리 암각화의 위치가 암각 건너편에 넓게 펼쳐진 들판이 있으며, 그와 함께 제단(祭壇)처럼 암각 바로 밑이 발판이 마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종교적으로 신성(神聖)한 장소로 여기고 있으며, 이 암각이 수렵 사회의 감응주술적(感應呪術的)인 측면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4) 그러나 앞서도 잠깐 말하였듯이 화면은 크게 왼쪽, 오른쪽의 두 화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꼭대기에는 각기의 동물 집단을 이끌듯이 한 사람과 그리고 여러 사람이 탄 뱀모양의 배가 있다는 점이다. 만약 감응주술적인 의미에서 이러한 작업이 진행될 때에는 그만큼 주술(呪術) 대상(對象)이 돋보인다거나 또는 매우 확대되어야 함에도 오히려 각기 동물의 현실적인 크기 비례에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또한 감응적인 대상이기에 새겨진 대상 자체에 집중적으로 어떤 물리적인 덧새김을 한다거나 행위적 결과가 더해져야 함에도 전체적인 화면을 비교하여 볼 때, 전혀 그러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비록 사선(斜線)으로 배치된 호랑이에서는 좀 더 깊숙한 요철을 발견할 수 있지만 나머지 동물들에게서는 전혀 색다른 것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무늬를 넣느냐 않넣느냐에 따른 표현 기법이 다른 것 이외에는 단순하게 대상들을 나열하듯이 새겨 놓았기 때문에 각기의 대상들은 거의 동일한 가치(價値)와 의미(意味)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역사적인 기념비(記念碑) 또는 어떤 중요한 사건의 기록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럴 경우는 그 화면에서 절대적으로 삽입시켜야 할 것이 바로 시간(時間)이다. 시간과 책력(冊曆)의 기록은 이미 오천년을 넘게 지속되어 왔다는 것이 옳은 사실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과거 선사시대에는 매듭으로 수를 계산(計算)하고 언어(言語)로 활용한 결승(結繩)이 있었다고 한다. 주로 한반도 동남해안과 남해 도서(島嶼)지방, 그리고 일본(日本) 열도(列島)에서 사용되었던 고대언어(古代言語)로서 알려지고 있는데, 사실 여기 암각화에서 '열린 울타리'가 결승과 비슷하다. 이런 점에서 이 암각에 시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형태라면 바로 '열린 울타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즉 결승의 한 형태라면 간격이나 매듭의 수에 변화가 있을 터인데, 전혀 그런 모양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단지 사건(事件)의 순차적(順次的)인 기록(記錄)으로 본다면 어떨까? 즉 수렵(狩獵)이나 어로(漁撈)에서 획득한 노획물을 그때그때 형태로 기록하므로서 자손에게 알릴 수 있는 귀감(龜鑑)이나 증거(證據)가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사례(事例)는 바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반구대의 서명(署名) 암각(岩刻)이다. 단순하게 자신이 여기 반구대에 왔다 간다는 증거(證據)와 표식(標識)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새겨 놓은 것들이다. 서명 암각을 전체적으로 보면 거의 비슷한 기법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마치 한사람이 동시에 여러 사람의 이름을 새긴 것처럼 보이며, 그것도 한꺼번에 여러 사람들이 이곳을 다녀간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한 시대(時代)에 시간을 두고 이름을 새길 때에 대부분은 같은 양식(樣式)과 기법(技法)으로 새기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그것이 하나의 동일 화면이라면 당연히 상호간에 영향을 주게 되고 그 결과 마치 한 사람이 여러 이름을 동시에 새긴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다시 대곡리의 암각화를 보면 한 사람에 의한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 한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겹쳐지거나 끼어있는 형태들, 또는 덧새긴 형태들이 시간을 두고 하나씩 하나씩 새겨 놓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그 작업을 비록 한두사람이 하였다 하더라도, 그때그때 동물을 새기면서 크기가 달라지고, 자연스럽게 겹쳐지기도 하며, 약간씩 요철(凹凸)의 깊이를 달리 하면서 화면 이곳저곳에 배치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단 꼭대기에 있는 사람과 사람이 탄 배 주변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그러니까 제일 꼭대기 부분 이외에는 모두 각기 다른 시간에 순차적으로 새겨 나갔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필자(筆者)의 견해(見解)로는 이 대곡리(大谷里)의 선사(先史) 암각화(岩刻畵)는 아래 부분의 몇 군데 후대(後代)에 덧새긴 것을 빼놓고서는 그저 단순한 사냥 노획물의 사실적(事實的) 형태(形態)의 기록(記錄)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1995년 2월 촬영, 1998년 9월 작성, 2003년 3월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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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원시예술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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