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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달나무숲 - 대전 | 충청도



부여 성흥산성 당산나무



답사 : 단기4346(서기2013)년 9월

이번에 답사할 곳은 꽤 오래전 TV드라마 근초고왕을 통해 알게된 곳이다.
그동안 마음만 가지고 있다가
대종교 청동시교당을 답사하려 부여에 들르면서 찾게 되어 참으로 가슴 설렌다.
드라마의 혜택인가, 의외로 안내가 잘 되어있어 찾기가 쉽다.






차를 주차하고 보니,
산 길을 얼마간 걸어 가야 할 모양이다.
조금 걸었을까...성흥산성으로 향하는
산 길에 만나는 나무들과 주변 풍경이
참으로 수려하다.




바위에 인위적으로 구멍을 뚫은
흔적들을 보고 여러가지 가능성을
이야기하면서 올라오니
어느새 위풍도 당당하게 서있는
낳익은 나무가 보인다.
아~ 저 나무인가보네.
그래 맞네.
와 크다.



나무 옆에 서서 산성 아래를 보니
가슴이 탁 트인다.
수시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이 곳에 내내 머물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인다.
나무 아래엔 드라마로 인한 것인지
사랑나무라 칭해 놓은 팻말이 설치되어 있다.
시대가 흘럿으니 당산나무를
사랑나무라 칭해놓고
그렇게 누리는 것이야 누가 뭐라하겠는가만은,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기본도 되어있지 못한 지금 우리의
문화적 환경과 교육 환경에 대한
서운함이 크기 때문이다.
이 곳 성흥산성이 있는
성흥산 이름만 해도 그렇다.
성자는 성인 성자 聖를 쓰고
흥자는 흥할 흥자 興 쓴다.
왜 성인 성자를 썼을까하는 것도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인것이다.
당산나무가 이토록 거대하고
무성하게 위풍도 당당히
우뚝서 있는 것 부터가
성스러운 곳임을 짐작케한다.




당산나무 주변에 설치된 안내판에 의하면

성흥산성(聖興山城)
지정별 : 사적 제4호
사비천도 이전인 서기 501년에 쌓은
백제시대의 산성이다.
백제 당시에는 가림성(加林城)이라고 불렀다.
해발 250미터의 성흥산 정상부에 돌로 쌓은
석상과 그 아래쪽에 흙과 돌로 쌓은 토성이 있다.
석상의 둘레는 1,350미터이고 높이는
4미터 가량 되는데, 성 내부에는 우물터,
건물터 등이 남아있으며, 남문,동문과
서문 3개의 문터가 확인되었다.
1996년 석성의 일부를 조사하였다.
현재까지 백제 성곽 가운데 쌓은 시기가
가장 확실한 산성이므로 백제시대의
성곽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후에는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므로
18세기 중엽까지 사용되었다.



당산나무 앞 고개길을 가다 보면
유금필장군의 사당이 나온다.

안내판에 의하면
유태사지묘(유금필장군 사당)
향토유적 제8호
소재지 :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이 곳은 고려 개국공신 유금필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유금필 장군은 황해도 평주사람으로
923년에 마군장군이 되어 골암진에
침입한 북번을 평정하였으며, 그 뒤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후백제 섬멸 뒤 남방을 다스릴 때
고려 태조를 만나러 가다가 임천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 곳 패잔병들의
노략질이 심하고 나쁜 병과 흉년까지
겹쳐 민심이 흉흉하게 되었다.
이 때 군량을 나누어 주고 둔전을 운영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선정을 베푸니
임천 백성들이 감사하여 산 사당을 세워
장군의 공덕을 기리고 해바다 제사를 올려왔다.
941년 장군이 죽자 고려 태조가
충절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그 뒤 성종이 태사유공지묘라는
어필 현판을 내렸다.


기타 참고 자료

부여성흥산성[扶餘聖興山城]
-유형 : 유적
-시대 : 고대/삼국
-성격 : 산성
-건립시기·연도 : 백제시대
-크기 : 둘레 600m
-규모(면적) : 지정면적 12만 916㎡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4호
-문화재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산성.
사적 제4호. 둘레 600m, 지정면적 12만916㎡. 현재 테뫼형 산성으로
남·서·북문지와 군창지, 우물터 세 군데 및 토축보루의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다.
501년(동성왕 23) 8월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苩加)가 축조하였다고 전하는데
당시 이곳이 가림군(加林郡)이었으므로 가림성(加林城)이라고도 한다.
성의 형태는 테뫼형이고 성벽 높이는 대개 3∼4m이며, 축조방식은 일부는
석축, 일부는 토축으로 되어 있다.
일부는 안으로 흙을 다져 내탁(內托)을 하고 외면은 석축을 하였으므로,
흙을 파낸 곳은 자연히 호(壕)를 형성하고 있다.
서쪽 성벽의 석축 부분이 가장 잘 남아 있는데, 그 기초 부분을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성벽보다 약 1.5m 정도 앞의 부분까지 넓혀서 기초를 만들었고 토축 부분은
산의 능선을 따라 지그재그식으로 축조하고 있다.
주문인 남문의 문지 너비는 4m이며, 초석이 남아 있다. 이 남문지 앞에 있는
토성산(土城山)에 둘레 약 200m의 토축보루가 있는데 이 토축보루에는 부속된
소보루(小堡壘)가 또 있다. 이와 같은 대·소 성의 배치는 백제산성의 독특한 점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성을 쌓은 백가는 동성왕이 이곳으로 보낸 것에
앙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잡혀 죽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상위관직인 위사좌평으로 성주(城主)를 삼았다는 사실은
이 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말하여준다.
또한, 백제시대에 축조된 성곽 가운데 연대가 확실한 유일한 것이라는 점과 옛 지명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 성은 백제부흥운동군의 거점지이기도 하였는데 당시 이곳을 공격하던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가 이 성이 험하고 견고하여 공격하기 어렵다고 한 것에서
난공불락의 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초기에 장군 유금필(庾黔弼)이 견훤(甄萱)과 대적하다가 이곳에 들러 빈민구제를
하였다고 하여 해마다 제사를 드리는 사당이 성안에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부여 성흥산성 당산나무 가는 길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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