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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위대한 우리역사 - 왜곡 된 우리역사 바로 세우기



진시황과 만리장성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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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우리역사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역사왜곡의 동기와 과정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를 종식한 진시황은 두 가지의 어마어마한 역사적 사건을 단행하였다. 하나는 만리장성 축조이고, 또 하나는 분서갱유 사건인 것입니다. 바로 우리민족의 역사 왜곡이 여기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진시황은 수많은 유학자들을 생매장시키고 서적들을 불태웠습니다. 그때 춘추를 비롯한 공자의 저서들도 물론 소각되었습니다. 그 후 한(漢)무제의 문화 재건정책에 의해 악경을 제외한 시경, 서경, 예경, 역경, 춘추 5경이 복원되었다. 또한 복원 과정에서 한(漢)나라의 학자들에 의해 경전들이 왜곡 첨삭되었다고 본다. 춘추에 대한 말이 나온 김에 공자에 대해 한가지 언급하고자 한다. 공자는 분명히 자신이 은인(殷人)이라고 밝혔으며 자신도 동이의 땅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였다. 그런데 정작 공자의 저서인 춘추에서 보면 동이(東夷)에 대해 제자가 묻자 '이(夷)는 더러운 것이다' 라고 깍아 내리는 언사를 쓰고 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것에 대하여 두가지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춘추의 원문이 후세에 춘추필법이라는 명분에 의하여 누군가가 첨삭하였을 경우이다. 공자의 저서에는 제자가 동이(東夷)에 대해 묻자 "융적과 더불어 더러운 것이다" 라고 평하였다. 이외에도 동이에 대해 특히 깍아내리는 문헌이 많이 보이는데 공자가 동이족의 땅에 가서 살고싶다고 말한 바와 모순이 생긴다. 또한 "구야는 은인야"라 하여 공자 자신이 은인(殷人)이라고 밝힌 바도 있다. 또 다른 제자가 夷족들이 예가 없고 야만족입니까? 질문하였을 때는 "夷는 어진 사람들이며 마땅히 공경할 만한 사람들이라고 언급하였다"라는 이 모순은 어디서 생긴 것일까? 공자가 사망한 후 진시황의 대대적인 분서갱유가 단행되었고 후일 한(漢)나라 때 공자의 저서 6종 저서 중 5종만 남게 되었는데 이때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마천의 사기와 춘추필법(春秋筆法)도 이 당시에 나온 것으로 볼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두번째 경우는 공자가 노나라 땅에 태어나서 지나족의 정서에 맞추어 썼다고도 볼 수 있다.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의 생전의 말을 토대로 기록한 것이라 할지라도 공자의 평상시 가르침과 비교하여 볼 때 상당한 어폐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위의 춘추에도 보면 당시 명확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단군천제의 사자인 우임금의 실제 대면상황을 꿈속에서 대면한 것으로 적고있다.

달에서도 볼 수 있는 인공 구조물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남미의 나즈카지상그림이고, 하나는 중국의 만리장성이다. 진시황은 중국대륙을 통일한 뒤에 무엇이 겁이 나는지 수 백만명을 동원하여 만리장성을 쌓는다. 이 만리장성은 사실 진나라 때 완성된 것이 아니라 명나라 때까지도 만리장성 축조가 계속된다. 또한 만리장성을 쌓는 그 많은 돌들은 다 어디서 났을까? 만약 필자가 동이족의 지배하에 오랫동안 놓였던 한족이었고 폭군이었다면 당연히 역사서 뿐만 아니라 그 유물까지 없앴을 것이다. 혹자는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만리장성 축조 등은 단순히 반대파 숙청을 위한 행동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단순한 반대파 숙청이라면 진시황은 어째서 분서갱유를 행한 뒤에 신하에게 명하여 다시 서적을 발간하고 제도정비와 도량형 정비를 했을까? 반대파의 학문까지 척결대상이었으면 진시황이 대규모 숙청 뒤에 다시 유교의 서적을 발간할 일이 없지 않은가? 수 만명의 유학자 생매장과 서적소각은 증거인멸의 행위에만 사용되는 경우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새로운 왕조가 설립되고 그 반대파의 숙청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있어왔다. 수천년동안 수백번도 있어왔다. 그러나 반대파를 숙청할 때 그 사람들이 저술하고 쌓아왔던 학문자체를 폐기하고 새로이 서적을 발간한 경우는 진시황밖에 없다. 유학자들이 신봉하는 동이족의 문화와 흔적을 말살하고 새로이 지나족의 형태로 바꾼 것이다. 그 이면에는 지나족이 동이족의 종주국인 단군조선을 천자국으로 숭배하였던 사상과 맞물려있다. 秦始皇이란 명칭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의 첫번째 황제라는 의미이다. 즉 중국 최초로 스스로 황제란 칭호를 쓴 사람으로 단군조선의 제후가 되기를 원하지 않은 것이다. 문화의 흔적을 지우지 않는 이상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도 영원히 단군조선에 대한 경배를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반대파 숙청을 위해 만리장성을 쌓는 것은 명분이 되지를 않는다. 무슨 반대파가 일반 백성들 수백만명이 반대파일 수가 있는가?

만리장성 축조사업은 당대에 끝나지도 않을 일이며 수백만의 백성들의 반발로 국가의 초석을 채 다지기도 전에 위기에 처할 것임은 당연하다. 적어도 중국대륙을 통일한 자가 일개 점쟁이의 말에 휘둘려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본다. 진시황 그도 역시 한시대를 풍미한 영웅이 아니던가?. 적어도 점쟁이 말에 휘둘려서 국가의 가장 중요한 백성들의 신뢰를 잃을 사람은 아니다. 무엇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부언하면 진시황은 이후 신하를 시켜서 단군조선의 문화식민지적인 시대를 잊어버리기 위한 수단으로 만리장성 축조, 분서갱유와 조작된 서적을 출간하고 도량형을 새로이 통일한 것이다. 반대세력 축출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동이족 세력 축출과 동이문화 숭배사상을 말살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며, 단군조선에 대한 반기는 곧 인의(仁義)와 스승을 소중히 여기는 유학과 神仙道문화에서는 있을 수 없는 배은망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시황은 자신의 치부를 항상 들추는 당시 동이문화를 추종하던 모든 세력을 말살하려 한 것이다.

이 분서갱유 이후부터 중국의 역사는 앞뒤가 맞지 않는 엉망진창의 역사서가 속출하기 시작한다. 현재 전해지는 중국의 역사서는 거의가 진시황 이후 漢 나라때 만들어진 것이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 이후 지나족의 이민족 정책은 아래의 기준에 의하여 진행되었다.

첫째. 타국을 침략한다.
둘째. 문화 서적을 수집해서 없앤다. 지식인들을 회유하거나 죽인다.
세째. 앞뒤가 맞지 않는 역사서를 만들어낸다.(진나라는 30년 밖에 유지되지 않았다)

이것은 일본의 고조선사 조작과 너무나 유사하지 않은가 한다. 일본의 한반도 강점 역시 30여년 조금 넘는 기간이었다. 그런데 일본제국주의의 행위중 하나가 빠져 있다. 일본의 경우에는 역사책 20만 권을 불태운 것뿐만 아니라(일본 황실 도서관으로 고스란히 훔쳐갔다는 증언도 있다) 우리나라의 고묘와 유물과 문화 유적까지 약탈해가서 흔적을 완전히 지워 버린 것이다. 혹시라도 흔적이 남을까봐 철저히 끼워 맞추는 책을 발간해 놓았다. 그런데 진시황은 바보였을까? 서적을 불태우고 수만명의 유학자들을 생매장하고는 정작 유물과 유적은 가만 놔뒀을까? 만리장성에 사용된 돌을 파헤쳐 본다면 분명히 환웅천황과 단군의 묘에 사용된 비석과 벽화가 새겨진 거석이 출토 될 것이라 본다. 그리고 장신구나 대부분의 금속 유물들은 녹여져 진시황의 아방궁 건축에 사용되었으리라. 진시황은 중원대륙 곳곳에 있는 환웅천황과 단군의 묘까지 파헤쳐 만리장성의 주춧돌로 쌓았으리라. 그것은 흩어 놓아도 언젠가는 발굴될 것이며 수많은 거석들을 일일히 파헤쳐 비석의 문자를 지운다는 것이 현실상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동이국가의 혼란이 안정되면 다시금 천자국으로의 위상을 찾으려는 동이국가의 다물정신에 대비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고 동시에 동이족(東夷族)의 유적인 환인천제, 환웅천황 및 단군의 묘를 파헤쳐 없애버려 영원히 그 흔적을 지우려 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진시황은 폭군이었을지언정 어리석은 자는 절대 아니다. 대륙을 통일하게 되면 아무리 폭군이라도 국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세금 감면과 백성들의 노역을 줄여주고 선정을 베푸는 것이 상식이다. 그래야 인심을 얻고 자신이 세운 나라가 수 백년을 지속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시황은 중국대륙에서 동이족의 지배 흔적을 모두 몰아내고 당시 내분 중이어서 힘을 크게 쓰지 못한 아시아의 종주국인 단군조선에 대한 대비책으로 만리장성 축조사업 정책을 펼친 것이다. 진시황은 한족(漢族)언어를 쓰는 나라들을 통일한 후 내륙에 존재하는 수많은 동이계열의 언어와 문화를 가진 부족들을 숙청했다고 한다. 또한 주로 만리장성축조에 동원된 이들은 비 동이계열 민족들이다. 혹자는 진시황조차도 동이계열이었다고 하지만 이 부분만큼은 확실하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이 당시 수많은 고대의 문화가 사장되는 과정에서 유실된 것들은 인류문화의 기원을 밝힐 수도 있는 참으로 소중한 것들이 분명 많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인류전체 문화유산을 파괴하는 위정자들의 행위는 지금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오늘날 한민족의 뿌리문화인 神仙道문화는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우리의 위대한 상고사와 神仙道문화가 역사속으로 사라진 최초의 대사건이 바로 진시황의 주도면밀한 만리장성축조와 분서갱유라고 볼 수 있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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