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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울주군 천전리 각석



답사 : 단기4340(서기2007)년 3월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를 둘러보고 걸어 나오면서 참으로 묘한 감정이 든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랄까?
실질적으로 단군시대 때의 생활상을 느끼고 싶었던 터라
이번 여행길은 나에게 많은 만족감과 기쁨을 준다.
지금 향하고 있는 천전리에는 어떤 형상들을 품고 있을지 정말 궁금해진다.
대곡리에서 약 10분 정도 차를 타고 가다보니 차로는 들어가지 못한다는 표지판이 보인다.
걸어서 꽤 험한 산길을 걸어가다 보니 민가에서 기르는 개 한마리가 우리를 보고 짖어댄다.
걸어가는 동안 괴이하면서 특이한 모양의 바위와 암벽들을 보면서 힘듦을 느낄사이도 없다.
산길을 꽤 걸어왔을까, 절벽아래 개곡이 펼쳐지면서 드디어 목적지가 시야에 들어온다.




천전리 각석 주변 경치

산길을 내려와 천전리 각석 쪽으로
가려니 건너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니 멀찌기 다리가 놓여있다.
아들 녀석이 대곡리 암각화에서
만났던 가족을 보고 아는체를 한다.
그 가족도 주변경관에 취해 잠시
쉬어가는 듯 했다.
그도 그럴것이 풍류시인 김삿갓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을 경치다.




천전리 각석

이곳 각석이 세겨진 돌은 그야말로
커다란 공책과 같다.
바위에 세겨진 그림들은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보다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림 각각의 형상들이 주는 느낌 또한
다르게 느껴진다.
지금 활용을 해도 좋을 법한 문양들이
커다란 돌공책에 잔뜩 그려져 있었다.
선사시대 때의 그림도 있고 다른 부분에는
한문과 말을 탄 사람, 용 등이 세겨진 부분도 있다.
마치 각기 다른 과거의 시간들이
한곳에 멈추어 있는 것처럼 시간여행을
하는듯 가슴이 울렁인다.

안내판에 따르면

울주 천전리 각석 蔚州 川前里 刻石
국보 제147호

바위 위나 큰 절벽, 동굴 안 벽면 등에
사물이나 기호를 쪼기, 새기기, 칠하기
등의 기법으로 그린 그림을 바위그림,
암각화(巖刻畵)라고 한다. 바위그림은
후기 구석기시대의 유적에서도 발견되지만,
전형적인 사례들은 신석기 및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주로 찾아진다.
바위그림은 대개의 경우, 풍요, 다산 제의의
산물로 이해되고 있다. 이 바위는 상부에
면쪼기로 나타낸 사슴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동물과 선쪼기로 나타낸 다양한 기하무늬가
있고, 하부에 여러 명문(銘文)과 가는선
긋기에 의한 물질 및 동물상 등이 있어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상부의 마름모꼴무늬, 굽은 무늬, 둥근무늬,
우렁무늬, 사슴, 물고기, 새, 뱀, 사람얼굴상
등은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당시의 풍요의식과
관련된 표현으로 해석된다.
하부의 기마행렬, 배의 항해 모습, 용, 말,
사슴 그림, 300여 자의 명문은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사람들이 남긴 것으로
신라사람들이 삼국시대 이래 이곳을
성지(聖地)로 여겼음을 짐작하게 한다.

안내판에 의하면 신석기 및 청동기 시대
유적에서 주로 찾아지는 그림들이라고 하니
배달시대 후기에서 단군시대 때가 주류를
이루었을 것이라 생각되어진다.
그것은 곧 이곳이 교육 장소나 천재의식이
행해진 곳은 아니었을까라는 의문을 가져본다.
신라 사람들이 이곳을 성지로 여겼음을
짐작케 한다는 설이 그것을 뒷받침해준다.
이러한 의문들은 아래 원시예술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자료에서 풀기바란다.





울산 울주군 천전리 각석 가는길


언양시외버스터미널⇔두동, 두서방면 ※버스번호 : 308, 318 (천전리 입구 하차 2.8km)


반구대 암각화에서 5Km, 반구대에서는 약 2Km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하천 옆 왼쪽에 거대한 바위 하나가 칼로 잘린 듯이 반듯한 면을 보이며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 20도 각도로 비스듬히 앞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전체 면적은 높이 2.7m, 너비 9.5m 이다. 행정구역으로는 울산시(蔚山市) 울주군(蔚州郡) 두동면(斗東面) 천전리(川前里)에 속하며, 두동면과 두서면에서 흘러 내려오는 하천이 이곳에서 모이면서 각석 앞을 지나 좁은 협곡을 따라 가게 된다. 이 곳의 협곡에서는 주변이 높고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보이나 이곳을 빠져나가면 곧 논과 밭이 있는 분지를 보게 되며 주변의 산도 기껏해야 해발 260여 미터의 산으로서 단지 이 반구대 계곡에서만 산들이 급경사를 이루면서 계곡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 이 계곡의 물은 보기와는 달리 그다지 맑지 못하며, 계곡의 하류에는 사연댐으로 가로막아 저수지를 만들어 생활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과거에는 이 하천이 태화강과 합류하여 울산만으로 빠지게 되었었다.

"이 계곡은 울산과 경주를 잇던 고로 (古路)의 중간이었다. 특히 강을 따라 개통되었던 길이기 때문에 이 길은 꽤 많이 이용되었던 것 같고, 특히 신라 때는 울산의 농산물이나 철 또는 외국의 무역물자 등이 이 태화강의 뱃길로 수도 경주에 운반되었을 것이다." (1) 각석 건너편에는 넓고 평평한 암반이 펼쳐져 있고 그 윗면에는 공룡 발자국이 산재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서 공룡 발자국과 암각화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단지 진흙이 굳어서 된 바위가 연질이여서 청동기로도 조각하기에 적합하며 또한 절개면이 반듯하다. 여기의 공룡 발자국들은 "대형초식 공룡인 한외룡 (울트라사우루스 ) 을 비롯한 용각룡 10필의 족인과 중형 초식공룡인 조각류 이구아나룡에 속하는 고성룡 (고성고사우루스) 10필의 족인 및 육식공룡인 큰룡 (메갈로사우루스) 1필의 족인 (1개)이 함께 200여개 산출된다. 공룡이 걸어간 발자국 길은 보이나 이들의 평행한 행렬이 없는 것으로 보아 많은 공룡들이 일정한 방향을 향해 진행한 것이 아니라 공룡공원을 이리저리로 평화롭게 배회했던 생태를 시사해 준다. 공룡족인이 산출되는 지층은 중회색 이암 혼휄스의 비저색층으로 경상누층군 하양층군 사연리층에 속한다. " (2)

1970년 12월 문명대 (文明大)에 의하여 반구대 주변의 불교유적을 조사하던 중 처음 발견된 이 각석은 바위면 상부에 다양한 기하학적 문양과 동물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으며 하단에는 가는 선각으로 기마행렬도와 명문 (銘文)이 새겨져 있어 일명 천전리 서석 (書石)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의 명문 가운데 '을사 (乙巳)' 라는 간지 (干支)를 통하여 대략 6세기초 신라 법흥왕 12년 (A.D. 525) 이전에 하부의 명문이 새겨지지 않았나 추정하며 (3), 상부의 기하학적 문양과 동물 모양의 암각은 신석기시대 중기에서 청동기 시대에 걸쳐 새겨진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여기에 새겨진 명문으로 미루어 화랑들의 성스러운 집회장소이었으리라 추정하는 학자도 있으나 명문의 글자가 불확실하여 좀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시대가 다른 다양한 형상의 암각이 이 곳에 집중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일종의 신앙과 연결된 하나의 보호지 내지는 성지" (4) 이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현재 이 바위는 국보 제 147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바위 상부에 새겨진 기하무늬에 대하여 많은 연구가 있었는데, 둥근무늬와 마름모꼴 무늬를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 토기의 무늬와 비슷하다 하여 "곡식이나 음식물을 저장하는데 필요한 풍요에 대한 상징 내지 부호적인 성격" (5) 으로 파악하기도 하며, 고령 양전동 암각화에서 여기와 비슷한 동심원과 성혈이 발견되는 점에 비추어 "풍요주술과 감응주술에 의한 생산을 기원하는 신앙행위의 결과 바위를 비비면서 청원하는 행동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들" (6)이라 생각하였으며, 동심원과 소용돌이 무늬가 "태양을 상징" (7) 하며, 여러 기하무늬가 "청동기 시대 농경생활과 직결된 태양, 곡물의 성장과 숙성, 여성의 성기 등을 상징" (8) 한다고 말한다. 또한 정동찬은 자연현상에서 기하무늬가 비롯되었다 하여 "남자와 여자의 상징물로서 물과 비를 상징하는 그림들 ... 농사의 풍요로움을 빌면서 비가 많이 와주기를 바라는 상징물들을 그림으로" (9) 그렸다고 생각한다.

거대한 단일 바위면에 새겨진 기하무늬와 동물상 그리고 글자들. 이 모든 것이 서로 다른 부분을 차지하며 다른 기법을 사용하였기에 시대적으로 달리 새겨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동물들의 모습이나 명문과 같은 수법으로 새겨진 기마행렬도, 용등은 쉽사리 그 형상을 읽을 수 있기에 어느정도 시대적인 상황이나 사회상을 추정할 수 있다. 바위면의 상부의 기하무늬는 상당히 여러번 반복하여 문지르고 갈아낸 수법이고 아랫면의 글자와 기마행렬도는 단단한 철 송곳으로 선을 그어 흠집을 낸 정도이다. 또한 상부 왼쪽에서 볼 수 있는 동물상들은 단단한 송곳으로 쪼아내면서 형상을 만들었는데,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볼 수 없을 정도로 그 깊이가 얕다. 여기의 그림들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역시 기하무늬로서 정성들여 갈아내고 문지르고 하였다는 것을 쉽사리 짐작하게 한다.

바위면 꼭대기에서 부터 시작되는 마름모꼴, 지금의 바닥과 높이라면 쉽게 손대기 힘든 위치에 연속으로 새겨논 마름모꼴들과 마름모를 반으로 쪼개논 톱니같은 모양들. 그 아래에 단순하게 원을 반복한 동심원이나 겹마름모꼴, 물결무늬, 또한 이 도형에서 길게 이어진 (겹)선들, 이 모두가 원과 마름모꼴이 겹으로 반복되어 새겨졌다는 것 뿐이지, 기하무늬 간에 의도적인 연결이라거나 특정한 대상을 나타내기 위하여 궁리하여 조각한 흔적은 않보인다. 단지 구별하여 볼 수 있는 것은 중앙의 밀집된 도형들 양옆에 얼굴과 비슷한 형상이 그려져 있고, 바위면 꼭대기의 연속 마름모꼴들이 7, 8부 위치에 나열되어 있는 여타의 도형과 약간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리라.

중앙에 밀집된 도형들과 좌우에 날개를 펼치듯 줄지어있는 도형들과 가운데 꼭대기에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는 연속 마름모꼴들, 분명 바위면 중앙을 중시하였다는 증거이고 또한 하늘과 가까운 꼭대기 부분 (맨 위 가장자리)을 의도적으로 염두에 두어 도형을 배치하였다는 결론이다. 그리고 여기의 도형 가운데 수평선과 수평으로 배치된 사각형이 하나도 없고, 모두 사선이나 마름모꼴로서 그 종축이 수평이나 수직인 것들이다.

쉽사리 확인하여 알아볼 수 없는 기하무늬가 왜 필요하였을까? 이 당시 전혀 형상적 이미지를 그리지 못하였을까? 그러나 얼굴 모양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형상적 표현방법을 모른다거나 불가능하였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미국 인디언의 암각화를 살펴본다 하더라도 비록 여기의 경우와는 다르지만 종종 부분적으로 소용돌이와 마름모꼴 형태가 발견된다. 소용돌이는 물과 관계된 것으로 장소나 빠지는 물과 솟는 물, 물결모양은 고여있는 물이나 연못, 뱀 모양은 지하 수맥, 연결된 마름모꼴은 방울뱀이나 별들, 또는 처녀들의 성인식 통로를 뜻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0) 그렇지만 그 대부분은 원주민의 증언으로 확인되고 구상적 이미지와 함께 하기에 그러한 유추가 가능해지고 옳든 그르든 대강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 천전리와 너무 흡사한 무늬를 보여주고 있는 또 다른 유적을 찾아볼 수 있다. 유라시아 대륙 끝 섬나라인 아일랜드에는 수많은 열석과 고인돌, 그리고 우리의 왕릉과 같은 봉토분이 산재하고 있다. 그중 수도 더블린에서 가까운 뉴그란지(Newgrange)와 노우스(Knowth), 로프크루(Loughcrew)의 봉토분에는 한국 봉토분의 호석 (Kerbstones ; 지탱석)과 같은 자연석들이 봉분 둘레에 놓여져 있으며 이 호석에 암각화가 새겨져 있다. 이 기하무늬들을 태양이나 숫자, 기호의 상징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여기 천전리 경우처럼 완벽하게 추상적인 무늬들로 이루어져서 아직까지 설득력있는 해석이 내려져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 천전리 암각화는 깊게 새겨진 기하무늬 만을 따로 하여 볼 때, 크게 보아 둥근 곡선과 각진 마름모 두가지가 이곳저곳 뒤섞여 있다. 이는 자연과 함께하며 자연의 지대한 영향 속에 살았던 원시인들에게 기하무늬 또한 바위에 새길 정도로 중요성이 있었다는 것을 뜻하며, 형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어떤 이미지를 이와같이 추상적 도형으로 표현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가령 하늘이나 땅 자체, 삶과 죽음, 영혼, 방향과 세월, 시간의 흐름, 신적인 존재와 악마적 존재, 물과 바람, 산과 계곡등 인간의 능력과 크기에 비해 월등한 것이나 구상적 표현이 불가능한 것에 대하여 기하적인 무늬를 쓰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새겨진 도형 또한 당시의 일반인들이나 특정한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고 인식할 수 있는 도형이어야 이 인위적인 표현이 효과를 가져오거나 스스로 보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인식 못하는 도형이나 기호, 부호는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아예 만들 생각 조차 하지 않는 것이고 그런 경우가 있다하더라도 낙서나 장난 정도로서 손쉽게 만들수 있는 재료를 선택하게 되어 있다. 이런 점에 비추어 여기의 정성들인 암각 도형들은 최소한 동족 간에는 확연하게 알 수 있는 이미지들이며, 최소한의 특정 부류가 인식할 수 있는 도형은 부족의 흥망성쇠에 따라 범위를 넓히기도 하고 소멸되거나 다른 이미지로 변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한번 성립된 이미지는 언어와 같은 성격으로서 그 부족이 완전히 소멸하지 않는 한 최소한의 흔적이 남게 되어 있으며,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이와 비슷한 도형과 흔적이 인근 지역 곳곳에 남게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곳 천전리 암각화의 동심원과 비슷한 암각이 남부지방 한두군데에서 발견되기는 하지만 마름모꼴이 사라진다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할 수 있으며, 그만큼 여기의 도형에 대한 해석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그 해석에 대한 근거와 자료가 아직 불충분하다 할 것이다.

암각화가 남아 있는 장소를 답사하다 보면 먹으로 탁본을 뜬다하여 시커멓게 먹칠을 해놓은 경우를 수시로 보게 된다. 여기도 마찬가지여서 누군가 잘못된 방법으로 탁본한 흔적이 역력하다. 암각화를 탁본하려는 사람이라면 이미 최소한의 양식과 지식이 있을 터인데 이런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아마 제대로 탁본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필자도 암각화에 대한 관심이 많은지라 여러번 곳곳에서 탁본을 하였는데, 전혀 바위나 요철에 손상은 커녕 흔적조차 남지 않는 방법이라 따로 장을 만들어 소개하겠다.
(1995년 2월, 1997년 4월 촬영, 1997년 4월 작성)

<자료 출처 : 원시예술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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