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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위대한 우리역사 - 왜곡 된 우리역사 바로 세우기



광개토대왕은 왜 삼국통일을 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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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19대왕인 광개토대왕은 고국양왕의 아들로서 이름은 담덕이다. 13세때에 태자가 되었고 A.D.391에 즉위하여 A.D.413년에 40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23년동안 재위에 있으면서 활발한 정복전쟁을 벌였다. 고구려 역사상 가장 방대한 영토를 확장한 왕으로써 광개토왕의 업적을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며 오곡은 풍성하게 익어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되었다'라고 광개토대왕비문에 기록하였다. 연호로 영락을 사용하여 영락대왕이라고도 한다.

광개토대왕 비문을 보면 광개토대왕은 당시에 신라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힘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문의 기록중에는 A.D.396년의 고구려와 백제의 전투에서 백제의 아신왕은 할 수 없이 남녀 천명과 세포 천 필을 헌납해 보내며 광개토대왕의 면전에 꿇어앉아 '지금부터 영원히 당신의 노객이 되겠소'하고 맹세했다. 광개토대왕은 은혜를 베풀기로 하고 백제의 성의를 받아들이었다. 즉 백제의 대참패였다. 할아버지를 죽인 나라 백제를 정복한 광개토대왕은 백제 아신왕을 죽이지 않고 용서를 합니다. 광개토대왕은 정복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제왕을 용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백제와의 전투에서 완전히 나라를 격파해 영토를 넓히기보다는 백제를 고구려의 지배아래 두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라는 고구려와 어떤 관계였을까요? 광개토대왕 즉위 10년, 신라가 위기에 처했을 대 고구려는 신라를 구하기 위해 구원군 5만을 보냅니다. 그리고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광개토대왕비에는 내물왕이 A.D.399년, 고구려에 급하게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인이 신라에 가득해서 성지는 모두 파괴되고 광개토대왕의 신하인 신라왕은 천민으로 변했다. 신라 내물왕은 광개토대왕의 지시를 간절히 원했다. 이에 광개토대왕은 신라의 충성을 칭찬하면서 신라사신에게 밀계를 주어 돌려보냈다.' 밀계를 주어 신라사신을 보낸 다음 광개토대왕은 그 이듬해, 신라를 구하기 위해 5만의 군사를 신라에 보냅니다. 고구려군은 전투마다 승전고를 올리고 광개토대왕의 군대는 마침내 왜와 연합한 철의 나라 가야를 역사 속에서 지워버립니다. 고구려의 대승이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군이 정복한 수많은 성은 신라병사들이 지키도록 내주었습니다. 이 전쟁을 계기로 신라왕은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합니다.

삼국사기등 역사책엔 기록되지 않은 이 전쟁의 결과를 얘기하는 또 하나의 금석문이 있습니다. 바로 중원고구려비입니다. 중원고구려비에 보면 신라왕이 직접 옷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라가 고구려에 깊숙이 예속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흔히 조공관계는 신하를 보내 조공하는 방법이 일반적입니다. 왕이 직접 친조를 하고, 직접 의복을 하사 받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그런데 이때 신라는 왕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는 단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신라는 군사력에 있어서도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는데, '신라토내당주'가 이를 증명합니다 고구려의 '당주'라고 하는 것은 '군사령관'을 미하는데, '신라토내당주'라고 하는 군사령관의 지위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군사적으로 고구려가 5만의 대군을 파견해서 신라를 지배하는 것이죠. 고구려군이 영주에 일정한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신라의 독립은 유지됐지만 신하로 대한 것입니다. 실제로 광개토대왕비에 보면 신민을 만들었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바로 그것이 단적인 표현입니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에 거의 예속됐다고 봅니다. 그리고 중원고구려비는 바로 그같은 사정이 구체적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할아버지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백제를 무릎꿇게 했습니다. 그리고 신라에는 고구려군사를 주둔시킬 만큼 고구려의 영향력은 컸습니다.

우리는 흔히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다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고구려에서 삼국통일이 가능해 보이던 시기는 광개토대왕 때입니다. 당시 광개토대왕이 이끄는 고구려의 군사는 싸웠다하면 이기는 백전백승의 부대였습니다. 그렇지만 광개토대왕은 삼국통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고구려는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구려시조 동명성왕(고주몽)이 요동성에 칠중목탑(七重木塔)을 지어 제천(祭天)하였다는 역사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구려는 하늘의 자손이라는 의식을 가진 민족이었습니다. 왕과 왕실은 하늘의 혈통이고, 고구려사람은 천손이라고 믿었습니다. 동북아의 중심국가라는 그런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런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왕호를 쓸 때도 그냥 왕호를 쓰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왕의 경우는 태왕이 되고 백제와 신라는 왕입니다. 태왕은 '왕중왕'이라는 뜻입니다. 중국식으로 황제라는 칭호와 마찬가지입니다. 왕중의 왕, 태왕이었던 광개토대왕에게는 영토를 넓히는 것보다 고구려를 받드는 제후국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는 북부여와 신라, 동부여, 백제를 태왕의 질서 속에 사는 신하의 나라로 남겨두고자 했던 것입니다. 광개토왕비를 정확히 분석해보면 고구려측에서 백제, 신라, 가야, 동부여 등은 신하의 대상으로 대고구려라는 통일 질서 속에 들어오는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라든지 패려는 공파의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당시 고구려가 그 두 종족을 분리해서 생각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광개토대왕의 남진정책은 단순히 영토를 확장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일민족의식을 기반으로 하는 통일의지에 있습니다. 고구려의 질서 속에서 한민족이 함께 사는 것, 그것이 바로 광개토대왕이 추구했던 통일이었습니다. 중원고구려비에는 '수천'이라는 글자가 있습니다. 하늘을 지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형여제 수천' 이라는 비문의 내용은 고구려는 신라왕에게 영원히 형과 아우가 되어서 이 세상의 원리인 '하늘'을 함께 지켜나가자고 한 것입니다. 즉 광개토대왕(好太烈帝)은 마리산, 속리산등에 올라 정기적으로 친히 하늘에 천제를 지낸 역사의 기록으로 볼 때,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삼국통일을 꿈꾸지 않았던 것입니다. 정복해서 한 나라가 되는 것보다는 고구려 중심의 조화질서 속에서 함께 사는 세상을 지향한 것입니다. 조화의 큰 원리인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비젼으로 평화 세계를 이루었던 단군조선시대의 이념을 계승한 다물의 정신 이것이 바로 고구려의 세계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중원의 진, 한, 수, 당나라로 전개되는 枝那의 왕조와 맞서서 당당한 고구려의 천하를 건설한 하늘의 자손임을 부르짖었던 그들은 고구려가 세상의 중심임을 광개토왕비에 가득 새겨 놓았습니다. 고구려는 바로 여러 왕을 다스리는 왕중왕인 태왕의 나라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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