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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달나무숲 - 대전 | 충청도



충청남도 부여와 부소산성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 부여는 단군 왕검의 네아들(부루, 부소, 부우, 부여)중
막내인 부여의 이름을 쓰는 도시다. 또한 부여는 나라 이름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
백제의 다른 이름 이기도 했다는 남부여)이기도 하였으니
백제인의 단군 사랑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뿐만 아니라 지금 찾아가는 부소산성은 둘째 아드님의 이름을 딴 것이라 한다.
고구려에 대적 할 만큼 강성했던(대륙백제 포함) 대국이었고,
단군의 계보를 잇고자 누구보다 노력했던 충성스런 나라이었던 것이다.



부여 시내의 관광 안내도

부여에 도착하면 시내 어디나 관광안내가 잘
정리되어 있다.
단군사당이 안내도에 없는 것이
못내 아쉽지만 그래도 부여 만큼
민족 정신이 살아있는 정겨운 곳이 별로없다.


금동대향로 모형 동상

국보인 백제 금동 대향로는
세계 최고의 걸작이다.
예술성, 제작기법, 완성도..
어느것 하나 빠지지 않는다.
국립 부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지만
촬영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바깥의 모형이라도 한 컷 해야쥐..


박물관앞 장승들

주차장 한켠에 늘어선 장승들이 해학적이다.
장승은 장르별로, 감정의 표현별로 나눌 수 있다.
슬프거나 웃거나 익살스런 표현으로 다양하지만
예전엔 주로 무서운 표현 일색이었다.
치우환웅이 대웅전에서 밀려나와 사천왕으로
전락하고, 기껏해야 이러한 장승이 되어 버린
이유 때문에 무서운 모습으로
찡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박물관 출입구의 솟대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매개는 솟대가 대표적이다.
돌, 흙등 다양한 소재로 발달했는데
특히 나무로 된 긴 장대끝에
새(주로 기러기)모습을 한 조각을
매달고 있다.


치우환웅기와 무늬 조각

박물관으로 올라가는 계단 머리에
소장하고 있는 유물을 본뜬 조각이 붙어 있다.
일명 연꽃도깨비무늬기와 라고 하는데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무엇인지 단박에 안다.


산수산경치무늬벽돌 모형

부여 규암면에서 출토된
산수산경치무늬벽돌의 모형인데
백제시대의 회화와 건축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사료다.


부소산성 안내도

박물관 지척에 있는 부소산성에 당도하자
매표소 입구에 서 있는 안내판이 보였다.
낙화암 표시도 보인다.
망해버린 나라의 한이 맺힌 곳이다.


부소산성 입구

부소산 입구를 지키고 있는 망루이다.
산에 올라간다니까 막내 아들놈이
벌써 힘든 표정을 한다.


삼충사

백제의 끝을 지키다 산화한
세 충신(계백, 성충, 흥수)을 모신 사당이다.
사당의 용마루 끝을 장식하고 있는
치미는 길상과 벽사를 상징한다고 한다.
진품은 박물관에 있다.


부소산성의 유래

부소산성의 유래를 적었다고는
하는데 차라리 보지 않았으면 싶다.
소나무가 많아서(부소의 소가 소나무라고 해석)
부소산이라고 하였다는 일본식 사관을
그대로 인용하여 안내를 하고 있으니
부여의 의미를 무엇으로 해석하고 있을지
뻔한 일 아닌가?
좀 더 올바른 정보로 올바른 안내판을
설치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참고로 단군문화기행 박성수님은
부소산과 부소산의 소나무를 이렇게 말을 했다.
부소산은 옛부터 아름답기로 이름난 산이어서
좋은 시제가 되고 있다.
지금도 푸른 소나무가 우거진 아름답고
성스러운 부소산은, 그 옛날 백제인이
소나무가 우거진 산 즉, 아사달로 우러러보던
산이었다.
'산신도'에 보면 소나무 아래에 산신이 앉아 있다.
소나무는 신단수인 셈이다.
고려의 수도 개성에 송악松嶽이 있다.
송악은 개경의 북악이요 부소산이었다.
송악은 소나무가 아름답기로 이름난 산이었으나
본래는 민둥산이었다고 한다.
이 송악을 삼한 통일의 성인인 태어날
명당 자리라 점친 사림이 도선 스님이었다.
도선은 소나무를 심어야 명당 구실을 한다고
충고하였다고 전한다.
그토록 소나무는 성스런 나무다.


부소산에서 바라본 부여시내

부소산 정상의 사자루에서는
부여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백마강을 뒤로 한 부소산성은
의자왕이 최후를 맞이했을 만한
충분한 이유의 군사적 요충지임이 확실하다.


백화정으로 가는 길

흔히 낙화암으로 알려진
백화정이 있는 쪽으로 가는길에
주변 숲길에 시선이 간다.
현명하고 의기심이 강했던 의자왕,
그는 정말 삼천궁녀의 요기에 꼬여
나라를 망친 군주일까...?


우리가 알고 있는 낙화암 이야기

의자왕이 삼천 궁녀와 함께
최후를 맞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삼국유사를 인용하고 있다.
철저하게도 백제를 무너뜨린
당사자 - 신라가 문화대국
백제왕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낙화암 정상의 백화정

바람부는 낙화암에 서서 뒤를 돌아보면
1929년 부풍시사라는 단체에서
절개를 지키기 위해 죽어간
백제 여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백화정에서 바라 본 백마강

금강의 상류인 백마강으로
유람선이 지나가고 있다.
역사의 흐름을 잠시 잊고 상념에 젖어 본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의 속삭임이
스산하게 전해온다.


낙화암 벼랑 끝에 서서

우암 송시열에 의해 낙화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꽃이 떨어진 바위라...
그럴듯한 명칭이다.
신라가 쓴 비열한 미인계였든,
여자에 미친 한 왕의 최후였든
역사의 흐름은 무심하게도 백마강 처럼 흐르고 있다.
백마강의 차갑도록 무심함에 발길이 한없이
멈추어 선다.



나는 충남 부여에 가면 반드시 부소산에 오른다.
그리고 삼천 궁녀가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을 찾는다.
설마 3천 명이나 되는 궁녀가 목숨을 끊지는 않았을 것이나
적지않은 의사와 열사들이 강물에 몸을 던져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였을 것이다.
그 백제인의 의열 정신은 과연 어디서 나왔을까.
불교나 유교의 가르침을 배워서 가능하였을까.
아니다. 단군의 가르침인 현묘지도玄妙之道 즉 부루(풍류風流)에 철저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이 존경해 마지 않는 부소의 산에서 백강白江(백마강의 원명)에 몸을 던졌던 것이다.
- 단군문화기행 박성수/지음 -

망국의 한을 지닌 고도 부여...
노랫가락으로 시름을 달래볼까나..,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
폐허에 설은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중략)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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